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0.

"하우올리의 바닷가로 돌아가고 싶어."

 

1.

파도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공허했다. 밤의 하우올리시티는 참 좋지? 반듯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 습관처럼 두 손을 포개어 머리 뒤에 대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역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지만 알로라에서 태어난 사람인 채로 알로라로 돌아가고 싶었어. 무엇하나 진실인 전제가 없더라도…… 믿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단어들을 질겅질겅 씹듯이 내뱉는 꼴을 바라보는 눈빛이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다. 모래알을 세던 파란 눈동자가 불현듯 그를 쏘아본다.

하우, 이건 네 책임이야.

물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말한다.

왜 그때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준 거야?

 

2.

으음…… 세비퍼의 뱀눈초리처럼 노려보는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이없을 만큼 느긋하게 말라사다를 뜯고 있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생각하던 끝에 말한다. 하지만 네가 너인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사실은 내 쪽이 연상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 같이 웃던 너는.)

 

3.

세키에이에 도달하고 싶었다.

어디에나 있는 짧은 치마였으니까. 하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건 어디에도 갈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열 살이었던 우리는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불행은 불을 보듯 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릎꿇은 반바지 꼬마의 발치에 쓰러진 꼬렛을 볼 때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불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해 줘, 오키드 박사.

그런 약속이었던 게 아니었어?

 

4.

반짝이는 신이 속삭인다.

그렇지만 너는 알로라로 도망쳤기 때문에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

짙어지는 눈그늘을 선글라스 뒤에 숨겼다.

색을 잃어버리는 피부는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 산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져있던 나를 네가 찾아줘서 기뻤어.

 

5.

괜찮아, 시간은 미래만을 향하지는 않으니까…… 너의 구원이 과거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우주의 구석에서 듣는 희망론에는 왠지 모를 설득력이 실린다. 시간의 신의 얼굴을 보고 온 참이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밖에 없는 곳에서 시간의 신은 도대체 무엇을 관장하는 걸까. 그렇다면 앞면도 뒷면도 없이 광활하게만 펼쳐진 우주에서 공간의 신은? 다들 한가해서 이름을 나누어 가졌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회귀하는 것은 너 혼자가 아니야. 전설은 너의 편에 있어.

바다는 땅으로, 땅은 바다로 돌아간다. 무에서 유로 돌아간다.

그래, 외롭지 않겠네.

그럼, 나의 꿈은 어디에? / 그건, 현실의 연속. / 나의 현실은, 어디에? / 그건, '꿈의 끝'이야. (신세기 에반게리온)

(2020.06.30)

 

그는 하나지방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짧은 치마 트레이너다.

이 국가가 장려하는 10세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한, 거친 숲길과 동굴을 지나 포켓몬센터에서 포켓몬센터를 전전한, 그리고 결국에는 여덟 개의 배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기 전에 포기하고 정착함으로써 꿈을 포기한, 포켓몬 리그라는 시스템이 리그 챔피언의 환상을 대물림하는 수단인 평범한 트레이너.

배지 케이스 안에는 승리의 훈장인 동시에 좌절의 상징인 포켓몬 리그 공인 체육관 배지가 다섯 개 빛나고 있다.

아아, 좋은 시절이었지.

좋은 시절은 좋은 시절로 추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이제는 눈을 돌려 현실을 본다. 어린이를 통제하는 것은 포켓몬 리그지만 어른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그것보다도 더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하나지방 자본주의의 중심 블랙시티,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그는 행운아였다.

더이상 꿈은 없었다. 다만 부자와 권력자들이 정교하게 만든 틀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생을 이미 그 틀에 부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는 그것에서 갑갑함보다는 평안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것은 가게에서였을까.

당신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직원은 당신이 건넨 카드를 묵직해 보이는 돌 하나와 함께 돌려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던 돌은 상당히 빛나고 있었다. 진화의 돌, 그중에서도 빛의 돌임을 한때 체육관을 순회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빛의돌이 밝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자신했으며, 그러니 한눈에 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자신이 리그 챔피언의 꿈을 포기할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겠지.

