작성시기 2011년 초 추정.

특별히 학교폭력에 관한 묘사는 없으나 왕따가 가볍게 묘사되며 '로리' 워딩이 나옵니다.

옐로→골드→실버



왕따와 전학생


#1 왕따의 심리상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은 또 같은 멜로디로 몇초간 재생되었다. 반 애들은 모두 제각각 친구를 만나러 갔지만 단 한 명은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음 수업의 준비따위를 하려고 앉아있던 게 아니었다. 그건 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저하지 못한 폭발적인 앞머리, 반쯤 풀어진 넥타이. 풀어헤친 교복 조끼와 텅 비어보이는 책가방. 단지 그는 찾아갈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흐리멍텅했다. 뭔가 상당히 질려보였다.


(골드 시점)

난 지금 상당히 질렸다. 하품밖에 나오지 않고 눈의 초점도 맞춰지지 않는다. 놀 녀석이 없어서 그렇지, 난 노는 걸 매우 좋아한다. 나, 이래봐도 마음 넓고 성격 좋다. 그치만 지금은 아무도 그걸 모른다. 왜냐면 나랑 접촉이라도 해본 녀석은 얼마 없으니까. 아아, 제발 친구 한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2 포니테일의 로리녀

하도 지루해서 난 별 수 없이 운동장이라도 돌고 있었다. 그러다 본 게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귀여운, 아니 대박 귀여운 포니테일 소녀. 그녀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었다.

"야, 안녕? 몇반의 누구?"

그러자 그녀는 겁이 났는지 침을 꼴깍 삼키고서 대답했다.

"에, 에엣……, 3학년 7반의 옐로……."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겁내는 거지? 설마,

"설마 너 지금 나, 불.량.학.생으로 보여서 그런 거야? 에엣? 그런 거야? 아, 아니, 그다지 그런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나."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 다시 보니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그렇지만 그 외모, 오해받을만 해."

그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뭔가 당황스러웠다. 나는 불량학생이라거나 나쁜 녀석이라거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에, 옷차림이나 앞머리로 말하자면, 난 다른 녀석들과 붕어빵같이 똑같은 건 싫거든!"

내가 오른손의 엄지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수업종이 울렸다. 옐로는 이렇게 말하고서는 앙증맞게 뛰어가버렸다.

"괜찮다면, 나중에 또 얘기하자!"

그렇게, 난 기적적으로 친구를 얻었다. 그것도 나와 전혀 반대적인 성격의, 귀여운 로리녀!


#3 버스에서 만난 은색 눈동자

하교버스였다. 보통 등교할 때라거나 학교에서 본 적 없는 녀석이 하교버스에 나타나는 일은 그런 만큼이나 드물다. 오늘 딱 그런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버스 안은 거의 항상 꽉 차있었다. 그래서 문 앞에 서있는데 내 오른쪽에 긴 붉은 머리의 남자애가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야, 너. 뭐 하는 애냐?"

그러자 그가 신기하게도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아무래도 '뭐 하는 녀석'의 범위가 넓기는 하다. 그래도 그렇지 대답이 좀 짧지 않나?

"그니까 너 누구냐고. 이름은……?"

"실버."

"그런 녀석은 우리 학교에 없을텐데?"

"전학생."

"내일이 첫등교인거냐?"

"응."

"……."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주변 환경의 소리만을 들으며 나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엄마에게 '실버'에 대해 잠깐 말했더니 하는 대답이 글쎄,

"잘됐네, 골드― 친하게 지내렴."

아니, 뭐랄까. 그게 쉬우면 이미 친구 많았겠지.

"알고 있어.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안 그러니?"

아니, 엄마. 내 생각을 읽은 거야?

흐앗…. 하루 일과가 끝나면, 피곤하다.


#4 3학년 2반 19번 실버

"그럼, 전학생을 소개할게요☆"

"으에에에에에엣?! 저 녀석……!"

설마 했지만, 설마 같은 교실일 줄이다.

"아는 녀석이에요, 골드쨩?"

"아…… 뭐……"

순간 실버가 내쪽을 좀 무섭게 쳐다본 것 같기도 하다.

"아, 실버쨩에 대해서라면 저-기 잘 알고 있는 블루쨩에게 물어보면 돼요~"

서…설마 내 짝이… 실버의 관계인?!

웬 랜덤한 전학생이랑 심하게 엮이는 듯…?

실버도 어쩌다 버스에서 본 놈이 블루의 짝이라서 내심 조금 놀랐을 거다.

"그럼, 실버쨩은 저-기 옐로쨩 옆에 앉아!"

아니, 옐로는 존재감이 무지 없나보다. 설마 어제 드디어 사귄 친구가 우리반이었다니. 그걸 또 모른 나도 신기하다. 그리고, 웬 또 실버가 옐로의 짝궁이라니. 우연이 오늘따라 많다.

실버는 대부분 시간 과묵했고, 그래서 나처럼 친구도 없었다. 아니, 나와는 확실히 다랐다. 녀석은 주위에 '친구하고 싶은 놈'들이 잔뜩 있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나와는 달리 실버는 귀찮다는 듯 스스로 다른 녀석들을 떨쳐내버린다. 부러운놈. 내친 김에 일단 실버에게 가봤다.

"뭐야. 특별한 용무 없으면 가."

이래갖고 실버랑 얘기하는 건 무리다.

"그쪽의 상록 그로브에게 용무가 있는데?"

"……."

"아, 골드!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심심해서."

"그래? 그럼 잠시 수다라도 떨까?"

"실버. 어떤 녀석이야?"

"……. 과묵하고 항상 무표정이야.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데, 왜인지 항상 찾아오는 사람들을 떨쳐내버려."

