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0.

"하우올리의 바닷가로 돌아가고 싶어."

 

1.

파도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공허했다. 밤의 하우올리시티는 참 좋지? 반듯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 습관처럼 두 손을 포개어 머리 뒤에 대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역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지만 알로라에서 태어난 사람인 채로 알로라로 돌아가고 싶었어. 무엇하나 진실인 전제가 없더라도…… 믿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단어들을 질겅질겅 씹듯이 내뱉는 꼴을 바라보는 눈빛이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다. 모래알을 세던 파란 눈동자가 불현듯 그를 쏘아본다.

하우, 이건 네 책임이야.

물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말한다.

왜 그때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준 거야?

 

2.

으음…… 세비퍼의 뱀눈초리처럼 노려보는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이없을 만큼 느긋하게 말라사다를 뜯고 있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생각하던 끝에 말한다. 하지만 네가 너인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사실은 내 쪽이 연상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 같이 웃던 너는.)

 

3.

세키에이에 도달하고 싶었다.

어디에나 있는 짧은 치마였으니까. 하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건 어디에도 갈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열 살이었던 우리는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불행은 불을 보듯 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릎꿇은 반바지 꼬마의 발치에 쓰러진 꼬렛을 볼 때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불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해 줘, 오키드 박사.

그런 약속이었던 게 아니었어?

 

4.

반짝이는 신이 속삭인다.

그렇지만 너는 알로라로 도망쳤기 때문에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

짙어지는 눈그늘을 선글라스 뒤에 숨겼다.

색을 잃어버리는 피부는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 산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져있던 나를 네가 찾아줘서 기뻤어.

 

5.

괜찮아, 시간은 미래만을 향하지는 않으니까…… 너의 구원이 과거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우주의 구석에서 듣는 희망론에는 왠지 모를 설득력이 실린다. 시간의 신의 얼굴을 보고 온 참이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밖에 없는 곳에서 시간의 신은 도대체 무엇을 관장하는 걸까. 그렇다면 앞면도 뒷면도 없이 광활하게만 펼쳐진 우주에서 공간의 신은? 다들 한가해서 이름을 나누어 가졌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회귀하는 것은 너 혼자가 아니야. 전설은 너의 편에 있어.

바다는 땅으로, 땅은 바다로 돌아간다. 무에서 유로 돌아간다.

그래, 외롭지 않겠네.

그럼, 나의 꿈은 어디에? / 그건, 현실의 연속. / 나의 현실은, 어디에? / 그건, '꿈의 끝'이야. (신세기 에반게리온)

(2020.06.30)

 

그는 하나지방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짧은 치마 트레이너다.

이 국가가 장려하는 10세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한, 거친 숲길과 동굴을 지나 포켓몬센터에서 포켓몬센터를 전전한, 그리고 결국에는 여덟 개의 배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기 전에 포기하고 정착함으로써 꿈을 포기한, 포켓몬 리그라는 시스템이 리그 챔피언의 환상을 대물림하는 수단인 평범한 트레이너.

배지 케이스 안에는 승리의 훈장인 동시에 좌절의 상징인 포켓몬 리그 공인 체육관 배지가 다섯 개 빛나고 있다.

아아, 좋은 시절이었지.

좋은 시절은 좋은 시절로 추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이제는 눈을 돌려 현실을 본다. 어린이를 통제하는 것은 포켓몬 리그지만 어른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그것보다도 더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하나지방 자본주의의 중심 블랙시티,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그는 행운아였다.

더이상 꿈은 없었다. 다만 부자와 권력자들이 정교하게 만든 틀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생을 이미 그 틀에 부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는 그것에서 갑갑함보다는 평안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것은 가게에서였을까.

당신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직원은 당신이 건넨 카드를 묵직해 보이는 돌 하나와 함께 돌려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던 돌은 상당히 빛나고 있었다. 진화의 돌, 그중에서도 빛의 돌임을 한때 체육관을 순회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빛의돌이 밝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자신했으며, 그러니 한눈에 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자신이 리그 챔피언의 꿈을 포기할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겠지.