 

흑의 마천루는 블랙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수입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블랙 시티 주민들의 길티 플레저였다.

최강의 트레이너, 포켓몬 리그 제패, 챔피언 같은 말에는 ‘한때는 그랬었지’ 하고 냉소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마천루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사실은 많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천루 안에서는 모두가 초면이었다.

그는 당신이 마천루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보면 높디높은 마천루였지만,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숫자뿐이었다. 잘 지어진 엘리베이터는 붕 뜨는 감각조차 없어서, 마천루에는 배틀에 전념하라는 듯 창문도 없이 오로지 인공적인 빛뿐이어서.

그래서 그는 자신이 8층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쓰러뜨린 연구원이 게이트 트레이너는 9층에 있다고 했다. 포켓몬들은 거의 한계였고, 의사에게는 이미 한 번 부탁했기에 다시 한번 회복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아갈 수 있는 만큼을 나아가고, 실패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한번 올라갈 뿐이다.

마천루를 아무리 오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챔피언이라고 불러주지도 않고, 보스 트레이너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훈장을 달아주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놀이이므로, 마천루에는 패배의 리스크가 없다.

그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당신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저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아득하게 상상했다.

 

우리는 마천루의 옥상에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옥상에 가 닿을 수 있나요? 꼭대기 층까지 오르면 거기엔 파랗고 녹색이고 형광인 조명이 아닌 햇빛이 닿나요? 아득바득 올라왔던 높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 도시는 정말 새카맣구나,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불어오는 바람에 갈색 머리와 코트를 휘날리며, 난간도 없는 옥상에서 당신은 무얼 보는지 곧은 자세로 가만히도 서 있었다.

그런 당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의 발소리였다.

블랙시티에 집어 삼켜진 구두 소리, 그러나 아직은 앳된 걸음 소리가 당신을 뒤돌게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당신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최강의 포켓몬 트레이너 같은 꿈은 진즉에 끝나있었다.

그것은 국가에서 어린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심었던 꿈으로,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의 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긁히고 찢기고 뼈가 부러져가면서 얻은 체육관 배지조차, 스스로 원한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흑의 마천루를 오른 것만큼은 그의 의지였다.

그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당신은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젠 괜찮지 않겠어?

그는 당신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좁혀져, 당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입술 위로 포개져 오는 당신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발밑이 사라졌다.

 

몇 층 높이를 떨어진 것인지, 그는 모른다.

 

눈을 떠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퇴근 후에는 흑의 마천루에 가지 않았다.

 

 

 


 

최근 구세대 포켓몬 기반 자캐커뮤를 뛰게 되어 자료 참고용으로 닌텐도DS를 자주 켜게 되었는데...
분명 기억상으로는 BW2가 DP 다음으로 열심히 했던 시리즈였던 것 같은데 정작 게임을 켜보니 채 50시간이 안되는 플탐에 충격을 받고... 일단 흑의 마천루를 뽀갰습니다. 근데 에리어 8 보스 치요 씨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이건 무조건 나락서사 어쩌구 된다. 그리고 백합이어야 한다. 싶어서 휘갈겼습니다. 
맨 위에 인용한 글귀는 에반게리온인데 다 쓰고 나서 어울리는 것 같아서 인용했고, 실제로는 Mitski의 First Love/Late Spring을 들으면서 썼어요. [ 블랙홀처럼 깜깜한 당신이 잠든 창문 ] ... [ 너의 한마디면 나는 지금 있는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 / 그러니까 내가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도록 그러지 말라고 해줘 ]...