"저 녀석은, 그게 익숙한 것 같아?"

"응. 오히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편을 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해. 그치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야."

"…….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거야. 그런 녀석을, 난, 그냥 보고 있을 순 없어."

"아……."

그리고 내게도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난 골드 네가 좋은데…. 좋아하는데…."


#5 접근

이렇게 해서는 실버와는 아무 관계도 될 수 없어. 별로 관계를 만들 생각은 없지만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자꾸만 든다.

그래, 아무래도 정면돌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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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KOF 14 얼마 전 정도 시점, 이오리 위주 글. 고양이도 나오고 쿄도 나오고 신고도 나오지만 아마 논커플링. 암경 혹은 경암으로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트리거워닝: 애완묘의 유기·동물학대에 대한 묘사 및 사용된 관련 소재에 대한 고찰의 부재)



“어이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


으슥한 골목, 한밤중. 창백한 달빛 아래 길게 그림자가 늘어져있다. 야가미 이오리는 쭈그려 앉아있다. 트레이드마크인 머리카락의 붉음이 번지기라도 한 듯이 주위까지 온통 빨갛게 된 모습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질척거리는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


쿄는, 그것을 보고 말았다.


겁내거나 물러서지는 않지만, 눈을 찡그린다. 냄새마저 비릿하다.


쿠사나기 쿄를 인식한 야가미 이오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희번뜩대는 눈을 하고, 낮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유령의 웃음처럼, 불길함이 가득했다.


“흐흐…… 쿄. 나와 싸울 마음이 들었나?”


“너, 그건 대체 왜……”


내게 경멸을 사기 위해서? KOF에서 처음 그와 재회했을 시절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야가미 이오리라는 자는 그렇게 우회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정확히 자신만을 향해, 그 누구보다도 올곧게 감정을 쏟아왔다.


“덤벼라, 쿄!”


“크윽, 여전히 말은 안 통하는군……!”


날아오는 보랏빛 불꽃을, 쿄는 가볍게 자신의 붉은 불꽃으로 튕겨냈다. 여느때보다도 짙어진 듯한 청보랏빛. 잃어버렸었던 불꽃과 함께 쿄로서는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떠한 절망도 함께 되돌아왔다는 듯이, 옛날처럼 슬픈 울림으로 웃고 있다.


“한눈 팔지 마라, 쿄! 내게 집중해라!”


네, 네. 그러시겠지요. 시끄럽네―


“한눈은 누가 팔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야가미!”


쿄의 강 펀치가 이오리의 복부에 명중한다. 이오리는 잠지 주춤했다가, 다시 일어나 공격을 되돌려준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쿄의 뺨을 비껴간다.


어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야가미 이오리.


꼭 옛날로 돌아가버린 것 같잖냐.




* * *




 ―냐아.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이오리는 반사적으로 길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옆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거리로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오리는 고양이를 살펴보았다.


 주인에게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일까, 온몸의 새카만 털은 약간의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검은색 사이에서 눈만이 금빛에 가까운 연두색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체라고 보기에는 아직 자라는 중인 듯, 크기는 조금 작았다. 그러나 주변에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뭐냐.”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고양이도 곁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함께 나아갔다.


 “따라오지 마라.”


 자신이 어디서 온지도 모를 고양이를 돌볼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오리는 마치 고양이가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더 똑똑히 말했다. 


 “짐승이여, 당당하게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라.”


 ―……


 고양이는 조용히 이오리의 눈을 빤히 마주보더니,


 ―냐아아.


 이오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오히려 그의 다리에 뺨을 부비작거리는 것이었다. 이오리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싫지는 않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서는,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왔다.


 “꺼져라, 고양이.”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고양이는 오히려 그 낮은 목소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떨어질 생각은 않고, 계속해서 야가미 이오리를 따라 걸었다.


 별 수도 없이, 야가미 이오리는 허름한 아파트까지 고양이와 동행했다.




* * *




 다른 생명체의 곁에서 잠들고,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은 이오리에게 있어서는 낯선 감각이었다.


 분명, 기억을 뒤져보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흐릿해진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쿠사나기 쿄 말고는 모든 것이 흐릿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무얼 위해 태어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야가미 이오리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정답은,


 ‘죽이기 위해서다.’


 뱀이, 목을, 심장을, 감아온다.


 ‘쿠사나기를 죽여라.’


 뱀의 목소리가, 조소한다.


 ‘어차피 너의 삶은 그것뿐인 걸, 너도 알고 있을 터.’


“꺼져라, 뱀.”


‘주인이여, 내게 저항해도 소용 없다. 왜냐면―’


―캬아아.


불현듯, 뱀이 기어들어갔다.


혈관을 짓누르던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고양이……?”


―냐앙.


이오리가 의식하자, 고양이는 회답하듯 도도도 걸어와 거친 손등을 핥아주었다.


“……네놈이 뱀을 쫓았나.”


고양이는 대답 대신 작은 몸을 기대어왔다.


괜시리 쓰다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따스했다.


따스했다.


그것을 깨닫자, 야가미 이오리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


무너지는 감각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시려서, 그 순간의 이오리는 차라리 뱀의 꽉 조여오고 화끈하게 불타는 아픔이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적어도 익숙한, 길들여진 아픔을.


정체불명의 아픔. 그것은 전부, 따뜻하고 보드라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 * *




고양이는 이오리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혹은 요구했더라도, 이오리 쪽에서 그것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이오리가 라이브하우스에서 연주를 하는 밤 시간에 알아서 먹이를 찾고, 그가 귀가하는 새벽녘이 되면 언제나 그의 곁으로 되돌아오는 습관을 유지했다. 그리고 늘 마음의 경계를 허술하게 하지 않는 이오리라고 해도 점점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나흘째, 그것이 갑자기 끊겼다.


