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31~2017.03.19)

가면라이더 류우키 나이반전+젠더벤드 농촌 AU

 

0.

 아사쿠라 이로하浅倉威呂巴를 모르는 이는 마을에 없었다.
 아사쿠라 이로하라 함은 언젠가부터 마을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열두살 남짓 되어보이는 외모의, 악질의 계집애다. 훔친 뱀가죽 옷을 입고 작은 손에는 억세게 쇠파이프를 쥔 계집. 계집은 그 파이프를 들고 무엇이든 패고 보는 고약한 성질이었다. 아사쿠라가 패고, 먹는 것이 시궁창의 쥐새끼나 주인 없는 들개였을 적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는 점차 키우는 가축이나 마을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 악명은 마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 되기에 이르렀다.
 모르는 이는, 키타오카北岡 저택의 아가씨 키타오카 슈코北岡秀子 정도였다. 키타오카 집안은 마을의 유일한 변호사 집안이라, 일가족이 사는 키타오카 저택은 마을에서 으뜸으로 고급스러운 으리으리한 목조건물이었다. 능력 좋기로 유명한 키타오카 변호사에게 구원받은 것이 바로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로 연명하는 유라由良 집안으로, 폭력사건에 휘말린 것을 키타오카가 세 치 혀로 구해낸 것이었다. 실로는 마을에 유라가 어느 정도로 유죄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무죄든 유죄든간에 유라가 법원에 설 돈도 없는 가난한 집안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도 없었다. 유라는 키타오카에게 끝내 선임비를 지불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신 어린 딸을 사용인으로 저택에 보냈다. 빚도 갚을 겸 딸을 좋은 집안에 맡겼으니 유라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키타오카 저택으로 보내어진 유라 아이由良吾以는 키타오카의 아가씨를 퍽이나 잘 따랐다. 아이가 아가씨, 하고 부르면 아가씨는 아―쨩, 하고 애칭으로 대답할 정도로 아가씨도 사용인을 몹시나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 부모, 사용인 할 것 없이 그토록 애지중지 보살핌받으며 자란 키타오카 슈코였기 때문에야말로 아사쿠라를 몰랐다.

1.

 키타오카 슈코가 아사쿠라를 만난 것은 드물게도 아―쨩이 옆에 붙어있지 않던 날이었다. 저택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서 집에 오는 것 하루 정도는 함께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한―늘 지켜줘야 할 것 같기만 한 아가씨도 실은 자신보다 다섯살이나 많아 열다섯살이었으니―아이는 키타오카의 수업이 끝난 시각, 창고에서 곡식을 분류하고 있었다.
홀로 논두렁길을 걷던 키타오카가 아사쿠라와 마주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계절에도 몸에도 맞지도 않는 뱀가죽 옷을 걸친 아사쿠라는 갓 익기 시작한 벼를 쥐어뜯어 입안에 털어놓고 있었는데, 그런 기묘한 광경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2.

 공격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통증보다 앞서 머릿속이 텅 비듯이 차가워졌고, 의식적으로 당황한 순간 충격 아래에 숨어있던 아픔이 되돌아와서 슈코는 그제서 비명을 질렀다. 시야는 희미하고 어지러웠는데 색깔만이 튀었다. 하늘은 어이없는 파란색이었고 아사쿠라가 입은 무늬가 화려한 옷은 연한 노랑에 검정이 뒤범벅되어 시야를 난리로 뒤흔들었다. 보이는 정면에는 아사쿠라의 얼굴이 하늘에 걸린 모빌처럼 흔들거렸다.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도 전에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슈코는 힘껏 고개를 돌렸지만 피하려는 시도가 허무하게 주먹은 옆얼굴에 그대로 날아들었다. 시야에 빨강이 확 튀었다.

  아, 죽는다.

 죽을지도 몰라.

 죽고싶지 않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생각한 순간 슈코는 아사쿠라의 드러난 맨 손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고기가 씹히는 촉감이 이빨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사쿠라의 동작이 멈칫했다. 반격이 먹힌 것인가. 점점 안정되어가는 시야에 비친 아사쿠라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슈코는 처음으로 겁이 났다.

 "...짜증나."

 이제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각오해야 하는 것을 깨닫고 슈코는 무작정 다리를 들었다. 치마가 말려올라가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아사쿠라의 복부를 노리고 힘껏 찼다. 볼품없이 버둥거리는 꼴이긴 했지만 확실히 맞았다. 아사쿠라는 힘이 센 것에 비해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사실 열 살짜리 소녀의 몸의 크기를 생각하면 의외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떼어놓은 아사쿠라는 금방 다시 덮쳐와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슈코를 다시 한번 넘어뜨렸다. 아사쿠라는 거의 불사신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 생각

 "아가씨!"

 하는 순간마다 자신만의 구원자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키타오카 개인 소유의 천사.

 "아­-쨩!"

 키타오카 슈코의 충직한 유라 아이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마리의 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모두 키타오카 소유의 물건이다.

 "아가씨를 데려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항상 곁에 있어드려야 했는데. 면목없습니다, 아가씨.

 아사쿠라의 울음소리와 사랑해 마지않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무엇하나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붕 떴다...... 

 

2016. 2. 5

도쿄 뮤우뮤우

트리거워닝: 성희롱, 강간미수, 여성 캐릭터를 향한 강간모의 등등.... 여성혐오 주의


  킷슈는 오른팔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팔에 묻어있던 피가 이마에 옮겨 붙는다. 붉은 천을 감은 탓에 눈에 띄지 않던 색이 흰 피부 위에서는 아주 선명해진다. 킷슈가 짙게 웃었다. 금색 눈에 어두운 쾌감이 어려있었다. 발치에 걸리는 것은 걷어차버린다. 살과 뼈의 무게가 발에 채인다. 또 한 명의 인간이 달려든다. 그가 채 닿기 전에 먼저 명치에 팔꿈치를 가격한다. 그가 배를 움켜잡고 멈칫한다. 기습 작전이라도 되는지 등 뒤에서 어슬렁대는 남자를 코웃음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나서 정면의 머리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그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방금 넘어뜨린 것이 꾸물거리며 일어날 기색을 보이기에 목을 콱 밟았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고 움직임이 멎었다. 아마 죽어버릴 것 같다.