(2020. 1. 13)

KOF 14 얼마 전 정도 시점, 이오리 위주 글. 고양이도 나오고 쿄도 나오고 신고도 나오지만 아마 논커플링. 암경 혹은 경암으로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트리거워닝: 애완묘의 유기·동물학대에 대한 묘사 및 사용된 관련 소재에 대한 고찰의 부재)



“어이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


으슥한 골목, 한밤중. 창백한 달빛 아래 길게 그림자가 늘어져있다. 야가미 이오리는 쭈그려 앉아있다. 트레이드마크인 머리카락의 붉음이 번지기라도 한 듯이 주위까지 온통 빨갛게 된 모습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질척거리는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


쿄는, 그것을 보고 말았다.


겁내거나 물러서지는 않지만, 눈을 찡그린다. 냄새마저 비릿하다.


쿠사나기 쿄를 인식한 야가미 이오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희번뜩대는 눈을 하고, 낮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유령의 웃음처럼, 불길함이 가득했다.


“흐흐…… 쿄. 나와 싸울 마음이 들었나?”


“너, 그건 대체 왜……”


내게 경멸을 사기 위해서? KOF에서 처음 그와 재회했을 시절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야가미 이오리라는 자는 그렇게 우회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정확히 자신만을 향해, 그 누구보다도 올곧게 감정을 쏟아왔다.


“덤벼라, 쿄!”


“크윽, 여전히 말은 안 통하는군……!”


날아오는 보랏빛 불꽃을, 쿄는 가볍게 자신의 붉은 불꽃으로 튕겨냈다. 여느때보다도 짙어진 듯한 청보랏빛. 잃어버렸었던 불꽃과 함께 쿄로서는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떠한 절망도 함께 되돌아왔다는 듯이, 옛날처럼 슬픈 울림으로 웃고 있다.


“한눈 팔지 마라, 쿄! 내게 집중해라!”


네, 네. 그러시겠지요. 시끄럽네―


“한눈은 누가 팔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야가미!”


쿄의 강 펀치가 이오리의 복부에 명중한다. 이오리는 잠지 주춤했다가, 다시 일어나 공격을 되돌려준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쿄의 뺨을 비껴간다.


어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야가미 이오리.


꼭 옛날로 돌아가버린 것 같잖냐.




* * *




 ―냐아.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이오리는 반사적으로 길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옆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거리로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오리는 고양이를 살펴보았다.


 주인에게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일까, 온몸의 새카만 털은 약간의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검은색 사이에서 눈만이 금빛에 가까운 연두색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체라고 보기에는 아직 자라는 중인 듯, 크기는 조금 작았다. 그러나 주변에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뭐냐.”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고양이도 곁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함께 나아갔다.


 “따라오지 마라.”


 자신이 어디서 온지도 모를 고양이를 돌볼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오리는 마치 고양이가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더 똑똑히 말했다. 


 “짐승이여, 당당하게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라.”


 ―……


 고양이는 조용히 이오리의 눈을 빤히 마주보더니,


 ―냐아아.


 이오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오히려 그의 다리에 뺨을 부비작거리는 것이었다. 이오리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싫지는 않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서는,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왔다.


 “꺼져라, 고양이.”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고양이는 오히려 그 낮은 목소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떨어질 생각은 않고, 계속해서 야가미 이오리를 따라 걸었다.


 별 수도 없이, 야가미 이오리는 허름한 아파트까지 고양이와 동행했다.




* * *




 다른 생명체의 곁에서 잠들고,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은 이오리에게 있어서는 낯선 감각이었다.


 분명, 기억을 뒤져보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흐릿해진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쿠사나기 쿄 말고는 모든 것이 흐릿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무얼 위해 태어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야가미 이오리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정답은,


 ‘죽이기 위해서다.’


 뱀이, 목을, 심장을, 감아온다.


 ‘쿠사나기를 죽여라.’


 뱀의 목소리가, 조소한다.


 ‘어차피 너의 삶은 그것뿐인 걸, 너도 알고 있을 터.’


“꺼져라, 뱀.”


‘주인이여, 내게 저항해도 소용 없다. 왜냐면―’


―캬아아.