녀석, 드디어 질린 건가.


이오리는 오랜만에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그토록 꺼지라고 말했었지만 정작 이렇게 되니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보드라움 속에서 잠들던 오후들, 사람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숨결에 깨어나던 저녁들. 혐오스러운 뱀의 목소리 대신 귓가에서 울렸던 야옹거림들.


하지만 그것들 전부가 자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그것은 이튿날 다시 돌아왔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비극적이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이오리는 그 고양이를 알아보았다. 잊을 수 없었다.


돌아온 고양이는 발랄하고 생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싸움에서 진 파이터처럼 너덜너덜해져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양이는 파이터가 아니다.


‘치료를’


(그러나, 이오리에게 그런 특기는 없었다. 허름한 동네에는 수의사도 없었다. 이오리 자신조차도 필요할 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고양이는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이오리를 향해 눈빛을 보내왔다.


━━━.


고양이의 목울대에서 나온 것은 긁는 듯한 소리가 전부였지만, 이오리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후후후…… 흐흐……’


밤은 너무나 깊었고, 고양이도 더이상 뱀을 쫓을 수 없었다.


 ‘주인이여…….’


“하, 하하…….”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겠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 *




“그 녀석, 우는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어. 1996년처럼.”


“오오, 구체적…… 이네요.”


“내가 참가했던 대회를 잊을 수는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저도 쿠사나기상이 참가한 KOF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구요! 헤헤.”


“그러냐.”


“에엑~ 좀 더 기뻐해 주세요!”


“아니, 잊어버려도 되니까. 랄까 잊어라, 좀. 훠이훠이.”


“쿠사나기상~”


신고의 우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는 쿄의 의식은 야가미 이오리에 관한 생각으로 둥실둥실 흘러간다.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게. 연한 햇빛이 다정하게 내리쬐는, 그런 낮이다. 그러나 쿄는 전날 밤을 생각한다.


‘검은 고양이, 인가…….’


피에 젖은 손으로 죽은 고양이를 들고, 슬픈 눈으로 웃던 야가미.


‘그러고 보면, 불행의 상징이라는 얘기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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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15)


만약 자살에 실패한다면 니시키노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면 좋겠다




동반자가 아니므로 너에게 연락은 가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보다도 가까운 것도 모르고 연락을 받지 않는 내가 아주 멀리에 있는 줄로 알겠지


하지만 그걸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날의 대기실을 떠올리면 언제든 죽을 용기가 생긴다. 그 순간의 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과 체념, 문득 중얼거린 "죽고 싶지 않아" 그대로 아무것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이제와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은 죽지 않는 것보다 하나도 낫지 않다


고통은 피부처럼 익숙하기 때문이다 고작 고통을 회피하는 것에는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유의미한 변화, 좋은 일을 원한다


그와는 반대로 드디어 땅 위로 되돌아왔지 익숙하고 숨 막히는, 만약에 조금 더 연기를 했다면 조금 더 떠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없는 신앙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교인 같은 일이다


천국에는 갈 수 없겠지만 갈 거라고 믿는 전능감, 그런 기분은 낼 수 있겠지




자살에 실패해서 니시키노 종합병원으로 이송되고 싶은 것이다




분명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바다가 보이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네 향기에 감싸여서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죽어갈 수 있다면 분명 너를 망가뜨렸대도 행복하겠지


꿈에서라도 좋은 일을 원하니까


공교롭게도 너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2019. 2. 28

카르마←나기사←카에데인데 카르마랑 나기사 중심임... 온갖 감성이 짬뽕되어있음 일단은 50년대 미국 AU


1.


    “카르마, 제발.”


    한숨 섞인 목소리에 울분이 담겨있다. 카르마는 웃었고, 나기사는 카르마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카르마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다시 씨익 웃었다.


    “걱정 마, 안 죽어.”


    카르마가 액셀을 밟자, 또 어딘가 잘못되어서 나는 것이 틀림없는 소음과 함께 차가 지나치게 빨리 달렸다. 자갈이나 갑각류, 버려진 병 위로 달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꼭 붙든 나기사도 같이 덜컹거렸다. 멀미가 날 것 같다. 나기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차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연한 에메랄드빛으로 고요하게 넘실거리는 모양은 그 순간에는 바다라기보다도 호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고가 날 법한 속도로 차를 몰고 있었지만 새벽의 해안에는 사람들을 지워낸 듯이 아무도 없었다.


    연한 에메랄드빛 바다의 색깔은 저와 그 아이의 중간 즈음 같다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생긋 웃는 얼굴이 예쁘던 그 아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는 슬럼에서 교사 일을 하고 있다던 그는 유독 예쁘장해서 어려서부터 연극배우를 했다. 넉넉하지는 않은 형편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하던 나기사는 극장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기껏해야 그가 원할 때 그에게 생수를 가져다주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비슷한 또래라는 이유로 그는 나기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나기사는 무대에 선 그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정도 연기라면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가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가……’


    ―끼이익,


    나기사가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에 카르마가 급정거했다. 물론 역효과였다.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힘겹게 어깨를 들썩이는 나기사를 카르마가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도 알잖아? 네 탓이 아니야.”


    나기사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멍청아.”


    카르마의 감정이 연민에서 무력감, 무력감에서 초조함, 이윽고 초조함에서 짜증으로 바뀌어갔다. 눈치가 지나치게 좋은 나기사는 그것을 온전히 느꼈다. 그래도 힘 빠진 목소리로 제 할 말을 했다.


    “그래도…… 만약 내가 계속 그 애 옆에 있어 줄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과연 네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응?”


    카르마가 경적을 내리쳤다.