 “아아, 딸기 색이 잔뜩 묻어버렸네.”


 세 구의 몸통이 널브러진 바닥 한가운데에 선 킷슈가 베시시 웃었다. 역시 일반 인간은 연약하고도 연약하고 시시하구나. 무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다. 짐승 같이! 아아 인간들은 정말 짐승 같았다. 여러 의미로.


 그러니까, 킷슈는 어둠을 만끽하며 신주쿠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킷슈는 도쿄의 밤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으슥한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밤 공기를 들이마시던 중 남자 셋이 접근해왓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건들건들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도 킷슈는 아무 말 않고 어떻게 될지 관찰해보기로 했다. 이쁘장하게 생겼네, 꼬마. 킷슈에게 전혀 기쁜 말은 아니었지만 한낱 인간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피부도 하얗고, 흐흐. 코스프레니? 옷이 너무 야하다. 하아, 흥분할 것 같아. (불쾌지수가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일 예쁜 데는 다 가리고 있네. 그렇게 지껄이며 그가 킷슈의 윗옷 안에 손을 집어넣으려고 하던 순간 킷슈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순진함 연약함 가련함을 연기하던 얼굴에 잔혹한 장난기가 번졌다. 그렇게 그날 밤 킷슈는 남자 셋을 짓뭉갰다. 정말, 이래서야 인간이 아니라 돼지 같잖아. 몸의 욕망에 휘둘리는 아이들.


 하지만 그것은 자신도 곧 마찬가지라는 것을 킷슈는 안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가 너무나도 달기 때문이다. 더 죽여버리고 싶다고, 몸이 소리친다. 그리고. 이치고, 이치고. 모모미야 이치고. 모모미야 이치고의 피에 취해보고 싶다. 이런 잡인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단맛이겠지. 그것이야말로 신의 음료 암리타. 아니면 이치고를 다른 것으로 붉게 물들인다면. 빨간 입술에 입을 맞추고 더 아래의 붉은 살에도 입을 대어 얼굴까지 붉음이 오르게 하고 싶었다. 겨우 몸의 욕망에. 킷슈 역시.


 그러나 모모미야 이치고는 킷슈에게 무엇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강제로 취하며 킷슈는 빼앗을수록 잃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모모미야 이치고는 아오야마 마사야를 사랑한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떠올리자 밤하늘은 검정에서 짙은 파랑으로 색을 바꾸었다. 무거운 파랑이 내려서 킷슈의 가느다란 몸을 짓눌렀다. 이제 흥분은 온데간데 없고 진득한 우울이 기어올라온다. 말라붙은 피처럼. 그 아래에서 호흡할 수 없는 피부.

2016. 3. 24

콥스파티.

제목 및 인용은 Nirvana - Heart-Shaped Box





내가 약할 때 그녀는 파이시스처럼 나를 본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저해상도의 스즈모토 마유를 바라본다. 마유의 사진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폰카로 사진을 찍는 것이 습관이다. 다양한 것을 찍지만 대표적인 피사체가 스즈모토 마유다. 중학교 시절부터의 그녀의 성장이 하나의 폴더에 차곡차곡 사진으로 저장되어있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그녀의 다양한 미소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이 있다. 천 개의 미소, 우주 유일의 태양. 당장이라도 머리가 이상해져버릴 것 같은 이공간 텐진초등학교에서 그 곧은 눈빛이 모리시게의 등을 떠민다. 나를 찾으라고 주시하는 눈빛. 시간이 지날수록 질책이 되는 눈빛. 언제까지고 마유를 혼자 둘거야?


그래서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마유의 화면을 덮어씌울 새로운 사진을 찍는다. 선혈의 사진을 찍는다. 뭉개진 유해, 흩어진 장기를 찍는다. 찍으면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낀다. 희열과 거의 동시에 죄책감이 올라온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운명처럼 벨소리가 울린다. OS가 고장났나? 중얼거리면서도 숙명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있었다.


보지 마.


보지 마.


마유의 내장 보지 말아줘.


마유로부터의 마지막 전언.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웃고 울었다. 끝까지 핸드폰으로 들여다보았던 건 마유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야 저해상도의 화면을 뛰어넘어, 차원도 뛰어넘어 마유에게 닿을 때가 되었다. 휴대폰 액정 같은 유리창을 부순다. 어깨에 파편이 박히며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생각했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스즈모토 마유의 조언에 빚지는 삶이었다고.


―영원히 그대의 조언 덕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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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0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낯선 감각이었다.

 책을 못 읽게 되었다. 읽는 법을 잊어버렸다.

 새 학기를 앞둔 7월에 체렌은 교사를 그만두었다. 8학년 교과서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체렌은 8학년의 나이에

 그를

 만나서.

 

 처음 만났을 땐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그랬다. 그는 ‘N’이었다. 그로부터 계절이 여섯 번 변했을 때 ‘N’의 의미를 물었다. Natural Number. 그가 말했다. 자연수. 자연수의 N.

 끝내 이름을 묻지 못했다. ‘네추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듣고 싶었어.

 

 처음 사라졌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번 얼굴을 마주쳤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주고받았다고 하기엔 서로 자기 할 말만 던지긴 했다). 그뿐이었으니까. 토우코는 울었다. 체렌은 그게 분했던 것 같다. 2년 후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또 사라졌을 때, 체렌도 울었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아무도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나는 기분이었다. 아주 아팠고, 그리고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치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고독은 체렌에게 잘 어울렸다.

 

 토우코, N이랑 만났대. 지금은 같이 여행하고 있대. 벨은 생긋 웃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 사람만의 유대도 N도 사라졌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체렌은 이것이 아주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사람에게 가장 예민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치고.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토우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라이몬의 인파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 후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배신은 천천히 심장을 좀먹어갔다. 첫날은 아팠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새로운 통증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실은 거의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을 때 깨달았다.

 

 체렌은 읽을 수 없는 책을 닫았다.