 

흑의 마천루는 블랙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수입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블랙 시티 주민들의 길티 플레저였다.

최강의 트레이너, 포켓몬 리그 제패, 챔피언 같은 말에는 ‘한때는 그랬었지’ 하고 냉소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마천루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사실은 많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천루 안에서는 모두가 초면이었다.

그는 당신이 마천루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보면 높디높은 마천루였지만,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숫자뿐이었다. 잘 지어진 엘리베이터는 붕 뜨는 감각조차 없어서, 마천루에는 배틀에 전념하라는 듯 창문도 없이 오로지 인공적인 빛뿐이어서.

그래서 그는 자신이 8층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쓰러뜨린 연구원이 게이트 트레이너는 9층에 있다고 했다. 포켓몬들은 거의 한계였고, 의사에게는 이미 한 번 부탁했기에 다시 한번 회복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아갈 수 있는 만큼을 나아가고, 실패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한번 올라갈 뿐이다.

마천루를 아무리 오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챔피언이라고 불러주지도 않고, 보스 트레이너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훈장을 달아주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놀이이므로, 마천루에는 패배의 리스크가 없다.

그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당신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저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아득하게 상상했다.

 

우리는 마천루의 옥상에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옥상에 가 닿을 수 있나요? 꼭대기 층까지 오르면 거기엔 파랗고 녹색이고 형광인 조명이 아닌 햇빛이 닿나요? 아득바득 올라왔던 높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 도시는 정말 새카맣구나,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불어오는 바람에 갈색 머리와 코트를 휘날리며, 난간도 없는 옥상에서 당신은 무얼 보는지 곧은 자세로 가만히도 서 있었다.

그런 당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의 발소리였다.

블랙시티에 집어 삼켜진 구두 소리, 그러나 아직은 앳된 걸음 소리가 당신을 뒤돌게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당신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최강의 포켓몬 트레이너 같은 꿈은 진즉에 끝나있었다.

그것은 국가에서 어린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심었던 꿈으로,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의 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긁히고 찢기고 뼈가 부러져가면서 얻은 체육관 배지조차, 스스로 원한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흑의 마천루를 오른 것만큼은 그의 의지였다.

그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당신은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젠 괜찮지 않겠어?

그는 당신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좁혀져, 당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입술 위로 포개져 오는 당신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발밑이 사라졌다.

 

몇 층 높이를 떨어진 것인지, 그는 모른다.

 

눈을 떠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퇴근 후에는 흑의 마천루에 가지 않았다.

 

 

 


 

최근 구세대 포켓몬 기반 자캐커뮤를 뛰게 되어 자료 참고용으로 닌텐도DS를 자주 켜게 되었는데...
분명 기억상으로는 BW2가 DP 다음으로 열심히 했던 시리즈였던 것 같은데 정작 게임을 켜보니 채 50시간이 안되는 플탐에 충격을 받고... 일단 흑의 마천루를 뽀갰습니다. 근데 에리어 8 보스 치요 씨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이건 무조건 나락서사 어쩌구 된다. 그리고 백합이어야 한다. 싶어서 휘갈겼습니다. 
맨 위에 인용한 글귀는 에반게리온인데 다 쓰고 나서 어울리는 것 같아서 인용했고, 실제로는 Mitski의 First Love/Late Spring을 들으면서 썼어요. [ 블랙홀처럼 깜깜한 당신이 잠든 창문 ] ... [ 너의 한마디면 나는 지금 있는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 / 그러니까 내가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도록 그러지 말라고 해줘 ]...

(2017.09.24)

 스트리밍 종료를 클릭하자마자 미소라의 얼굴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미소라는 사실은 팬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상하고, 기분 나쁘고. 단편적이고 인위적인 이미지를 수긍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아가서는 광신하는 남자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호응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팬은 미소라에게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필요하기 때문에만 두는……싫은 쪽이다. 이스루기 미소라는 이성적이고, 의심 많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무심코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라는 뜻이다.