    아무도 없는 바다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기사는 그 소리에도 덜컥 겁을 먹었지만, 주변에는 경찰도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었다고 그래?”


    카르마의 말대로였다. 카르마가 운전대를 잡고 제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거칠게나마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나기사는 결국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폐 끼쳐서 미안해, 카르마.”


    카르마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내려라.”


    “뭐?”


    “어디로든 가라고, 내려서. 다리도 멀쩡하잖아?”


    나기사가 카르마와 눈을 마주했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 대 때렸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카르마와 나름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나기사였기에 알았다―저런 눈빛의 카르마는 사람을 때린다.


    단념하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차 안으로 훅 들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카르마의 코끝을 찔렀을 때 카르마는 나기사를 내쫓은 것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나기사는 이미 카르마의 쉐보레 벨에어를 등진 채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2.


    해안을 계속 걷고 있었다. 걸음 수만큼 발자국이 찍혔다. 태양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점차 따뜻해지는 해안, 나기사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카르마에게 충동적으로 내쫓긴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지만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카르마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런 자세를 취했던 걸지도 모른다. 카르마는 나기사를 소중히 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충분조건처럼 여겼다. 오직 나기사가 시답잖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카르마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곳으로 나기사를 골랐다. 그러나 나기사는 카르마를 이해했다. 누구나 그런 곳이 필요한 법이다―나기사 자신도 그러했다. 그런 카르마가 저를 내버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총이라도 맞지 않는 한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기사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끼고 발밑을 내려보았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콜라병 같았다. 간밤의 누군가가 즐겼던 흔적일 것이다. 얼굴 모를 그들은 즐거웠을까. 즐거움의 대가로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일까. 나기사는 걸음마다 백사장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차례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혈흔이라 신경은 쓰지 않았다.


주변은 점점 밝아지고 사람도 하나둘 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앳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기사는 내륙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햇빛을 받아들인 바다는 연한 에메랄드빛 띠는 것을 그만두었기에.




도시에서는 영어와 비슷한 비율로 드문드문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많이 남쪽으로 왔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주머니를 뒤져 2달러 남짓 되는 돈을 발견했으므로 나기사는 근처의 다이너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이름은 리오였다. 눈썹 색을 보아 머리카락은 염색 금발이었지만, 투명한 파란 눈은 진짜였다. 한눈에 타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느니, 그렇지만 첫눈에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느니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으며 그는 나기사에게 꽤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기사가 적당히 고개를 끄떡여주자, 자기는 성적은 좋았는데 학교를 자퇴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기사는 문득 저도 학교에 되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뭐 하고 살아?”


허를 찔렸다.


“어, 글쎄……”


“너, 놀라는 게 꼭 토끼 같다. 머리 때문에 그런가?”


카에데가 그렇게 묶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카에데 없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괜찮아. 난 여기서 자주 보거든.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사람들.”


“……지금은,” 나기사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기다려? 뭘? 기회를? 사람을?”


“사람을 말이야.”


카르마가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주길 기다리고 있어.




3.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어 시동을 멈추고 핸들 위로 엎드렸다. 낡은 차가 당장 무너져내릴 것처럼 덜거덕거렸다.


    이대로 멕시코나 네바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다. 과거에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미래에도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에 문화적으로 눌어붙은 온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쪽이 중요하다. 오직 사랑만이 무언가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나기사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나기사가 카야노 카에데를 찾았듯이.


    


카에데의 시체를 말이다.


    


‘카야노 카에데’라는 가명으로만 나기사는 마지막까지 그를 알았다. 나는 그의 본명이 유키무라 아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름과 무관하게 그는 언니가 남자친구의 총에 맞은 날 자살했다. 그는 언니와 나기사가 보아주는 것을 유일한 보람으로 살아가던 연기자였고, 언니가 죽고 나기사가 떠난 상황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허무에는 취약한 법이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나기사가 동네에 없었던 이유는 2주 전에 특별한 이유 없이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나를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사랑 고백을 유언으로 남긴 카에데의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나기사는 후회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나기사와는 무관하게 카야노 카에데가 텅 빈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카에데는 나기사를 돌보며 자기 자신을 나기사로 가득히 메웠고, 나기사는 자신을 돌보는 카에데로부터 평온을 얻었다.


    


    눈을 뜨자 하늘이 다시 어두웠다.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차를 몰고 그대로 멕시코로 사라질지, 나기사를 찾을지 고민했다.


있을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것에 기뻐하고 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받으면 이 세상에 속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찾아낸 나기사가 살아있지 않은 모습이라 하더라도 무엇 하나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헬륨 풍선 같은 마음이 나기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지만―그리고 그것이 두렵지도 않았지만―관성처럼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4.


    먹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톡톡 떨어지던 비는 눈 깜짝할 새에 소나기가 되었다.


    따라서 카야노 카에데를 덮은 흙 위로, 흙을 덮은 들꽃 위로 연한 비가 가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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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9


 니시키노 마키는 가볍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아파트 방은 깜깜하다―별로 의외는 아니다. 거실에 인기척은 없는데 음량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번뜩 빛난다.

 '오늘도 이거란 말이지.'

 니시키노 마키는 경험의 결과로 이 게임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시험도, 피아노도, 라디오 토크도, 댄스도, 이런 것도 반복 학습을 하면 숙련되는 법이다. 마키는 진정으로 노력한 분야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승리하리라 믿는 일종의 오만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마키였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마키는 야자와 니코가 사는 아파트 방의 스페어 키를 쥐고 있었다.

 마키는 좁고 어두운 거실을 성큼성큼 지나 하나뿐인 침실로, 그리고 침실에서 이어져 있는 욕실 안으로 발걸음했다. 어두운 집안에서도 가장 컴컴한 욕실에 발을 들이자, 작은 파도 소리가 연약하게 마키를 반겼다.