2016. 12. 16


하나야 타이가 씨,

궁극의 가샤트의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 수수께끼의 존재 X


 하나야 타이가는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두 번 깜빡였다. 시선이 '궁극의 가샤트'에서 머물렀다가 다시 '수수께끼의 존재 X'에서 멈췄다. 자신의 개인 연락처로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낼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존재 X'라니. 그가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으로 촌스러운 장난을 칠 사람이었던가. 궁극의 가샤트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아도 지나치게 유치하고 노골적이어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발신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떠오르자 잠도 달아났다. 어스름한 달빛이 낡은 창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새벽, 하나야 타이가는 일어서서 문고리에 걸어둔 숄을 걸쳤다.

 폐부를 가득 메우는 초겨울의 새벽바람은 청량했다. 칙칙한 가로등 빛이 아스팔트 위에 물 섞인 아크릴 물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겐무 코퍼레이션은 멀지는 않았다. 얼룩덜룩한 길고양이에게 시선을 보내자 빤히 마주 바라보던 고양이는 이윽고 몸을 숨겼다.

 늦은 시각이었으나 건물은 열려있었다. 단 쿠로토는 언제 퇴근하는 것일까. 그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을까. 엘리베이터의 '띵동'이 잡념을 정지시켰다. 사장실은 언제나처럼 모든 불빛을 환하게 켜서 낮과 밤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고요하게 의자에 가라앉은 단 쿠로토는, 고요하게 눈을 떠 늦은 손님을 맞이했다.

 "지쳐 보이시는군요, 하나야 씨."

 "이건 무슨 의미지?'

 타이가가 문자 메세지를 띄운 휴대폰을 사장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을 인식한 쿠로토는 반듯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하나야 씨, 발신자를 단번에 알아채시다니."

 "시시한 장난을 하는군."

 "그러면 당장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할까요."

 쿠로토가 정면으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진심을 말하겠다는 제스처이다.

 "'궁극의 가샤트'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건 어떤 게임이지?"

 "자세한 정보는 저도 모릅니다."

 "네가 만든 것이 아닌가."

 "예, 그것은 겐무 코퍼레이션이 만들지 않은 가샤트.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궁극의 가샤트'이죠."

 "원하는 게 뭐지?"

 계산이 빠르고 계획이 치밀한 사장이다.

 "거래를 하죠―'궁극의 가샤트'를 확보해주신다면, 겐무 코퍼레이션의 가샤트 세 대와 교환해드리겠습니다."

 타이가가 쿠로토를 노려보았다. 결국 사장은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형태로 '권유' 해올 것이다. 따가운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쿠로토는 설명을 이어갔다.

 "슈퍼 닥터가 되는 데에 필요한 가샤트의 수는 열 대, 종류나 제작사는 관련이 없죠. 하나야 씨는 궁극의 가샤트 한 대보다는 저희 가샤트 세 대가 더 필요하신 상황이시죠?"

 하나야 타이가는 단 쿠로토가 손해 보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장은 필히 일부 정보를 숨기고 있거나, 결국에 배신할 속셈인 것이다.

 "거리낄 게 어디 있나요? 수틀리면 머리에 한 방"―단 쿠로토가 자신의 머리에 대고 두 손가락을 모아 BANG! 하며 타이가를 흉내 냈다―"그걸로도 안 되면 목에도 한 방"―손을 조금 내려 목 언저리에서 같은 제스처를 반복했다―"두 방이면 되잖아요?"

 "…좋다. '궁극의 가샤트'를 찾아주지."


*


「성적 발표!成績発表」

 오렌지 컬러의 가샤트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하나야 타이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찾았다, 궁극의 가샤트―'태고의 달인 가샤트'.

 과연 궁극의 가샤트라서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서부터 동맥을 타고 올라온 따끈한 에너지는 온 팔에 끓어넘쳤다. 타이가는 북채 대신 주먹을 쥐었다.

 타박 타박, 철 계단을 밟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올라왔다. 사장이었다. 뒤를 밟히고 있었나. 타이가가 중얼거렸다. 사장은 시원스러운 영업용 미소를 걸쳤다.

 "제가 원하는 것을 찾으셨군요."

 단 쿠로토가 궁극의 가샤트를 눈짓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야 타이가."

 타이가는 거래를 떠올리고, 사장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손에 든 가샤트를 보았다. 사장이 제안한 거래는 선택지가 없는 강요였고 타이가도 처음에는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손에 넣은 가샤트를, 어떤 거래를 위해서도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상 모든 가샤트는 나의 것이다."

 타이가는 또 하나의 가샤트를 꺼냈다. 배뱅뱅! 뱅배뱅! Yeah~ 뱅뱅 슈팅!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알아."

 "그렇게 완고해서야 결국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을걸요."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고, 다 내가 가질 거다. 남김없이."

 "그러다가 죽을 겁니다."

 단 쿠로토가 가샤트를 꺼내 들었다. 검은 가샤트―프로토 가샤트다. 글쎄, 죽는 건 어느 쪽이려나. 전직 영상의학과는 생각했다. 프로토 가샤트란 방사성 물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물건이었다.

 마이티 점프! 마이티 킥! 마이티~ 액션~ X!


 *


 "아쉽네요, 가면라이더 스나이프."

 가면라이더 스나이프는 쓰러진 채로도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가샤트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가샤트는 가면라이더 겐무에게 가볍게 빼앗겼다. 가면라이더 겐무의 가면 뒤로 단 쿠로토가 싸늘하게 웃었다. 조소는 가면을 뚫고 하나야 타이가에게 꽂힌다. 타이가는 무겁고 거친 호흡을 하며 거의 움직이지 않는 팔로 힘겹게 총을 고쳐잡았다. 궁극의 가샤트의 부작용인지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양팔만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널브러진 채 꼬물거리며 조준하는 스나이프를 겐무는 차갑게 내려보았다.

 "하나야 타이가, 인정하셔야죠―제가 당신보다 우수합니다."

 "…두 방이면 돼."

 "흐음?"

 "머리에 한 방."

