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3


0.

 처음 대면한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또한 너무나 가엾은 사람이어서, 애초에 가졌던 복수라는 숭고한 명제는 그를 만난 순간 순식간에 찢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지니스가 쿠발을 들여다볼 때, 쿠발도 지니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롱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데도 심연 같은, 텅 빈 전구 같은 눈. 조금 벌어진 입속이 적막한 우주처럼 새카맣다. 애초에 정의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적은 없는 쿠발이었지만 그런 그를 해치는 일이야말로 저지를 수 없는 불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실없는 생각이었다고 잔을 흔들며 쿠발은 재고한다.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이는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강한 오너, 지니스 님이셨다. 그 무엇도 그를 상처입힐 수 없었다. 지니스의 입맛에 맞춘 와인은 절묘하게 자극적인 맛이었다. 한 입 삼키자 새콤한 것이 목을 태우듯이 화끈거리며 넘어갔다. 향긋한 여운이 남는 깊은 맛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턱을 괴고 앉아있는 지니스와, 성을 내며 게임을 진행하고 있는 아잘드―'무뇌아.'―를 순서대로 돌아본다. 돌아갈 별도 달성할 복수도 없는 오직 드넓은 우주 속에 떨어져 게임 밖에는 할 일도 없는 것이다. 사지다리아크의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Strongly Magnetic

 [동물전대 쥬오우쟈]

 [아잘드*쿠발*지니스]


1.

 인간의 번식수단이란 제법 재미있는 것 같더군, 오너.

 호오.

 단단하게 뻗은 아잘드의 두껍고 각진 팔이 벽과 그의 몸 사이의 좁은 거리에 지니스를 가두었다. 다소 고압적으로 몸을 밀착시켰기는 자세를 취했기에, 아잘드는 지니스를―드물게도―조금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때 늘 그렇듯, 눈동자 안쪽에서 고요히 소용돌이치는 미량의 흥분이 담긴 시선이 아잘드를 올려다보았다. 잔에 든 물을 젓듯이, 그러나 물이 넘치는 일은 결코 없듯이.

 "이건 무슨 의미지?"

 "글쎄."

 지니스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잘드는 고개를 들이밀며 입을 맞췄다. 오너의 입술은 생각외로 부드러웠다. 지니스는 금색 눈을 빛내며 아잘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잘드는 입을 조금 벌리고 혀를 내밀어 먼저 지니스의 입술을 핥았다. 이윽고 아잘드의 혀가 접어든 지니스의 구내는 무중력의 우주는 아니었다. 혀에 혀를 부딪쳐가며 가능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아잘드의 입이 지니스의 입술에서 옆 목으로 내려왔다. 이로 가볍게 물고 피부를 빨아들였다. 하아, 지니스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처음 경험하는 신체 반응에, 스스로 의아했다.

 "……재밌군."

 "동감이야."

 지니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잘드가 뿌듯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 아잘드가 몸을 쓰는 일이라면 못 하는 건 없지. 자신감 넘치는 아잘드가 목에서 가슴으로 진행해 내려갔다. 아잘드가 물고 핥는 작업에 열중하는 동시에 지니스는 몸 안에서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감지하며 조금 들썩였다. 이윽고 아잘드는 지니스의 허리를 안고 몇 겹의 갑옷 같은 매끄러운 복부 아래로 내려갔다.

― 흐읏

 아잘드가 금빛 코어를 가볍게 물자, 반사적으로 고개가 확 들어 올려지며 신음을 억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차오른 숨이 가쁘게 빠져나왔다. 아잘드는 순간 오너의 광채가 어두워졌다고 확신했다. 지니스의 눈은 보일듯 말듯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튼 아잘드는 오너의 숨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기분 좋아, 오너?"

 말하며, 같은 곳을 다시 핥았다. 지니스는 대답 대신 신음을 뱉었다.


2.

 쿠발의 둥그런 뒷모습.

 성큼성큼 다섯 보를 걸어, 둥그런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뭐 하고 있어, 쿠발."

 쿠발은 크게 당황하며 뒤돌아보았다. 아잘드는 파란 잇몸을 전부 드러내며 무해하게 웃었다. 쿠발의 머리의 불빛이 깜빡깜빡하며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별로, 아무것도."

 "그럼 마시자."

 한쪽 팔을 들어올려 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쿠발은 한숨을 쉬었다.

 "무식하게 들이붓기만 하는 당신과는 마시고 싶지 않군요."

 "재미없게 굴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쿠발은 아주 기본적인 면부터 시작해서 아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잘드는 털썩하고 쿠발의 곁에 주저앉았다. 창문 바깥에서 별이 떨어졌다. 누구도 소원은 빌지 않았다. 그저 쿠발은 옆에 앉은 아잘드를 쳐다보며 이 불편한 남자가 빨리 자리를 떴으면 하고 바랐다. 불편한 남자―아잘드가 지니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스가리안은 없었다. 쿠발은 그런 면까지 아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마시러 가지 않는 겁니까."