 마키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욕조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처량하게 가라앉아있는 자신의 연인을 마주한다. 빨간 홍채가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밝다.

 "안녕, 니코."

 나지막한 미성이 작은 욕실에서 먹먹하게 메아리친다. 니코의 눈이 힘없이 휘어진다.

 "안녕, 마키쨩."

 마키가 조심스럽게 욕조에 손을 담근다. 물소리가 잔잔하다. 이미 차게 식은 온도다.

 "감기 걸리겠다, 우리 니코니."

 "마키쨩은 의사니까, 어떻게든 해 주겠지."

 "바보한테는 약도 안 들어요."

 마키의 섬세한 손가락이 물속을 헤매다가, 이내 니코의 뺨에 자리 잡는다. 부드럽고, 물기 있고, 찬 볼살을 어루만진다. 참 작은 얼굴이다. 니코의 아기자기한 손이 마키의 길쭉한 손 위로 겹쳐진다. 그렇게 손을 매만지다가, 니코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마키를 부른다. 마키이……

 니코가 살짝 상체를 틀어 가슴을 조금 내민다. 툭 튀어나온 갈비뼈와 비슷한 높이에 유두가 솟아 있다. 마른 몸이다. 마키의 시선이 머문다. 니코는 입술을 핥는다. 마키의 손이 니코의 턱선을, 쇄골을 타고 내려가는 도중 니코가 벽을 향해 몸을 비튼다. 마키의 손이 반사적으로 멈춘다.

 "니코니는 아이돌이니까, 만지면 안 돼애."

 ―나른하게 웃는다.

 마키는 타이르듯이 "그래, 그래." 흥얼거리며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물속에서 검은 머리칼이 해초처럼 손가락에 감긴다. 야자와 니코의 얇은 목과 경추를 관찰하며, 마키는 정형외과학도 썩 나쁘지 않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나가야지. 감기 걸려, 정말로."

 "싫어."

 니코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마키는 알아본다.

 "마키쨩도 이리 와."

 마키가 몸을 조금 일으키고 상체를 한층 기울여 간신히 욕조 밖에서 니코에게 닿는다. 니코의 팔이 마키의 목을 끌어안는다.

 마키의 입술을 부드럽고 립밤의 체리 향이다. 니코의 것은 거칠고, 수돗물 맛이 난다.

 "마키쨩."

 "왜."

 "이대로 같이 죽자."

 붉은 눈빛으로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인다. 불현듯 마키는 특정한 충동에 휩싸인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니코의 얇은 목을 휘감는다. 그 순간 야자와 니코가 눈부시게 웃는다. 라디오 토크 쇼처럼 대부분이 역할극이다. 마키가 겨우 기별이 갈 만큼만 손을 조이자 니코가 포르노 배우 같은 소리를 낸다.

 "가버리겠어, 마키쨩."

 거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연기하는 니코의 이마에, 마키가 가볍게 딱밤을 때린다.

 "의사로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 자, 일어나자."

 블라우스 소매가 젖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키가 팔을 뻗어 욕조 마개를 뺀다. 식은 지 오래인 물이 소용돌이치며 쪼르르, 쪼르르, 빨려내려 간다.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자 니코의 작은 몸이 고슴도치처럼 부르르 떤다. 마키는 마른 수건을 가져와 니코의 등에서 시작해서 물기를 닦아낸다.

 마키가 일으키자, 니코는 '영차' 하며 멍한 몸을 일으키는 데에 협조한다. 야자와 니코에게 있어서 몸이란 아무리 작아도 무겁게만 느껴져 온 물건이었다. 중력에 힘겹게 맞서는 몸을, 마키가 곁에서 지탱하기에 가까스로 움직여 미끄러운 욕실 밖으로 나간다. 물에서 나오니 집안이 과하게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제야 니코는 자신이 텔레비전을 틀어두었음을 기억한다. 거기에 더해, 마키가 전등을 켠 탓에 눈까지 부시다. 니코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마키는 니코의 옷 서랍에서 어렵지 않게 속옷을 뒤져낸다. 버터 색 잠옷 원피스는 매트리스 위에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팬티와 원피스를 입히고 열팍한 팔을 폴라 플리스 카디건의 소매에 꿰는 것까지의 과정은 꼭 인형 옷을 입히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 마키가 거실로 나오고, 이제는 제법 균형을 되찾은 발걸음으로 니코가 뒤따른다.

 니코가 따라오자 마키는 텔레비전을 끄는 대신, 소파에 앉는다. 낡았지만 2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이다. 0.5인분짜리 크기의 니코가 마키에게 딱 다가붙어 앉는다.

 브라운관 안에서 스쿨 아이돌이 춤춘다.

 저것 또한 야자와 니코, 그리고 니시키노 마키다.

 춤추는 도플갱어를 노려보며, 야자와 니코는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약하게 만들었는가에 관해 곰곰히 생각한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지금 TV 모니터와 보라색 눈동자에서 절찬 재생 중인 무대 위의 광경과 여동생 두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 오늘도 자신을 구원한 수려한 옆얼굴을 본다. 또 한 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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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5


1.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스는 그대로 아오이 아키라의 삶에서 사라졌다.

당연하지 않게 셀렉터 배틀은 다시 한번 시작되었고

전혀 당연하지 않게 잘난 체하는 표정 그대로 인간이 된 피룰루크가 돌아다니기도 했고

배틀에서 좀 졌다고 해서 몸이 손끝부터 사라지는 아주 이상한 일도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스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우라조에 이오나는 썩 담백한 얼굴로 카메라 플래시의 세례를 받고 있었고 진작에 촬영이 끝난 나는 아직 인형탈을 갈아입지 않은 채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증오하던 그 이오나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사랑하던 우리스는 어디로 간 걸까.