 스나이프가 무거운 방아쇠를 당겼다―"…그걸로도 안 되면"―목표에서 한참 벗어난 탄이었다.

 "목에도 한 방."

 한 번 더 발사했다. 겐무가 고개를 까딱하자 그대로 빗나갔다. 가면라이더 스나이프가 사라지고 하나야 타이가만이 쓰러져있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그러다가 죽을 거라고."

 타이가는 온통 엉망이어도 쏘아보는 눈빛만큼은 바래지 않았다. 그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다가, 이윽고 가면라이더 겐무도 단순한 단 쿠로토로 돌아와 허리를 굽혀 하나야 타이가와 시선을 맞추었다.

 "알고 있겠지만, 당신이 죽어도 아무도 모릅니다."

 "……."

 "……그래도 상관없겠지요, 당신은."

 단 쿠로토는 손을 내밀었다.

 "살려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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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3


0.

 처음 대면한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또한 너무나 가엾은 사람이어서, 애초에 가졌던 복수라는 숭고한 명제는 그를 만난 순간 순식간에 찢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지니스가 쿠발을 들여다볼 때, 쿠발도 지니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롱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데도 심연 같은, 텅 빈 전구 같은 눈. 조금 벌어진 입속이 적막한 우주처럼 새카맣다. 애초에 정의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적은 없는 쿠발이었지만 그런 그를 해치는 일이야말로 저지를 수 없는 불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실없는 생각이었다고 잔을 흔들며 쿠발은 재고한다.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이는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강한 오너, 지니스 님이셨다. 그 무엇도 그를 상처입힐 수 없었다. 지니스의 입맛에 맞춘 와인은 절묘하게 자극적인 맛이었다. 한 입 삼키자 새콤한 것이 목을 태우듯이 화끈거리며 넘어갔다. 향긋한 여운이 남는 깊은 맛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턱을 괴고 앉아있는 지니스와, 성을 내며 게임을 진행하고 있는 아잘드―'무뇌아.'―를 순서대로 돌아본다. 돌아갈 별도 달성할 복수도 없는 오직 드넓은 우주 속에 떨어져 게임 밖에는 할 일도 없는 것이다. 사지다리아크의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Strongly Magnetic

 [동물전대 쥬오우쟈]

 [아잘드*쿠발*지니스]


1.

 인간의 번식수단이란 제법 재미있는 것 같더군, 오너.

 호오.

 단단하게 뻗은 아잘드의 두껍고 각진 팔이 벽과 그의 몸 사이의 좁은 거리에 지니스를 가두었다. 다소 고압적으로 몸을 밀착시켰기는 자세를 취했기에, 아잘드는 지니스를―드물게도―조금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때 늘 그렇듯, 눈동자 안쪽에서 고요히 소용돌이치는 미량의 흥분이 담긴 시선이 아잘드를 올려다보았다. 잔에 든 물을 젓듯이, 그러나 물이 넘치는 일은 결코 없듯이.

 "이건 무슨 의미지?"

 "글쎄."

 지니스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잘드는 고개를 들이밀며 입을 맞췄다. 오너의 입술은 생각외로 부드러웠다. 지니스는 금색 눈을 빛내며 아잘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잘드는 입을 조금 벌리고 혀를 내밀어 먼저 지니스의 입술을 핥았다. 이윽고 아잘드의 혀가 접어든 지니스의 구내는 무중력의 우주는 아니었다. 혀에 혀를 부딪쳐가며 가능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아잘드의 입이 지니스의 입술에서 옆 목으로 내려왔다. 이로 가볍게 물고 피부를 빨아들였다. 하아, 지니스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처음 경험하는 신체 반응에, 스스로 의아했다.

 "……재밌군."

 "동감이야."

 지니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잘드가 뿌듯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 아잘드가 몸을 쓰는 일이라면 못 하는 건 없지. 자신감 넘치는 아잘드가 목에서 가슴으로 진행해 내려갔다. 아잘드가 물고 핥는 작업에 열중하는 동시에 지니스는 몸 안에서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감지하며 조금 들썩였다. 이윽고 아잘드는 지니스의 허리를 안고 몇 겹의 갑옷 같은 매끄러운 복부 아래로 내려갔다.

― 흐읏

 아잘드가 금빛 코어를 가볍게 물자, 반사적으로 고개가 확 들어 올려지며 신음을 억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차오른 숨이 가쁘게 빠져나왔다. 아잘드는 순간 오너의 광채가 어두워졌다고 확신했다. 지니스의 눈은 보일듯 말듯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튼 아잘드는 오너의 숨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기분 좋아, 오너?"

 말하며, 같은 곳을 다시 핥았다. 지니스는 대답 대신 신음을 뱉었다.


2.

 쿠발의 둥그런 뒷모습.

 성큼성큼 다섯 보를 걸어, 둥그런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뭐 하고 있어, 쿠발."

 쿠발은 크게 당황하며 뒤돌아보았다. 아잘드는 파란 잇몸을 전부 드러내며 무해하게 웃었다. 쿠발의 머리의 불빛이 깜빡깜빡하며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별로, 아무것도."

 "그럼 마시자."

 한쪽 팔을 들어올려 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쿠발은 한숨을 쉬었다.

 "무식하게 들이붓기만 하는 당신과는 마시고 싶지 않군요."

 "재미없게 굴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쿠발은 아주 기본적인 면부터 시작해서 아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잘드는 털썩하고 쿠발의 곁에 주저앉았다. 창문 바깥에서 별이 떨어졌다. 누구도 소원은 빌지 않았다. 그저 쿠발은 옆에 앉은 아잘드를 쳐다보며 이 불편한 남자가 빨리 자리를 떴으면 하고 바랐다. 불편한 남자―아잘드가 지니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스가리안은 없었다. 쿠발은 그런 면까지 아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마시러 가지 않는 겁니까."

 "네가 안 마신다며."

 "저는 안 마십니다. 가서 혼자 마셔요."

 "네가 안 놀아주면 심심하단 말이야."