 "네가 안 마신다며."

 "저는 안 마십니다. 가서 혼자 마셔요."

 "네가 안 놀아주면 심심하단 말이야."

 쿠발의 얼굴의 불빛이 일순 번뜩였다. 사자다리아크의 놈들이란. 아잘드는 같은 데스가리안인 자신마저 일개 놀잇감 취급인 것이다. 뇌 없는 아잘드에게마저 그런 취급이라니. 쿠발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표정을 정상화시켰다.

 "장난감은 하등생물 사이에서 찾으시지요."

 "헹, 네가 아는 재미란 고작 그런 게 전부인가보군."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쿠발이 맞받아쳤다.

 "게임도 형편없게 하면서 시시하게 술이나 드는 주제에."

 호오, 그렇게 생각해? 아잘드가 자리에서 일어서 무릎을 털었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아는 '즐거움'이 있거든."


3.

 여왕 거미처럼 아잘드 위에 거대하게 퍼진 지니스가 연인의 거친 뺨을 쓰다듬었다. 검지부터 한 손가락씩 서서히 닿는, 느릿한 몸짓이다. 그가 늘 아잘드를 애태우는 방식이었다.

 "아잘드."

 "으응?"

 아잘드는 잠긴 목소리이다. 지니스가 후후후, 낮게 웃었다.

 "둘이서 하는 게임도 좋지만……"―아잘드의 가슴께에서 반복적으로 원을 그리며 자극했다―"나는 또 한 명, 플레이어를 추가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으으음……, 그것도 재밌겠군."

 "쿠발에게, 네가 말해주지 않으련?"

 "하아……?"

 고개를 숙여 목에 키스를 심으며 말했다.

 "부탁이란다, 아잘드."


4.

 '하등생물의 번식 따위를 흉내 내다니 저급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로군요, 아잘드.'


 아잘드는 쿠발의 대사를 떠올리며 웃고 있다. 쿠발은 뻣뻣하게 앉은 채 숨도 쉬지 않고 자신과 오너를 지켜보고 있다. 아잘드의 목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그의 입술을 핥는 지니스―쿠발은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과부하를 걱정한다. 게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자극. 혀와 혀가 닿고 하반신이 점점 밀착해가며 천천히 움직인다. 일련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도 왠지 뱃속이, 그보다 더 아래가 끔찍하게 낯설고 자극적인 느낌에 휩싸였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다.

 아잘드는 다리 사이를 감싸오는 지니스의 손길을 온 신경으로 느끼며 시선을 살짝 쿠발에게로 흘렸다. 뇌쇄적인 눈빛에 쿠발은 어찌할 수도 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어지러웠다.

 "쿠발이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든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다. 지니스의 목소리이다. 쿠발은 두 명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제안은 생각해보았니?"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는.

 쿠발은 떨리기 직전인 두 다리로 지니스와 아잘드에게 다가갔다.


5.

 "이 별의 자연을 들여다본 적은 있니?"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지니스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늘 들여다보는 인간이 아닌, 자연 말이야. 작은 하늘, 흐릿한 물, 소동물, 곤충..."

 "이번엔 갑자기 또 무슨 얘기야, 오너?"

 "나는 잠시 숲을 본 적이 있단다.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벌레들이 수없이 움직이고 있더구나."

 "벌레 사냥이라도 할 생각이야?"

 "설마. 데스 게임은 사람을 사냥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란다. 왜인 줄 아니?"

 아잘드가 오너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말해봐, 오너."

 "자연은 이미 잔혹하기 때문이란다. 단체單體가 죽어도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지..."

 '단체가 죽어도.' 문득 자신의 다리 아래에서 웃고 있는 지니스도 그 위에 올라앉은 자신도 그사이의 어딘가에서 행복해 보이는 아잘드도 혐오스럽게 느껴져, 쿠발은 숨을 골랐다. 속으로 숫자를 센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러나 세는 숫자마다 지니스가 자신을 눈짓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별의 숲에서도 봤단다―작은 녹색 벌레가 말이지, 교미가 끝나곤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모습을. 자연은 잔혹하단다."


6.

 반그레이의 제안을 받아들인 날, 악수하던 손에서 쿠발은 낯선 체온을 느꼈다. 반그레이의 손은 그간의 망각을 벌하듯이 따끔하게 뜨거웠다. 오래된 고향의 사람들도, 함께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과열 직전까지 달아오른 자신도 가진 적 없는 외계적인 온도였다. 어쩌면 쿠발은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를 안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체온에 오래 닿고 있으면 고장 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발을 돌려 다시 원수의 몸을 안을 일도 없을 것이라고, 반그레이의 뜨거운 손을 보며 생각했다. 그저 재미로 섞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결단의 때가 도래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생생했고 오랜만에 외로웠다. 갑자기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어졌지만 이제는 그 누구와도 몸을 섞지 않을 수 없었다.


7.

 오랜만에 잡는 손이었건만,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잘린 손에는 아무런 온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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