싫어하는 것은 늘 간단했다. 뭐든 마음에 안 들기는 쉬운 법이니. 이를테면 피룰루크를 싫어했다. 그리고 된통 당하고 더 싫어졌다.

하지만 증오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어쩌면 사랑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오나 이상으로 누군가를 증오해본 적도, 우리스 이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이오나는 나를 셀렉터로 만들었고 셀렉터가 된 나는 외상을 입었고 우리스를 만났다. 우리스를 만난 나는 아주 러블리해졌고…

당연하단 듯이 아오이 아키라만 빼고 모든 게 없어졌다. 이오나도 셀렉터도 외상도 우리스도 도루묵. 사람은 왜 사는 걸까. 구르고 구른 끝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게 섭리라면 왜 시간은 앞으로 가는 걸까. 산다는 건 죽어가는 일밖에 안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침울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우리스 너는 좋아할까.

그런데 나는 아주 잘 살아있어.

만일 우리스가 알게 된다면 기뻐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잘 살아있다.


2.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손가락, 인간의 머리카락, 인간의 눈과 인간의 혀,

인간의 심장과 인간의 몸무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문득 둘러보니, 둘러보는 그것이 인간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경로로든 몸을 가지게 된다면 미카게 한나, 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쇼윈도에 비친 얼굴은 그 누구의 모방도 아니었습니다.

나나시, 라고 납득한 이유는, 실은, 몸이 없는 자는 이름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몸과 영혼은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른바 유물론(唯物論). 사토미 코우 안에 들어간 카니발님이라거나 끈질기게 자신은 카니발, 이라고 하지만 영락없이 사토미 코우이지요. 영혼이란 그런 것입니다. 몸의 일부. 

아무튼 이렇게 되니 당황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한나님, 이렇게 되었는데도 나는 당연하게 나나시인가요?

만나면 물어봐야지. 만나러 갈 수 있다. 아주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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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6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소년 시절의 레이지에게는 고맙게도, 신지는 어려서부터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돌이켜보면 레이지가 신지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남자가, 울면 얕보이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울면 안 돼.’


 포켓몬을 모으고, 배틀을 하고, 짐뱃지를 모으는 일로 바빴던 시절이었지만 레이지는 항상 기념일에는 쉬도록 일정을 조정했다. 신지의 생일, 자신의 생일,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지가 외롭지 않도록,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모텔 방에 작은 트리를 갖다 놓고, 전구를 둘러놓고, 촛불을 켜두었다. 라디오를 틀면 캐롤이 흘러나왔다. 식탁에서 신지와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튿날 아침에 신지가 깨어나면 발견할 수 있도록, 베개 옆에 선물을 가져다 두었다. 울지 않은 신지에게.


 언제부터 동생과 단둘이서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진 걸까. 포켓몬과 더불어 사는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너무나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인간들이 어느 날엔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레이지도 신지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아, 이제부터는 혼자구나. 그런 생각을,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레이지는 회상한다. 신지도 울지 않았다.

 신지가 울었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지, 레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

 

 눈처럼 하얀 생크림으로 덮인 초콜릿 케이크를 자르던 레이지가 문득 말한다.


 이제 울기에는 너무 많이 커버린 것 같은 신지가 레이지를 올려다본다. 양초의 불이 흔들린다. 레이지를 마주 보고, 신지는 살짝 웃는다.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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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2

[제목은 Nirvana의 Heart-Shaped Box로부터. 키미키메 개인지에서 이어지는 설정이 있습니다.]


죽음은 끔찍한 발상이다.


크로스는 힘겹게 발을 내디딘다. 다리는 철근처럼 무겁게 올라가고 덜 마른 피가 피부와 옷가지 사이에서 지독하게 진득하다. 걸음이 휘청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곁에서 포켓몬이 함께 걷는다. 포켓몬의 숨결이 다리에 닿아올 정도로 가까이에서 걷는다. 무거운 숨. 루가루암이 침을 넘긴다. 숲은 고요하고 그 소리는 소년에게도 들린다.


우리가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


이대로 엠라이트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말로 꺼내어지지 않는다. 결코. 크로스는, 그리고 그와 길을 같이하는 짐승들은 일체의 약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유분방하게 뻗은 거친 나뭇가지나 뾰족한 바위에 찔려 생채기가 늘어날 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생각이 서서히 퍼지는 독처럼 머릿속을 잡아먹는다.


여기서 죽으면 어쩌지.


죽을 때까지 함께,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년과 포켓몬 사이의 관계는, 인연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포켓몬의 시선이 질기게 소년에게 고정되어있다. 들짐승의 시뻘건 눈빛을, 소년은 주춤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다.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각오이다.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약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신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굽어살피는 박애주의적이고 희생적인, 경전 속 상냥한 신 따위는 날조라는 것을 소년은 포켓몬과 함께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나약한 인간들이 지어낸 날조. 그런 것을 믿고 기도했던 세월이 걸음마다 무너져내린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를 주관적으로 편애하는 탐욕스러운 신―한낱 인간이나 짐승 따위, 일생 자신을 갈고닦아 죽음의 문턱에서야 신의 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년은 더는 경배하지 않는다.


살아서 신의 발치까지 기어올라, 끌어내리고,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일어설 것이다. 그 욕망만이 소년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할 생명에 가치 따위는 없었다. 이런 숲에서 쓰러질 정도라면, 영광 받을 자격도 없다. 도달해야 할 자리는, 오직 왕좌에, 여기에서 쓰러진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지는 숲의 밤 속에서, 루가루암의 두 눈이 충혈되듯 붉게 빛난다. 침이 묻은 뾰족한 이빨이 번뜩거린다.