 쿠발의 얼굴의 불빛이 일순 번뜩였다. 사자다리아크의 놈들이란. 아잘드는 같은 데스가리안인 자신마저 일개 놀잇감 취급인 것이다. 뇌 없는 아잘드에게마저 그런 취급이라니. 쿠발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표정을 정상화시켰다.

 "장난감은 하등생물 사이에서 찾으시지요."

 "헹, 네가 아는 재미란 고작 그런 게 전부인가보군."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쿠발이 맞받아쳤다.

 "게임도 형편없게 하면서 시시하게 술이나 드는 주제에."

 호오, 그렇게 생각해? 아잘드가 자리에서 일어서 무릎을 털었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아는 '즐거움'이 있거든."


3.

 여왕 거미처럼 아잘드 위에 거대하게 퍼진 지니스가 연인의 거친 뺨을 쓰다듬었다. 검지부터 한 손가락씩 서서히 닿는, 느릿한 몸짓이다. 그가 늘 아잘드를 애태우는 방식이었다.

 "아잘드."

 "으응?"

 아잘드는 잠긴 목소리이다. 지니스가 후후후, 낮게 웃었다.

 "둘이서 하는 게임도 좋지만……"―아잘드의 가슴께에서 반복적으로 원을 그리며 자극했다―"나는 또 한 명, 플레이어를 추가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으으음……, 그것도 재밌겠군."

 "쿠발에게, 네가 말해주지 않으련?"

 "하아……?"

 고개를 숙여 목에 키스를 심으며 말했다.

 "부탁이란다, 아잘드."


4.

 '하등생물의 번식 따위를 흉내 내다니 저급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로군요, 아잘드.'


 아잘드는 쿠발의 대사를 떠올리며 웃고 있다. 쿠발은 뻣뻣하게 앉은 채 숨도 쉬지 않고 자신과 오너를 지켜보고 있다. 아잘드의 목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그의 입술을 핥는 지니스―쿠발은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과부하를 걱정한다. 게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자극. 혀와 혀가 닿고 하반신이 점점 밀착해가며 천천히 움직인다. 일련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도 왠지 뱃속이, 그보다 더 아래가 끔찍하게 낯설고 자극적인 느낌에 휩싸였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다.

 아잘드는 다리 사이를 감싸오는 지니스의 손길을 온 신경으로 느끼며 시선을 살짝 쿠발에게로 흘렸다. 뇌쇄적인 눈빛에 쿠발은 어찌할 수도 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어지러웠다.

 "쿠발이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든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다. 지니스의 목소리이다. 쿠발은 두 명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제안은 생각해보았니?"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는.

 쿠발은 떨리기 직전인 두 다리로 지니스와 아잘드에게 다가갔다.


5.

 "이 별의 자연을 들여다본 적은 있니?"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지니스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늘 들여다보는 인간이 아닌, 자연 말이야. 작은 하늘, 흐릿한 물, 소동물, 곤충..."

 "이번엔 갑자기 또 무슨 얘기야, 오너?"

 "나는 잠시 숲을 본 적이 있단다.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벌레들이 수없이 움직이고 있더구나."

 "벌레 사냥이라도 할 생각이야?"

 "설마. 데스 게임은 사람을 사냥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란다. 왜인 줄 아니?"

 아잘드가 오너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말해봐, 오너."

 "자연은 이미 잔혹하기 때문이란다. 단체單體가 죽어도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지..."

 '단체가 죽어도.' 문득 자신의 다리 아래에서 웃고 있는 지니스도 그 위에 올라앉은 자신도 그사이의 어딘가에서 행복해 보이는 아잘드도 혐오스럽게 느껴져, 쿠발은 숨을 골랐다. 속으로 숫자를 센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러나 세는 숫자마다 지니스가 자신을 눈짓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별의 숲에서도 봤단다―작은 녹색 벌레가 말이지, 교미가 끝나곤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모습을. 자연은 잔혹하단다."


6.

 반그레이의 제안을 받아들인 날, 악수하던 손에서 쿠발은 낯선 체온을 느꼈다. 반그레이의 손은 그간의 망각을 벌하듯이 따끔하게 뜨거웠다. 오래된 고향의 사람들도, 함께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과열 직전까지 달아오른 자신도 가진 적 없는 외계적인 온도였다. 어쩌면 쿠발은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를 안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체온에 오래 닿고 있으면 고장 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발을 돌려 다시 원수의 몸을 안을 일도 없을 것이라고, 반그레이의 뜨거운 손을 보며 생각했다. 그저 재미로 섞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결단의 때가 도래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생생했고 오랜만에 외로웠다. 갑자기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어졌지만 이제는 그 누구와도 몸을 섞지 않을 수 없었다.


7.

 오랜만에 잡는 손이었건만,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잘린 손에는 아무런 온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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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

도S 히비키... 라는 느낌으로 쓰기 시작한 글

감금 소재 주의


낯선 천장.


방은 대개 하얗다. 흰 벽에는 얼룩이 없다. 반짝거리도록 코팅된 목재 서랍장이 있고 비싼 금으로 장식된 거울이 화장대에 붙어있다. 기본적인, 그러나 비싼 화장품이 화장대 위에 나열되어 있지만 하나도 손댄 것이 없다. 서랍 안에는 종이가 쌓여 있다. 시쿄인 히비키가 읽을 수 없는 토속 언어로 쓰여진 글이 대부분 꾸겨진 채 나뒹굴고 있다. 서랍장과 벽 사이에 끼어있는 솜과 캐시미어와 실크로 만들어진 침대 역시 서랍장 위에 방치된 화장품처럼 사용되지 않는 채다.

미도리카제 후와리는 이 풍경이 지긋지긋하게 싫다.


너무 하얗고, 너무 푹신하고, 합성섬유 냄새가 너무 강한 방. 다시 머리가 아파왔기에 후와리는 서랍 위에 둔 통에서 진통제를 한 알 꺼내어 목 뒤로 넘겼다. 두통이 심하다고 호소하자 시쿄인 히비키가 넣어둔 것이었다. 납치범의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다.


방에는 시계도 창문도 없지만 후와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으로 밤의 도래를 직감한다. 밤을 직감하자 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시쿄인 히비키는 밤에 찾아온다.