 찰칵, 찰칵. 두 번이나 찍히고 나서야 미소라는 자신이 무심코 타키가와 사와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자의 카메라라는 사실조차 일순 잊고 있었다. 팬들에게 필요 이상의 먹이를 주는 것만큼은 싫은 일인데도.

 찰칵. 그리고 미소라는 세 장, 네 장째의 사진이 찍히도록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무심코가 아니었다.

 자신이 카메라를 향해 웃기에 사와가 웃는지, 사와가 웃기에 자신이 카메라를 향해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기억을 잃은 수상한 물리학자의 미소에 걸었듯이, 또 한 번 미소에 걸기로 했다.

 사와처럼 환한 미소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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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7)

 

 “그럼, 그럼……”

 주방을 뒤적거리는 타키가와 사와를 확 노려보는 이스루기 미소라. ‘어디까지나 우리 정체를 밝히지 않을’ 기사에 연구실에 대한 내용은 전혀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한 센토 때문에 ‘본격적인’ 것은 취재할 수 없게 되었지만, 작은 사실도 부풀리면 특종이라는 것이 사와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메뉴판을 꼼꼼히 받아적기도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하고 커피포트를 들춰보기도 하고.

 “그렇게 뒤져봐야 아무것도 안 나오고.”

 “특종과 특종이 아닌 것의 차이는 사실의 크기가 아닌 관점의 넓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생각은 완전 금물!”

 기자의 철학을 한쪽 귀로 흘리며 미소라는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하다. 어떻게 조용히 시킬 수 없을까. 센토, 귀찮은 걸 데려와서는. 문을 열어놓는 멍청이는 또 어떻고. 어떻게 조용히 시키고 돌려보낼 방법이…… 앗, 이어졌다.

 “그럼 차라리 커피라도 마시고 빨리 가버리는 게 낫겠고. 늦은 기사는 아무도 관심 없고.”

 “어어, 그래도 나는 좀 더 천천~히 구경하다 가고 싶은데!”

 “좀 더 빨~리 갔으면 좋겠고.”

 적당한 컵을 집어 포트에 있던 커피를 아무렇게나 따라서 뻔뻔스러운 기자에게 건네었다. 미소라의 불친절한 눈빛을 마주 본 사와는 살짝 웃었다.

 “설탕 넣어줘.”

 “이것저것 요구하고, 최악이고.”

 불만을 곱씹듯이 중얼거린 미소라가 각설탕 두 개를 퐁당퐁당 빠트렸다. 사와는 말없이 팔에 튄 커피 방울을 닦아내었다.

 “사장님은 저쪽?”

 웃었다. 미소라는 그에게 미소를 뺏긴 것처럼 한층 인상을 구겼다.

 “식기 전에 마셨으면 좋겠고.”

 미소라의 재촉에 사와가 잔을 들었다. 후, 후, 하고 두 번 불고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댄다. ‘드디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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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2017.03.19)

가면라이더 류우키 나이반전+젠더벤드 농촌 AU

 

0.