여기서 쓰러진다면 저 어금니의 먹이가 되겠지.


소년이 낮게 웃었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포켓치의 배터리는 아직 살아있다. 전설의 포켓몬의 위치를 가리키는 마커가 아직 같은 곳에 멈추어있다. 분명히 이 숲속, 분명 이 근처. 감정의 신 엠라이트. 쓰러뜨려 주마. 쓰러뜨리고……




“……?”


녹색.


숲?


녹색…… 회색?


“아, 크로스. 눈을 떴구나.”


숲이 아니다―사람. 낯익은 얼굴.


“너는 죽고 싶은 거니?”


소우지.


크로스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실내다. 숲의 냄새도 전혀 없고, 대신


엷은 약 냄새가 감돈다. 과하게 깨끗한 냄새. 무엇이든지 잊어버리고 편안해지라고 강요하는 듯한 인테리어. 포켓몬센터. 온몸이 욱신거린다. 실려 온 모양이다. 살아있는 모양이다. 그치만 어떻게?


“운이 좋은 줄 알도록 해.” 숲 같은 녹색의 소년이 무기질적인 눈으로 내려다본다. “나도 엠라이트를 쫓고 있었어. 우연히 너와 비슷한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너는 죽었을 거야.”


소우지는 심각한 내용의 책을 읽듯이 말하고,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몬스터볼 속에서 루가루암이 뛰쳐나온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크로스는 루가루암에게 묻고, 소우지가 대신 대답한다.


“위급상황에서는 포켓몬을 몬스터볼에 돌려보내도록 해. 그렇게 하는 편이 포켓몬만이라도 안전할 수 있으니까.”


문득, 소우지가 얼굴을 구긴다.


“그리고 네 경우엔……”


루가루암이 제 파트너에게 담담한 시선을 보냈다. 불신과 동시에 신뢰인 눈빛. 다른 한쪽의 트레이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약한 녀석은 죽으면 돼.”


그렇게 뱉어내곤, 몸을 일으키려고 한 크로스의 움직임은 꿈틀거림에 그쳤다. 그 광경에 소우지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낡은 전자기기를 꺼냈다. 크로스의 물건이었다.


“입은 살았네. 그리고 포켓치는 압수야.”


“야!”


자신의 물건을 낚아챌 심산으로 기세 좋게 손을 뻗은 크로스였지만 물어뜯기는 듯한 통증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팔을 다시 내렸다.


“그러다간 팔을 잃을걸. 얌전히 쉬도록 해.”


“내 포켓치를 내놔라.”


“포켓치는 인간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지,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크로스.”


소우지가 허리를 숙여, 다른 한 명의 소년과 시선을 맞추었다. 은빛 호수 같은 눈이 단단한 금빛으로 넘쳐흐른다. 색소가 옅은 입술이 야무지게 움직여, 단호한 문장을 형성한다.


“우리는 동료야.”


고요하게, 무겁게 선언한 소우지가 금세 물러났다. 누워있는 채로, 크로스가 눈동자를 굴려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우지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멋대로.”


“내가 정한 게 아니야, 그렇게 되어버린 거지.”


신을 탓해도 좋아, 소우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크로스가 대답했다―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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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23

[69화 이후, 127화 이후 시점. 아마 81화 이후, 118화 주변.]


 인기척을 느낀 신지가 포켓몬을 몬스터볼로 되돌려 넣었다.


 “돌아와, 마뉴라.”


 육신이 입자로 축소되기 직전의 찰나에 포켓몬은 도륵, 눈을 굴려 다가오는 소년을 짧게 쳐다보았다. 마뉴라의 모습은 금세 몬스터볼 속으로 사라졌지만, 붉은 시선은 예리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토시는.


 “신지, 신지 맞지?”


 달빛이 가벼운 어두운 밤이었다. 바위 위에 앉아있는 트레이너의 모습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신지임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알고서도 묻는 말. 신지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사토시는 그의 무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는, 더욱 다가갔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훈련 중인 거야?”


 “그렇다면 어쩔 거지.”


 “역시 신지는 대단하구나. 우리도 분발해야겠어. 그렇지, 피카츄?”


 사토시의 어깨 위에 자리 잡은 포켓몬이 피카, 하고 제 이름을 울렸다. 응, 우리도 힘내자. 지지 말자. 그런 의미가 담겨있을 소리. 몬스터볼에 돌려놓은 포켓몬의 침묵과 대조되는 소리. 사토시는 그런 대조가 늘 의아했다. 왜 그는 모든 것이 자신과 대조되는지. 같은 목표를 가진 포켓몬 트레이너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신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과묵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토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신지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다른 말들을 찾아보았다.


 고집스레 침묵하는 신지의 등 뒤에서부터 물소리가 들려왔다. 신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사토시를 보았다.


 신지는 사실은 고요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폭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쏟아지고 있었다.


 “…동료는 버렸냐?”


 “타케시랑 히카리 말이야? 다들 포켓몬 센터에서 쉬고 있는데, 나만 왠지 오늘은 잠이 안 와서 조금 나와봤어. 이거 이제 보니, 신지가 근처에 있어서 그런 건가?”


 “돌아가.”


 “하핫, 여전히 불친절하네.”


―마뉴라!


 신지의 몬스터볼이 멋대로 열리고,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뉴라가 다시 한번 모습을 나타냈다. 마뉴라는 붉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과시하는 몸짓은 명백히 눈앞의 트레이너와 포켓몬에 대한 위협 내지는 도발이었다.


 “마뉴라, 네게 나오라고 명령한 적은 없을 텐데.”


 소년의 딱딱한 말에, 마뉴라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런 뜻이라는 것을 신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네 마뉴라, 배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신지.”