   벅

    벅

하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리고

열리는


문.


서늘함과 함께 시쿄인 히비키가 발을 들인다.


“다녀왔어, 후와리.”

“히비키 님……”


히비키는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걸음 다가와 후와리를 가볍게 팔에 안았다. 후와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근 두근 두근 격앙된 고동은 맞닿은 히비키의 몸에 전해졌다. 이에 히비키는 흡족함을 숨기지 않으며 부드럽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연습은 성실하게 하고 있었니?”

“전…….”


몇 번이나 말해온 것이다.

어떤 말도 전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게 나을까?


“저 더 이상 프린세스가 되고 싶지 않아요……”

“후와리.”


히비키가 가벼운 손짓으로 후와리의 턱을 집어들어 눈높이를 맞췄다. 얼음 같은 눈빛에 무심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내게 미움받고 싶니?”

“히비키 님, 저는……”

“후와리.”


히비키는 침착하게 갈아앉은 눈빛이다.


“이제부터는 성실하게 연습할거지?”

침을 넘기고 입술을 문다. 그리고 후와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 건 아니예요.


―꺄악!


새된 비명이 울렸다. 후와리의 시야가 일순 까맣게 점멸했다.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가벼운 몸이 땅을 구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시쿄인 히비키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후와리는 일어서 도망쳐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후와리, 네겐 조금 더 교육이 필요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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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9)


* "메가니이" ↔ "안경 오빠". 아카이 쪽은 본명 취급.

* 마찬가지로 "메가네에" ↔ "안경 언니". 일본어판을 존중합니다...

* 레오나는 젠더퀴어...이지만 글만 읽어서는 젠더퀴어인지 시스젠더 게이인지 애매하긴 함. 일단 젠더퀴어 생각으로 썼음.

* 아카이 메가니이상은 시스헤테로 페도필리아 퀴어포빅

* 반복하지만 안경 오빠가 페도필리아에 퀴어포빅



<지향작용>


0.

 레오나 웨스트에 대한 사견.


 달콤한 딸기 같은 소녀. 핑크색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이다. 그리고 유리알 같은 체리빛깔 눈동자와 우유 같은 흰 피부. 목소리는 라라나 파루루와 같은 프리즘 보이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리고 사근사근해서 예쁘다.

 (야하다.)


 홀로 앉아있는 거실, 테이블 위에 곱게 포장된 상자가 올려져 있다. "2월 14일은 세인트 발렌타인 데이." 솔라미 스마일의 라이브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는 기분이다. 솔라미 스마일은 좋은 아이돌이다. 재능도 열정도 넘치는. 그런 아이돌들이 귀와 마음에 잔향을 남기는 라이브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아이돌의 신규유입과 성장에 있어 필요불가결적 존재인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렇기에 지금껏 직업을, "메가니이"를 관둘 수 없었다.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메가니이"는 천직이었다. 아이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미소와 하찮은 음악적 재능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남자에게 맞는 일은 몇 없다.


 「from 레오나 웨스트」.


 아카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프리파라에서의 미소(영업용 미소)와는 조금 다른 웃음이다. 조금 기묘한, 다소 섬뜩한. 초콜릿 안경의 안경다리를 부수는 손과 그것을 집어삼키는 입은 포식자의 것이다. 혀에 달콤함이 쏟아졌다. 레-오-나. 혀가 한 번 이빨에 닿았다, 떨어졌다가 다시 한번 입천장을 건드린다. 레. 오. 나.[각주:1] 수줍은 미소와 눈동자 색에 맞추기라도 하는 듯 체리 같았던 홍조를 띈 얼굴을 기억했다. 


 피가 몰린다고 자각했다.

 곤란하네. 아무도 없기에 중얼이는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다.


 검은 하늘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도 동요가 없어서 고전적인 연애 소설의 문구를 연상시켰다. 일어로는 달이 아름답네요, 영어로는 아이 러브 유. 초콜릿도 이것도 다 그런 의미잖아.


1.

 아침, 프리파라에.

 출근은 월화수목금금금. 아카이는 직원용 마이패스를 스캔했다. 


 "오늘의 코디는 금색 포인트가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는 흰 셔츠에 노란색 바이어스로 완성된 블루 컬러의 베스트! 심플한 블랙의 팬츠가 정장룩에 안성맞춤이야! 빨간 안경이 너무나도 어울려!"


 메가네에가 생긋 웃었다. 장난스러운 비아냥이다. 변함없는 아침의 형식이다. '잘 부탁해, 메가니이상. 한 달만 일해보면 길 가다 안경점만 봐도 트라우마로 손이 떨리게 될거야.' 첫 출근 날 그녀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눈을 휘고 입꼬리를 올리는 요령을 그녀에게서 배웠다.


 오후 한 시 반은 레오나 웨스트가 도로시 웨스트와 떨어져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레오나는 지하로, 도로시는 3층으로 향하는 이동수업. 그 때 레오나 웨스트의 프리패스가 울린다.


 액정에 나타나는 얼굴에, 레오나는 프리패스를 떨어뜨릴 뻔한다.


 그 미소에 몇 번을 살해당한 기분이었는지 모를


 "메, 메가니이상……!"

 

 당황의 기색이 역력한 레오나의 모습에 일순 메가니이의 표면이 붕괴의 위험에 처한다. 그러나 아카이는 메가니이를 지키는 데에 익숙하다. 천직이니까.


 ―발렌타인 초코의 답례 프레젠트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밤 신주쿠역에서 기다릴게요. 혼자 와주면 기쁠 것 같아요, 레오나 양.


 방긋 웃었다.


2.

  오후 9시 16분. 레오나 웨스트는 조금 웃지 못할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도로시와 싸울 뻔했다. 하지만 과하게 놀린 건 도로시 쪽인걸. 메가니이상도 나빠. 왜 하필 데이트 신청마냥 그런 식으로.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레오나 양?"


 레오나가 화들짝 놀랐다. 뒤돌아보자 붉은 안경의 청년이 서있었다.


 "메가니이상!"