불현듯, 뱀이 기어들어갔다.


혈관을 짓누르던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고양이……?”


―냐앙.


이오리가 의식하자, 고양이는 회답하듯 도도도 걸어와 거친 손등을 핥아주었다.


“……네놈이 뱀을 쫓았나.”


고양이는 대답 대신 작은 몸을 기대어왔다.


괜시리 쓰다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따스했다.


따스했다.


그것을 깨닫자, 야가미 이오리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


무너지는 감각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시려서, 그 순간의 이오리는 차라리 뱀의 꽉 조여오고 화끈하게 불타는 아픔이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적어도 익숙한, 길들여진 아픔을.


정체불명의 아픔. 그것은 전부, 따뜻하고 보드라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 * *




고양이는 이오리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혹은 요구했더라도, 이오리 쪽에서 그것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이오리가 라이브하우스에서 연주를 하는 밤 시간에 알아서 먹이를 찾고, 그가 귀가하는 새벽녘이 되면 언제나 그의 곁으로 되돌아오는 습관을 유지했다. 그리고 늘 마음의 경계를 허술하게 하지 않는 이오리라고 해도 점점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나흘째, 그것이 갑자기 끊겼다.


녀석, 드디어 질린 건가.


이오리는 오랜만에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그토록 꺼지라고 말했었지만 정작 이렇게 되니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보드라움 속에서 잠들던 오후들, 사람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숨결에 깨어나던 저녁들. 혐오스러운 뱀의 목소리 대신 귓가에서 울렸던 야옹거림들.


하지만 그것들 전부가 자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그것은 이튿날 다시 돌아왔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비극적이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이오리는 그 고양이를 알아보았다. 잊을 수 없었다.


돌아온 고양이는 발랄하고 생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싸움에서 진 파이터처럼 너덜너덜해져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양이는 파이터가 아니다.


‘치료를’


(그러나, 이오리에게 그런 특기는 없었다. 허름한 동네에는 수의사도 없었다. 이오리 자신조차도 필요할 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고양이는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이오리를 향해 눈빛을 보내왔다.


━━━.


고양이의 목울대에서 나온 것은 긁는 듯한 소리가 전부였지만, 이오리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후후후…… 흐흐……’


밤은 너무나 깊었고, 고양이도 더이상 뱀을 쫓을 수 없었다.


 ‘주인이여…….’


“하, 하하…….”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겠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 *




“그 녀석, 우는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어. 1996년처럼.”


“오오, 구체적…… 이네요.”


“내가 참가했던 대회를 잊을 수는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저도 쿠사나기상이 참가한 KOF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구요! 헤헤.”


“그러냐.”


“에엑~ 좀 더 기뻐해 주세요!”


“아니, 잊어버려도 되니까. 랄까 잊어라, 좀. 훠이훠이.”


“쿠사나기상~”


신고의 우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는 쿄의 의식은 야가미 이오리에 관한 생각으로 둥실둥실 흘러간다.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게. 연한 햇빛이 다정하게 내리쬐는, 그런 낮이다. 그러나 쿄는 전날 밤을 생각한다.


‘검은 고양이, 인가…….’


피에 젖은 손으로 죽은 고양이를 들고, 슬픈 눈으로 웃던 야가미.


‘그러고 보면, 불행의 상징이라는 얘기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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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15)


만약 자살에 실패한다면 니시키노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면 좋겠다




동반자가 아니므로 너에게 연락은 가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보다도 가까운 것도 모르고 연락을 받지 않는 내가 아주 멀리에 있는 줄로 알겠지


하지만 그걸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날의 대기실을 떠올리면 언제든 죽을 용기가 생긴다. 그 순간의 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과 체념, 문득 중얼거린 "죽고 싶지 않아" 그대로 아무것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이제와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은 죽지 않는 것보다 하나도 낫지 않다


고통은 피부처럼 익숙하기 때문이다 고작 고통을 회피하는 것에는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유의미한 변화, 좋은 일을 원한다