 아사쿠라 이로하浅倉威呂巴를 모르는 이는 마을에 없었다.
 아사쿠라 이로하라 함은 언젠가부터 마을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열두살 남짓 되어보이는 외모의, 악질의 계집애다. 훔친 뱀가죽 옷을 입고 작은 손에는 억세게 쇠파이프를 쥔 계집. 계집은 그 파이프를 들고 무엇이든 패고 보는 고약한 성질이었다. 아사쿠라가 패고, 먹는 것이 시궁창의 쥐새끼나 주인 없는 들개였을 적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는 점차 키우는 가축이나 마을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 악명은 마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 되기에 이르렀다.
 모르는 이는, 키타오카北岡 저택의 아가씨 키타오카 슈코北岡秀子 정도였다. 키타오카 집안은 마을의 유일한 변호사 집안이라, 일가족이 사는 키타오카 저택은 마을에서 으뜸으로 고급스러운 으리으리한 목조건물이었다. 능력 좋기로 유명한 키타오카 변호사에게 구원받은 것이 바로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로 연명하는 유라由良 집안으로, 폭력사건에 휘말린 것을 키타오카가 세 치 혀로 구해낸 것이었다. 실로는 마을에 유라가 어느 정도로 유죄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무죄든 유죄든간에 유라가 법원에 설 돈도 없는 가난한 집안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도 없었다. 유라는 키타오카에게 끝내 선임비를 지불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신 어린 딸을 사용인으로 저택에 보냈다. 빚도 갚을 겸 딸을 좋은 집안에 맡겼으니 유라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키타오카 저택으로 보내어진 유라 아이由良吾以는 키타오카의 아가씨를 퍽이나 잘 따랐다. 아이가 아가씨, 하고 부르면 아가씨는 아―쨩, 하고 애칭으로 대답할 정도로 아가씨도 사용인을 몹시나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 부모, 사용인 할 것 없이 그토록 애지중지 보살핌받으며 자란 키타오카 슈코였기 때문에야말로 아사쿠라를 몰랐다.

1.

 키타오카 슈코가 아사쿠라를 만난 것은 드물게도 아―쨩이 옆에 붙어있지 않던 날이었다. 저택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서 집에 오는 것 하루 정도는 함께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한―늘 지켜줘야 할 것 같기만 한 아가씨도 실은 자신보다 다섯살이나 많아 열다섯살이었으니―아이는 키타오카의 수업이 끝난 시각, 창고에서 곡식을 분류하고 있었다.
홀로 논두렁길을 걷던 키타오카가 아사쿠라와 마주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계절에도 몸에도 맞지도 않는 뱀가죽 옷을 걸친 아사쿠라는 갓 익기 시작한 벼를 쥐어뜯어 입안에 털어놓고 있었는데, 그런 기묘한 광경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2.

 공격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통증보다 앞서 머릿속이 텅 비듯이 차가워졌고, 의식적으로 당황한 순간 충격 아래에 숨어있던 아픔이 되돌아와서 슈코는 그제서 비명을 질렀다. 시야는 희미하고 어지러웠는데 색깔만이 튀었다. 하늘은 어이없는 파란색이었고 아사쿠라가 입은 무늬가 화려한 옷은 연한 노랑에 검정이 뒤범벅되어 시야를 난리로 뒤흔들었다. 보이는 정면에는 아사쿠라의 얼굴이 하늘에 걸린 모빌처럼 흔들거렸다.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도 전에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슈코는 힘껏 고개를 돌렸지만 피하려는 시도가 허무하게 주먹은 옆얼굴에 그대로 날아들었다. 시야에 빨강이 확 튀었다.

  아, 죽는다.

 죽을지도 몰라.

 죽고싶지 않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생각한 순간 슈코는 아사쿠라의 드러난 맨 손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고기가 씹히는 촉감이 이빨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사쿠라의 동작이 멈칫했다. 반격이 먹힌 것인가. 점점 안정되어가는 시야에 비친 아사쿠라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슈코는 처음으로 겁이 났다.

 "...짜증나."

 이제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각오해야 하는 것을 깨닫고 슈코는 무작정 다리를 들었다. 치마가 말려올라가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아사쿠라의 복부를 노리고 힘껏 찼다. 볼품없이 버둥거리는 꼴이긴 했지만 확실히 맞았다. 아사쿠라는 힘이 센 것에 비해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사실 열 살짜리 소녀의 몸의 크기를 생각하면 의외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떼어놓은 아사쿠라는 금방 다시 덮쳐와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슈코를 다시 한번 넘어뜨렸다. 아사쿠라는 거의 불사신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 생각

 "아가씨!"