 “지금은 흥미 없어.”


 신지가 다시 한번 몬스터볼의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마뉴라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고 서늘한 웃음을 지은 채 몬스터볼로 되돌아갔다.


 신지는 바위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착지해, 사토시를 지나쳐 걸었다. ‘어이, 신지’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더 큰 소리에 묻혔다.


「맞아, 사토시 군이 왔어. 그 볼텍커를 쓰는 피카츄 트레이너. 그 애는 재밌네. 마음에 들었어.」


달라져야 했다.


(2018. 4. 3)


 봄이 왔다.


 기분이 나쁘다.


 효우타는 나무에 매달린 벚꽃을 보며 생각했다. 작은 분홍색 꽃 중 대부분은 아직 덜 피어난 모습이다. 저 꽃들은 이윽고 활짝 피어나고 비처럼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름답다고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네가 들으면 너는 참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깔깔 웃을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효우타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효우타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가는 꽃줄기를 잡았다. 아직 싱싱한 꽃이었다. 벚꽃을 꺾어, 주머니에 넣었다.




* * *




 봄이 완연한 쿠로가네시티는, 지하에 있는 탄갱까지도 에너지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효우타를 반기는 작업원 일동의 웃음은 언제나 따뜻했기에, 효우타는 겨울의 추위에 불평한 적이 없었다.




 “좋아요, 오늘도 힘내봅시다!”


 “오우!”




 매일 작업은 단순했다. 망치로 벽의 가장 겉면을 부수고, 무언가를 발견하면 곡괭이로 조심히 꺼낸다. 웬만해서는 자질구레한 보석이나 조각 따위가 나왔지만, 가끔 화석을 캐낼 수 있었다. 팀의 주요 목적은 그 화석을 캐내는 데에 있었다. 단순한 작업이었기에, 리더라고는 해도 효우타의 작업 방식도 다른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 어떤 에너지가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을 찾아내듯이 더듬다 보면 무언가가 묻혀있는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벽에 손을 대면, 어딘가에 묻혀있는 화석이 말을 걸어올 거야. 나는 여기에 있어, 라고.'


 '하하, 그것참 추상적인 조언이네요, 리더.'


 '아하하, 그런가?'




 아마 실제로는 조금 더 과학적인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탄갱에서 긴 나날을 일한 효우타는 머리가 아닌 몸의 감각으로 화석을 찾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벽을 더듬던 효우타가 멈추어 서 망치를 꺼냈다. 팔에 반동이 오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벽을 두드려서 겉의 벽을 깨자 어떤 물체의 끄트머리가 나타났다. 아마 조각 같았다. 곡괭이로 벽 표면을 조금 더 걷어내 주자, 예상대로 파란 조각이 모습을 나타냈다. 굳이 조각을 캐내느라 벽의 안정성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 효우타는 캐던 곳을 버리고 근처의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석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캐내자 역시나 화석이었다. 효우타는 작은 화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뜯어보았다.


 화석임에도 유려한 곡선, 그리고 가늘어지는 모양새―뿌리화석이었다.


 박물관에서 복원이 가능한 종류 중 하나이다.




* * *




 탄갱 박물관으로 향하는 효우타는 늘 같은 고민을 했다―


 '화석을 되살리는 게 괜찮은 걸까?'


 207번도로의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쿠로가네시티의 북부까지 날려오고 있었다. 효우타는 초봄의 자신이 꽃을 보며 살아있는 것을 폄하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화석을 복원시키는 일이 어쩌면 화석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따위, 처음 즈가이도스를 부활시킬 때부터 깨닫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후회는 하지 않았다. 결정에 있어서 두개의화석의 동의 따위 없었지만, 그럼에도 즈가이도스가 부활한 그 날부터 오늘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유대감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복원된 화석 포켓몬이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화석이 인간의 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 * *




 효우타는 신오우의 시공 신화에 관하여 몇백 페이지가 빼곡히 적혀있는 두꺼운 책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책장을 적당히 넘기자, 페이지 사이에 끼워둔 작은 꽃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짝 눌린 채 말라버린 꽃은 색은 조금 바랬어도 초봄에 본 어여쁜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효우타는 꽃이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웠다.




 "이 녀석의 화석을 보자마자 나타네 네가 생각나서, 복원시켜버렸어."


 효우타가 나타네에게 몬스터볼을 내밀었다.


 나타네가 고개를 갸웃, 하며―머리카락이 같이 찰랑, 흔들렸다―효우타로부터 몬스터볼을 건네어 받았다.


 "풀 포켓몬?"


 "꺼내봐."


 "좋아, 나와봐!"


 나타네가 역동적인 자세로 몬스터볼을 던지자, 붉은 빛에 감싸여서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켓몬을 확인한 나타네는 환해진 눈빛으로, 달려들어 새 동료를 껴안았다.


 "꺄아, 리리라다!"


 갑자기 껴안아진 리리라는 약간 당황한 듯, 약간 부끄러운 듯, 그러나 싫지는 않은 듯 촉수를 꼼지락거렸다. 옷 너머로 닿아오는 바다나리 포켓몬의 서늘한 체온이, 나타네는 썩 사랑스러웠다.


 "약간 미끌미끌해! 게다가 이 윤기 흐르는 피부! 그리고 딱 시원한 온도! 이 리리라, 무척 건강한 아이 같아! 너무 좋아!"


 행복해하는 나타네의 모습에, 효우타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리리라도 새 트레이너를 만나게 되어 기쁜 듯했다.


 "고마워, 효우타, 소중하게 키울게!"


 리리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나타네가 생긋 웃었다.


 뿌듯해하며 효우타가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선물하려고 가져온 압화가 손끝에서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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