그와는 반대로 드디어 땅 위로 되돌아왔지 익숙하고 숨 막히는, 만약에 조금 더 연기를 했다면 조금 더 떠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없는 신앙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교인 같은 일이다


천국에는 갈 수 없겠지만 갈 거라고 믿는 전능감, 그런 기분은 낼 수 있겠지




자살에 실패해서 니시키노 종합병원으로 이송되고 싶은 것이다




분명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바다가 보이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네 향기에 감싸여서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죽어갈 수 있다면 분명 너를 망가뜨렸대도 행복하겠지


꿈에서라도 좋은 일을 원하니까


공교롭게도 너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2019. 2. 28

카르마←나기사←카에데인데 카르마랑 나기사 중심임... 온갖 감성이 짬뽕되어있음 일단은 50년대 미국 AU


1.


    “카르마, 제발.”


    한숨 섞인 목소리에 울분이 담겨있다. 카르마는 웃었고, 나기사는 카르마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카르마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다시 씨익 웃었다.


    “걱정 마, 안 죽어.”


    카르마가 액셀을 밟자, 또 어딘가 잘못되어서 나는 것이 틀림없는 소음과 함께 차가 지나치게 빨리 달렸다. 자갈이나 갑각류, 버려진 병 위로 달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꼭 붙든 나기사도 같이 덜컹거렸다. 멀미가 날 것 같다. 나기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차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연한 에메랄드빛으로 고요하게 넘실거리는 모양은 그 순간에는 바다라기보다도 호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고가 날 법한 속도로 차를 몰고 있었지만 새벽의 해안에는 사람들을 지워낸 듯이 아무도 없었다.


    연한 에메랄드빛 바다의 색깔은 저와 그 아이의 중간 즈음 같다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생긋 웃는 얼굴이 예쁘던 그 아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는 슬럼에서 교사 일을 하고 있다던 그는 유독 예쁘장해서 어려서부터 연극배우를 했다. 넉넉하지는 않은 형편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하던 나기사는 극장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기껏해야 그가 원할 때 그에게 생수를 가져다주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비슷한 또래라는 이유로 그는 나기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나기사는 무대에 선 그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정도 연기라면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가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가……’


    ―끼이익,


    나기사가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에 카르마가 급정거했다. 물론 역효과였다.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힘겹게 어깨를 들썩이는 나기사를 카르마가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도 알잖아? 네 탓이 아니야.”


    나기사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멍청아.”


    카르마의 감정이 연민에서 무력감, 무력감에서 초조함, 이윽고 초조함에서 짜증으로 바뀌어갔다. 눈치가 지나치게 좋은 나기사는 그것을 온전히 느꼈다. 그래도 힘 빠진 목소리로 제 할 말을 했다.


    “그래도…… 만약 내가 계속 그 애 옆에 있어 줄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과연 네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응?”


    카르마가 경적을 내리쳤다.


    아무도 없는 바다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기사는 그 소리에도 덜컥 겁을 먹었지만, 주변에는 경찰도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었다고 그래?”


    카르마의 말대로였다. 카르마가 운전대를 잡고 제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거칠게나마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나기사는 결국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폐 끼쳐서 미안해, 카르마.”


    카르마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내려라.”


    “뭐?”


    “어디로든 가라고, 내려서. 다리도 멀쩡하잖아?”


    나기사가 카르마와 눈을 마주했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 대 때렸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카르마와 나름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나기사였기에 알았다―저런 눈빛의 카르마는 사람을 때린다.


    단념하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차 안으로 훅 들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카르마의 코끝을 찔렀을 때 카르마는 나기사를 내쫓은 것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나기사는 이미 카르마의 쉐보레 벨에어를 등진 채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2.