 하는 순간마다 자신만의 구원자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키타오카 개인 소유의 천사.

 "아­-쨩!"

 키타오카 슈코의 충직한 유라 아이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마리의 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모두 키타오카 소유의 물건이다.

 "아가씨를 데려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항상 곁에 있어드려야 했는데. 면목없습니다, 아가씨.

 아사쿠라의 울음소리와 사랑해 마지않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무엇하나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붕 떴다...... 

 

2018. 5. 3


1. Time is Running Out


 쥰은 늘 시간에 예민했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이 절대적이며, 방심하면 모든 것을 헤집어놓는 첨예한 것이라는 것을 쥰은 아주 잘 알았다. 세상은 무지하게도 아주 느긋했지만, 쥰은 그들과 달랐다. 쥰은 시간에 익숙해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다.

 포켓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신지의 발끝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 트레이너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쥰은 화가 났다. 포켓몬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 정성을 다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시간의 무서운 점은 뭐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점이다.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변하기 전에 움직여야만 한다. 강하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변하기 전에, 혹은 강함이 변하기 전에.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내일의 자신은 앞지를 수 없지만, 쥰은 달렸다. 10초 정도라면 앞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초 전. 9초 전. 8초 전…


2. 긴 햇빛 속에 있다보면


 히카리.

 코우헤이는 그 이름이 참 좋았다. 그 주인과 꼭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히카리는 참, 밝고 눈부신 사람이었다. 코우헤이는 그 사람이 참 좋았다.

 작은 인연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뒤바꾸어놓았는지,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예정조화처럼 평탄하게 흘러가던 삶에 당신이 얼마나 햇빛처럼 쏟아졌는지, 그러자 사각형 인공공간 같은 삶에 어떤 계절들이 생겨났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것이기에, 코우헤이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코우헤이는 펜을 들었다.

 ‘코우헤이’가 공평하다는 뜻인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십 년을 살아도 삶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포켓몬을 받고 여행을 떠나면 무언가가 생기리라 기대했는데, 여행을 떠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그저 평이해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히카리’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그 단단한 삶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 거 있죠.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역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하게 돼요.

 태그배틀 때, 당신을 처음 만나고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로 당신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계절이 참 느릿했는데, 여름에 만난 당신이 얼마나 기적 같던지. 더운 공기와 아지랑이 속 당신의 모습이 꼭 꿈처럼 지나갔어요.

 이제는 가을이 한창인데, 계절이 또 느려졌어요. 사실 지금껏 상대성이론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증명해주었어요. 히카리상. 지금도 당신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요? 저는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또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전부 당신과 만나고서부터예요.



3.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줘


 확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 화석이 되었을 때쯤 캐내어줄 의향은 있었다.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하듯이, 효우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은 화석에 대한 모욕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평소에 다른 무언가가 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다 폭력적인 생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화석은 효우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 평소에 누군가가 화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은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토우간 그 자식은……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화석을 캐기조차 싫은 날은, 무조건 토우간의 책임이었다. 화석에 대한 열정마저 놈에게서 물려받은 성질이라 생각하면 혐오스러웠다. 효우타의 표정이 어두운 날이면, 탄광의 작업원들도 알아서 그가 돌아갈 때까지 말을 걸지 않는 배려를 보였다. 쿠로가네시티에서 어느정도 지낸 사람들은 다 현 짐리더와 전 짐리더의 집안사정을 알았고, 누가 보아도 압도적으로 전 짐리더 쪽의 잘못이 컸다.

 ‘화석이 좋다!’ 하고 무식하게 외치곤 하는 아버지는, 그런 식의 고백으로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일까. 다음주는 결혼기념일이다. 효우타는 미오시티로 가서 토우간 녀석을 집으로 끌고올 생각이었다. 변명은 받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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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18


뉴욕. 타치켄-> 켄하지, 뭇타치. 근데 뉴욕이 어떤 데였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영화 좀 보자.