 "네에, 저랍니다."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틀림없이 익숙한 메가니이의 것이어서, 레오나는 무심코 웃었다. 프리파라 밖에서 보는 메가니이는 외관상으로는 다소 새로운 느낌이었다. 아주 조금 더 날카로운 눈, 어둑한 밤하늘 아래에선 칠흑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캐주얼한 옷차림. 브이넥 티셔츠가 숨김없이 드러낸 쇄골이 달빛을 받아서 하얀색으로 보였다.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근처랍니다. 날씨가 추운데,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레오나 양?"

 "아…."


  레오나가 버벅이는 것도 전부 예상대로이다. 아카이는 몇 번이고 보아온 패턴.

 

 "네……!"

  


3.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 레오나 웨스트의 눈동자는 핏빛이다.

 베게 위로 분홍색 물줄기처럼 쏟아진 곱슬머리, 풀어헤쳐진 블라우스, 벗겨져 무릎 아래로 내려진 치마.


 아카이는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교복 바지를 입으면 레오나 웨스트 군. 프리파라에서는 레오나쨩.[각주:2] 우습지도 않았다.


 앳된 양손으로 필사적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다. 억눌렀다. 숨김없는 경멸과 어쩔 수도 없는 수치심을 피해, 레오나는 고개를 돌려 베게에 옆얼굴을 파묻었다. 그제서야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 코를 타고 흘러내려 베게를 적셨다. 그 감각에 연쇄작용을 하듯이 눈물이 퍼붓기 시작했다. 프리파라 밖에서는 흉내내도 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연정도 비극으로밖에 통할 수 없을 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커다란 작용의 존재를 느꼈다.

  1. 소설 <롤리타>의 패러디 [본문으로]
  2. 원문 :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 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있는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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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8)

 

 사형


 하얗게, 하얗게. 천사처럼 내려왔던 니아의 첫 이미지를 기억했다. 구름 같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와 다만 우주를 담은 듯 두 눈만은 새카맸다.
 그때부터 니아가 싫었다. 천상의 존재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를 격하시키고 싶었다. 성적을 흐트러뜨리고 얼굴을 선명한 표정으로 물들이고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질투와 증오는 가속했다. 니아를 발치에 무릎 꿇게 하고 발등을 핥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질투의 이야기는 결국 시시껄렁하다.
 인생이 통째로 니아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읽어왔던 책들과,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었던 축구 게임들, 언젠가부터 혼자 먹었던 급식, 들여다봤던 흰 모니터에 찍힌 cloister black 폰트의 L이라는 글자와 귀에 꽂혔던 변조된 목소리와, 지나간 겨울 봄 여름 가을은 이윽고 공전 아홉 바퀴만큼 쌓였고.

 그러나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야.
 열등감이, 분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울었던 어느 날 니아는 고요하게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 슬프리만치 만들어진 세계의 제왕이 니아였다. 멜로에게 있어서는. 모두의 우상인 L도, 위대한 아버지 되는 와미도 아니었다. 오직 니아. 멜로에게 있어서는 오직 니아였다.

 그리고 좁은 세계는 연극의 막이 내리듯 종말을 고한다.

 의자 두 개가 있는 지하실에서
 지금, 가족은 끝납니다¹

 니아는 내내 지나치게 다소곳하게 앉은 모습이다. 멜로가 오른팔을 들었다. 니아의 머리통은 상상했던 만큼 푹신했다.

 싫어요.
 떨림 없는 목소리.

 멜로는 소리 없이 자조했다. 우리는 이제 시시한 경쟁조차 못 하게 되었어. 우리는 겉으로는 추앙받았지만 결국 조종당할 뿐이라서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지.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곧은 목소리가 철벽에 반향했다:
 "나를 봐주세요, 멜로. 내가 멜로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멜로가 흠칫했다. 천천히 니아가 돌았다. 천천히. 달이 차듯이 니아의 얼굴은 천천히 드러났다. 구름 같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와 우주를 담은 듯 새카만 두 눈. 아직 어린, 조그마한 이목구비. 지나치게 작게 느껴지는. 아니, 그 반대다. 여태까지 소년은 실제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였다.

 천천히 그가 입을 벌렸다. 우주가 벌어지듯이. 입이 벌려진 너비만큼 새카만 우주가 보였다. 그것은 천천히 점점 확장해갔다.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안은 새카맸다.
 우주의 입구에 총을 쑤셔 넣었다. 니아의 입은 정말 꼭 우주처럼 저항 없이 두꺼운 총구를 받아들이고 삼켰다.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졌어. 그러니까 하나, 둘,

 셋.

 파열했다.

 천사의 잔해라고 할 만한 것은 그저 지극히 새빨간 부서진 송장이었다. 그것은 하얗지도 않았고 이름도 없었다.


역시 감정적인 글을 쓰는 것은 특기가 아니라고 느끼지만 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 종종 도전하게 되어요.
학교 영어 시간에 <생쥐와 인간>을 읽었습니다. 누가 누굴 죽이든간에 멜로랑 니아가 서로 죽이는 걸 보고 싶어져서 썼습니다.

₁송승언, 이파티예프로 돌아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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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1)

eight (feat. 하츠네 미쿠) - 焼身証明소신증명 

 ―죽을 것 같아.

 A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무렵 A는 무척이나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A는 그 때 이미 유령 같았다. 투명해지고 있던 A B.B.가 끌어안았다. 강하게 끌어안는 양 팔 안에서도 A는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소신증명

Beyond Birthday*A

w. Runtz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A가 자해를 해서 보건소에 실려갔다는 소식이었다. 로저는 무척이나 충격먹은 눈치였다. 아이가 자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유망주였던 A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경쟁시켜 키운 무정한 아이들은 소란을 피워대면서도 진심으로 A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경쟁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일 따름이었다. 더구나 A는 첫 번째로 선발된 후계자 후보였다많은 아이들은 A를 특히 시기하고 있었다. 아예 죽어버리지, 아깝다. 누군가 말하는 것은 비욘드 버스데이는 들었다. 비욘드 버스데이는 보건소로 향했다.