    해안을 계속 걷고 있었다. 걸음 수만큼 발자국이 찍혔다. 태양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점차 따뜻해지는 해안, 나기사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카르마에게 충동적으로 내쫓긴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지만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카르마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런 자세를 취했던 걸지도 모른다. 카르마는 나기사를 소중히 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충분조건처럼 여겼다. 오직 나기사가 시답잖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카르마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곳으로 나기사를 골랐다. 그러나 나기사는 카르마를 이해했다. 누구나 그런 곳이 필요한 법이다―나기사 자신도 그러했다. 그런 카르마가 저를 내버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총이라도 맞지 않는 한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기사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끼고 발밑을 내려보았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콜라병 같았다. 간밤의 누군가가 즐겼던 흔적일 것이다. 얼굴 모를 그들은 즐거웠을까. 즐거움의 대가로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일까. 나기사는 걸음마다 백사장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차례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혈흔이라 신경은 쓰지 않았다.


주변은 점점 밝아지고 사람도 하나둘 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앳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기사는 내륙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햇빛을 받아들인 바다는 연한 에메랄드빛 띠는 것을 그만두었기에.




도시에서는 영어와 비슷한 비율로 드문드문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많이 남쪽으로 왔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주머니를 뒤져 2달러 남짓 되는 돈을 발견했으므로 나기사는 근처의 다이너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이름은 리오였다. 눈썹 색을 보아 머리카락은 염색 금발이었지만, 투명한 파란 눈은 진짜였다. 한눈에 타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느니, 그렇지만 첫눈에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느니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으며 그는 나기사에게 꽤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기사가 적당히 고개를 끄떡여주자, 자기는 성적은 좋았는데 학교를 자퇴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기사는 문득 저도 학교에 되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뭐 하고 살아?”


허를 찔렸다.


“어, 글쎄……”


“너, 놀라는 게 꼭 토끼 같다. 머리 때문에 그런가?”


카에데가 그렇게 묶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카에데 없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괜찮아. 난 여기서 자주 보거든.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사람들.”


“……지금은,” 나기사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기다려? 뭘? 기회를? 사람을?”


“사람을 말이야.”


카르마가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주길 기다리고 있어.




3.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어 시동을 멈추고 핸들 위로 엎드렸다. 낡은 차가 당장 무너져내릴 것처럼 덜거덕거렸다.


    이대로 멕시코나 네바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다. 과거에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미래에도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에 문화적으로 눌어붙은 온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쪽이 중요하다. 오직 사랑만이 무언가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나기사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나기사가 카야노 카에데를 찾았듯이.


    


카에데의 시체를 말이다.


    


‘카야노 카에데’라는 가명으로만 나기사는 마지막까지 그를 알았다. 나는 그의 본명이 유키무라 아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름과 무관하게 그는 언니가 남자친구의 총에 맞은 날 자살했다. 그는 언니와 나기사가 보아주는 것을 유일한 보람으로 살아가던 연기자였고, 언니가 죽고 나기사가 떠난 상황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허무에는 취약한 법이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나기사가 동네에 없었던 이유는 2주 전에 특별한 이유 없이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나를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사랑 고백을 유언으로 남긴 카에데의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나기사는 후회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나기사와는 무관하게 카야노 카에데가 텅 빈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카에데는 나기사를 돌보며 자기 자신을 나기사로 가득히 메웠고, 나기사는 자신을 돌보는 카에데로부터 평온을 얻었다.


    


    눈을 뜨자 하늘이 다시 어두웠다.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차를 몰고 그대로 멕시코로 사라질지, 나기사를 찾을지 고민했다.


있을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것에 기뻐하고 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받으면 이 세상에 속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찾아낸 나기사가 살아있지 않은 모습이라 하더라도 무엇 하나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헬륨 풍선 같은 마음이 나기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지만―그리고 그것이 두렵지도 않았지만―관성처럼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4.


    먹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톡톡 떨어지던 비는 눈 깜짝할 새에 소나기가 되었다.


    따라서 카야노 카에데를 덮은 흙 위로, 흙을 덮은 들꽃 위로 연한 비가 가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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