타치바나 : 화학 전공, 인턴 약사. 진학하고 싶어함. 켄자키와는 대학 동기. 이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 켄자키와 동거 중.

켄자키 : 화학 전공, 대학생, 주유소 아르바이트생. 타치바나 하나만 보고 뉴욕까지 왔다. 타치바나보다는 적응력이 좋아서 일본인 친구도 미국인 친구도 꽤 사귀었다. 타치바나와 동거 중.

하지메 : 아마네라는 여아와 함께 거주 중인 신원불명의 남성. 본인 명의의 것이 아닌 계좌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네 : 하지메와 동거 중인 여자아이. 아버지가 실종된 도시인 뉴욕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한다. 공립 초등학교 재학 중.

하루카 : 아마네의 모친, 도쿄 거주민. 일본에서 생활하며 하지메와 아마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

 무츠키 : 일본인학교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 농구부. 자존감 부족, 우울증, PTSD.

 노조미 : 무츠키의 유일하다시피한 친구. 무츠키의 적은 죽인다.


 타치바나 사쿠야를 뒤쫓아 뉴욕시로 온 켄자키 카즈마는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만큼 심신이 야윈 그를 마주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자키는 기꺼이 타치바나를 안고 둘은 서로를 격려하는 생활을 한동안 유지하지만, 혜성처럼 나타난 아이카와 하지메는 켄자키를 별처럼 끌어당긴다. 타치바나는 켄자키에게 자신도 넉넉하지 않은 주제에 신원불명의 하지메를 챙길 때냐고 핀잔하지만 켄자키는 이미 하지메로부터 떨어트릴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버림받은 기분의 타치바나가 우연히 만난 것은 카미조 무츠키라는 이름의 고등학생. 밤중에 방황하는 버릇을 가진 그를 켄자키는 긴말없이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타치바나는 그에게 마음이 동해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무츠키는 타치바나의 틈을 파고들듯이 그를 더 깊게 끌어당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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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1

무슨 글을 영어로 써놨는데

AO3에 올리기엔 영어를 너무 못해서 여기다 올림;


T/W: Gang violence, swearing


Team Gaim



 “The fellas out there think we’re crap. They think we’re society’s trash. What’s worse is that some of us Beat Riders are actually crap. Talk about fuckin’ reputation… but bottom line―we’re not gonna be that. We, Team Gaim ain’t gonna be no piece of shit. We’re here to dance, and when we fight, we fight to protect our stage.”


‘What’s worse is that some of us Beat Riders are actually crap,’ Mitsuzane suddenly remembers his team leader’s words. Actual crap. That was what was in front of him now. Mitsuzane doesn’t understand how a person can be made of just violence and arrogance, but what he does understand is that his opponent would cut him into ribbons without hesitation if he couldn’t get out of this.

 Mitsuzane makes a bet that even a creature of pure ignorance would understand fear.

 “Mister, do you see me? Not only do I look little, I am actually quite young, and in other words I am a legal minor. You must be aware what happens when you’re caught abusing a minor? And you’re not gonna get away from this either, ‘cause I know who you are. I know exactly who you are. I’m sure you aren’t willing to bust me when your whole life ahead of you is at stake, are you?” Mitsuzane tries to sound calm, sound smart, sound like he knows what he’s talking about. He tries to sound like he’s going to university―which he will, too.

 And then the Red Hot idiot starts to laugh, and Mitsuzane knows things have went wrong. The Red Hot keeps laughing and laughing, as if Mitsuzane said something hillarious. At last Mitsuzane can’t stand it: “What’s so funny?”

 “Minor? You say you’re a fuckin’ what? A fuckin’ minor? You think any of us give a fuck? You think you’re a minor―you think you’re a fuckin’ child. But you know who else is a fuckin’ child? Beat Riders! Every single one! You don’t become one if you ain’t a fuckin’ kid! Face it, you’re a Beat Rider because you’re a fuckin’ kid, and you know kids ain’t scared of busting another kid.”