 A는 왼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비욘드가 다가가자 A가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비욘드가 A 곁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A가 약하게 웃었다.

 “안녕, 비욘드.”

 A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아스파이어(Aspire), 너는 죽고 싶어?”

 비욘드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A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그러면 도망치면 돼.”

 비욘드는 어느새 뚜껑을 딴 딸기잼 병에서 잼을 한 손가락 퍼서 A의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A는 기운 없이 비욘드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A의 입안에서 비욘드의 손가락의 짭쪼름한 맛과 딸기와 설탕의 단맛이 섞였다. A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야, 비욘드. 물리적으로 이 장소에서 떨어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정말로 그럴까?”

 “비욘드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만약 여기서 도망쳐나가더라도 계속 머릿속에서 퀼시랑 로저가 L처럼 되지 않으면 버려질 거라고 괴롭히고 애들이 나를 협박하거나 조롱하는 소리도 계속 들릴 거야……. 나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A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비욘드는 굳이 직설적인 , 나는 죽고 싶어.’를 듣지 않아도 A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죽으려고 그은 거야?”

 “아니.”

 “, 아닐 것 같았어.”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스스로의 살을 날카로운 칼날로 파고들었나. 비욘드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A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연약하게 누워서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의 피부도 아랑곳 않고 파낼 수 있었던 강한, 비욘드가 생각하는 외유내강의 궁극체인 A는 뭇 아이들과 달리 겸손하고 부드럽고 다정했고, 퀼시 와미가 고른 첫 번째 후보답게 가시를 둘러 무장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총명했다. 비욘드는 그런 A를 알아보았고, 아꼈다. 특히, 비욘드는 A가 가끔씩 불현 듯 말하는 철학적이거나 시적인 구절들을 무척 좋아했다.

 “달이 아름답네요.”

 “, 그런 것 같네.”

 비욘드가 대답하자 A가 눈을 내리깔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상관없어.”

 빈 딸기잼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비욘드가 허리를 굽혀 얇은 이불이 덮인 A의 무릎 위에 상체를 살짝 엎드렸다. 깨끗한 오른손이 검은 머리카락을 얕게 쓰다듬었다. 와미즈 하우스의 제왕, 무자비한 비욘드 버스데이. 그런 그가 나약한 자신 곁에서 밤을 지새워주는 것이 A는 지나치게 고마웠다. 창백한 달빛이 창을 비추었다. A는 눈을 감았다. A가 잠들었을 때 비욘드가 눈을 떴다. 비욘드는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


 그날 A는 도서실에 간다고 했다. 비욘드가 A를 찾아 도서관으로 갔을 때 A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사서에게 묻자 A The Peaceful Pill이라는 책을 빌렸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비욘드는 그것이 어떤 책인지 알고 있었다. 비욘드는 A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사서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비욘드는 가장 먼저 보건소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도 A는 없었다.

비욘드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옥상이었다. A는 석양을 배경으로 임하여 있었다. 불타오르는 하늘 앞에 서서 A는 붉게 빛나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비욘드는 그 자태에 다가갔다.

 “아스파이어, 뭐 해.”

 “상쾌한 공기를 쐬면서 독서하고 싶었어.”

 “오늘의 미세먼지농도는 미터세제곱당 이백 밀리그램이야.”

 비욘드의 코멘트에 A는 입에 손을 가져다대고 아하하 웃었다. 비욘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A는 웃음을 멎고 촉촉한 눈으로 비욘드의 눈을 들여다봤다. A는 역광을 받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비욘드는 나를 잊지 않을 거야

 질문인지 평서문인지 모호했으나 명백한 선언이었다.

 비욘드가 두 발짝 걸어서 다가가 A를 끌어안았다. A가 비욘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욘드는 참 따뜻했다. 그러나 강하게 끌어안는 양 팔 안에서도 A는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튿날 A는 비욘드 버스데이를 아무도 없는 낡은 체육창고로 불러내었다. A는 얇은 양팔로 기름을 한 통 들고 있었다. A는 미소를 짓고 비욘드에게 창고 문을 잠가달라고 부탁했다. 비욘드는 그렇게 했다.그러자 빛이 들지 않아 주위가 온통 새카매졌다. A가 기름통의 뚜껑을 열었다. 빨간색 뚜껑이 바닥에 떨어지며 탁 소리가 났다. 한 손으로 통을 들어올리며 A는 몹시 휘청거렸다. 기름이 넘쳐서 바닥과 A의 발 위에 쏟아졌다. 쏟아진 기름이 퍼져서 비욘드의 발끝에까지 닿을 듯 했다. 비욘드가 물러섰다. 약간을 바닥에 쏟은 덕에 통은 더 가벼워져 A가 똑바로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A는 통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로 부었다. 머리카락부터 흠뻑 젖은 A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A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성냥을 꺼냈다. 우아한 손동작이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A는 손바닥을 펼쳤다.

바이 바이.’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호텔 콘도미니엄 1313호 룸의 침대에서 비욘드 버스데이는 A를 떠올렸다. 손에 든 라이터를 딸깍거리며 A를 집어삼켰던 불꽃을 떠올렸다. 비욘드 버스데이의 계획은 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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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관련 설정은 전부 날조입니다! <데스노트 어나더 노트ㅡ로스앤젤러스 BB 연속 살인 사건> 108쪽의 [첫번째 아이였던 A는 L이라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으 끊었고 두 번째 아이였던 B이자 비욘드 버스데이는 너무 탁월한 나머지 일탈했다.]라는 구절이 A에 대한 공식 묘사의 전부입니다만 그게 너무 좋아서... 별 날조 소설을 다 써버렸네요! 1세대 와미즈 사랑합시다~~~!!


처음에는 A는 Another(Another L; 또다른 L)의 약자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Beyond나 Near가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 단어인만큼 A의 이름도 긍정적인 뜻일거란 생각이 들어서 Aspire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Near가 니어가 아닌 '니아'로 발음되므로 일부러 Aspire도 어스파이어가 아닌 '아스파이어'로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M 아이들 (매트와 멜로) 이름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군요... 그리고 린다는 무려 L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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