 “Mitchey!”

 The moment Mitsuzane heard the voice, he realized he was saved. It was like a moment of baptization, when one realizes Christ’s love for them or something. The feeling that resonated within the heart the moment Mitsuzane heard the voice, the moment he saw the well-known figure storming into the alley.

 “Kouta-san…!”

 “Now who the fuck is this? A watchdog?” The Red Hot still got his attitude, and he’s still confident he can beat the hell out of Gaim with his slightly crazed up eyes and his other Red Hot friends. But Mitsuzane is no longer afraid. He’s got Kouta, and Kouta means victory. In physical rumbles at least, where humans fight humans and no Inves is related, that was how things worked.

 “Well, I guess that could be sorta true,” Kouta laughed a half-hearted laugh. Not even a bit nervous. And Kouta’s laugh is different from the Red Hot’s. It’s the kind of laugh that warms hearts, makes people smile and sometimes cry at the same time. “I’m not really a dancer anymore, and so I guess I’m sort of only a half-Gaim.”

 Kouta pauses his words to help Mitsuzane get up. Mitsuzane takes Kouta’s hand, and it’s warm.

 “You see, although I don’t dance anymore I’m still in shape ‘cause I work a lot,” Kouta states, calmly. “And I think that means you don’t really wanna mess with me.”

 The Red Hot snorts out a scornful laugh, and then it’s a fight.

 Kouta never really lost one of those.


 Kouta brings Mitsuzane back to the garage, and Mitsuzane feels truly home. And then Mitsuzane is suddenly honest. He starts to cry and he can’t stop it, so instead he grabs onto Kouta as he lets the hot tears run down his cheeks. Mitsuzane sniffs and Kouta smiles, and he gives his Mitchey a light but warm hug.

 “Kouta-san, I-I thought I’d be busted. Shit, I was so scared,” Mitsuzane rambles as he grips on Kouta’s jacket, “I was so scared.” The poor boy is shaking, so Kouta pats him on the back. “F-fuck… Oh, fuck… I-I’m sorry I m-made you worry… I fucking… I fucked up so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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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5

도쿄 뮤우뮤우

트리거워닝: 성희롱, 강간미수, 여성 캐릭터를 향한 강간모의 등등.... 여성혐오 주의


  킷슈는 오른팔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팔에 묻어있던 피가 이마에 옮겨 붙는다. 붉은 천을 감은 탓에 눈에 띄지 않던 색이 흰 피부 위에서는 아주 선명해진다. 킷슈가 짙게 웃었다. 금색 눈에 어두운 쾌감이 어려있었다. 발치에 걸리는 것은 걷어차버린다. 살과 뼈의 무게가 발에 채인다. 또 한 명의 인간이 달려든다. 그가 채 닿기 전에 먼저 명치에 팔꿈치를 가격한다. 그가 배를 움켜잡고 멈칫한다. 기습 작전이라도 되는지 등 뒤에서 어슬렁대는 남자를 코웃음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나서 정면의 머리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그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방금 넘어뜨린 것이 꾸물거리며 일어날 기색을 보이기에 목을 콱 밟았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고 움직임이 멎었다. 아마 죽어버릴 것 같다.


 “아아, 딸기 색이 잔뜩 묻어버렸네.”


 세 구의 몸통이 널브러진 바닥 한가운데에 선 킷슈가 베시시 웃었다. 역시 일반 인간은 연약하고도 연약하고 시시하구나. 무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다. 짐승 같이! 아아 인간들은 정말 짐승 같았다. 여러 의미로.


 그러니까, 킷슈는 어둠을 만끽하며 신주쿠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킷슈는 도쿄의 밤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으슥한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밤 공기를 들이마시던 중 남자 셋이 접근해왓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건들건들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도 킷슈는 아무 말 않고 어떻게 될지 관찰해보기로 했다. 이쁘장하게 생겼네, 꼬마. 킷슈에게 전혀 기쁜 말은 아니었지만 한낱 인간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피부도 하얗고, 흐흐. 코스프레니? 옷이 너무 야하다. 하아, 흥분할 것 같아. (불쾌지수가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일 예쁜 데는 다 가리고 있네. 그렇게 지껄이며 그가 킷슈의 윗옷 안에 손을 집어넣으려고 하던 순간 킷슈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순진함 연약함 가련함을 연기하던 얼굴에 잔혹한 장난기가 번졌다. 그렇게 그날 밤 킷슈는 남자 셋을 짓뭉갰다. 정말, 이래서야 인간이 아니라 돼지 같잖아. 몸의 욕망에 휘둘리는 아이들.


 하지만 그것은 자신도 곧 마찬가지라는 것을 킷슈는 안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가 너무나도 달기 때문이다. 더 죽여버리고 싶다고, 몸이 소리친다. 그리고. 이치고, 이치고. 모모미야 이치고. 모모미야 이치고의 피에 취해보고 싶다. 이런 잡인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단맛이겠지. 그것이야말로 신의 음료 암리타. 아니면 이치고를 다른 것으로 붉게 물들인다면. 빨간 입술에 입을 맞추고 더 아래의 붉은 살에도 입을 대어 얼굴까지 붉음이 오르게 하고 싶었다. 겨우 몸의 욕망에. 킷슈 역시.


 그러나 모모미야 이치고는 킷슈에게 무엇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강제로 취하며 킷슈는 빼앗을수록 잃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모모미야 이치고는 아오야마 마사야를 사랑한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떠올리자 밤하늘은 검정에서 짙은 파랑으로 색을 바꾸었다. 무거운 파랑이 내려서 킷슈의 가느다란 몸을 짓눌렀다. 이제 흥분은 온데간데 없고 진득한 우울이 기어올라온다. 말라붙은 피처럼. 그 아래에서 호흡할 수 없는 피부.

2016. 3. 24

콥스파티.

제목 및 인용은 Nirvana - Heart-Shaped Box





내가 약할 때 그녀는 파이시스처럼 나를 본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저해상도의 스즈모토 마유를 바라본다. 마유의 사진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폰카로 사진을 찍는 것이 습관이다. 다양한 것을 찍지만 대표적인 피사체가 스즈모토 마유다. 중학교 시절부터의 그녀의 성장이 하나의 폴더에 차곡차곡 사진으로 저장되어있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그녀의 다양한 미소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이 있다. 천 개의 미소, 우주 유일의 태양. 당장이라도 머리가 이상해져버릴 것 같은 이공간 텐진초등학교에서 그 곧은 눈빛이 모리시게의 등을 떠민다. 나를 찾으라고 주시하는 눈빛. 시간이 지날수록 질책이 되는 눈빛. 언제까지고 마유를 혼자 둘거야?


그래서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마유의 화면을 덮어씌울 새로운 사진을 찍는다. 선혈의 사진을 찍는다. 뭉개진 유해, 흩어진 장기를 찍는다. 찍으면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낀다. 희열과 거의 동시에 죄책감이 올라온다.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운명처럼 벨소리가 울린다. OS가 고장났나? 중얼거리면서도 숙명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있었다.


보지 마.


보지 마.


마유의 내장 보지 말아줘.


마유로부터의 마지막 전언.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웃고 울었다. 끝까지 핸드폰으로 들여다보았던 건 마유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야 저해상도의 화면을 뛰어넘어, 차원도 뛰어넘어 마유에게 닿을 때가 되었다. 휴대폰 액정 같은 유리창을 부순다. 어깨에 파편이 박히며 모리시게 사쿠타로는 생각했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스즈모토 마유의 조언에 빚지는 삶이었다고.


―영원히 그대의 조언 덕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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