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 19 ~ 2013. 3. 29) 

ㅡ A/N(작가의 말) : 일주일 쯤 전부터 구상해오던 초콜릿 소설입니다! 근 몇년만에 처음으로 써보는 연재작이라, 조금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부디 즐겨주세요!

 

소설의 세세한 설정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원래 리본의 세계관으로부터 패럴렐입니다! 마피아는 연관되지 않습니다. 배경이 이탈리아인 만큼 원작에서 일본에 사는 캐릭터들은 (마피아도 아니니) 등장이 없는… 게 아니라 어떤 구실을 달고 나오겠죠(..) 크롬은 이탈리아에서 무크로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마피아에 관련된 게 전혀 없는 관계로, 무크로는 인체실험을 당하지 않았고, 양 눈 모두 푸른색으로 묘사됩니다. 아르꼬발레노인 마몬 역시 운명의 날 같은 이벤트가 통째로 삭제되기 때문에 아기가 아닙니다.

 

무크롬 외에도 주로 환술사 중심으로 많은 커플링이 나올 예정입니다! 만, 이번 편에서는… 벨마몬 정도 나오려나요. 마몬은 여아입니다. 민감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잡설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거듭 말하지만, 부디 즐겨주세요! ㅡ

 

 

초콜릿 동호회

                              -The Chocolate Club-

     #1

 

 

 카페는 4층에 걸쳐 건물 전체에 자리잡고 있었다. 1층은 일반 손님을 접객하기 위한 장소이자 카운터가 있는 유일한 층이었다(카페는 웨이터를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손님이 직접 카운터로 내려와야 했다.). 2층부터는 일반 손님들의 접근이 금지되는 동호인들만의 공간이었다. 사실은 초콜릿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도, 윗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형식상의 가입을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입 그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 병원 진료서를 써내듯 A5 크기의 종이에 큰 활자로 쓰여진 많지 않은 양의 양식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 절차의 전부였다. 3층은 키즈 카페 - 어린이들의 천국 - 였다. 알록달록한 공기 공으로 채워진 바닥이며, 미니어처처럼 작은 놀이기구며 그야말로 어린이들을 위해 꾸며진 층이었다. 여기서 에로사항을 짚어낸다면, 카페에 어린이가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카페의 모든 메뉴는 어른들의 입맛에 맞추어진 고급스러운, 쓴 맛이 나는 초콜릿이었다. 어린이들에게 'Cafe Chocolatissimo(카페 쇼콜라티시모)'란 메뉴는 맛없기 그지없는, 그런데도 엄청나게 비싼, 그런 인상의 기피대상이었다. 4층은 곧 옥상을 일컬었다. 화려한 3층에 비해, 옥상은 제법 휑한 공간이었다. 원형 철제 테이블이 딱 하나 비치되어 있었고,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작은 계단도 딱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안전상의 문제를 고려한 울타리(철제)도 쳐져 있었다. 아주 높은 울타리는 아니었지만, 사고가 나는 일은 없었다.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옥상은 흡연 장소였기 때문에 부주의한 사고의 어린이가 오는 일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1층의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던 데에다, 2층부터 옥상까지야말로 카페의 진정한 편의시설(?)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카페 쇼콜라티시모의 초콜릿 동호회에 가입된 인원은 결코 적지 않았다. 로쿠도 무크로(강조하지만, 그는 이탈리아인이다 - 일본인이 아니다.) 역시 형식상으로나마 가입한 동호인의 하나였다. 주말의 카페 쇼콜라티시모는 평소의 두 배로 붐볐기 때문에 1층의 자리는 이미 꽉 찬 지가 오래였다. 그래서 2층까지 올라온 무크로(이름이 무크로이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어쩐지 읽는 순서도 일본식 순서였다.)였지만, 애석하게도, 특히나 붐비는 그 날의 2층마저 꽉꽉 차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가 돌아가려던 찰나, 그와 함께 온 여학생이 무크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자리라도 발견했나요, 크롬? 크롬이라 불린 여학생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가 빈 자리 - 비록 반쪽짜리였지만 - 를 가리켰다. 오야? 저 테이블엔 이미 사람이 있는데요? 무크로가 말하자, 크롬이 대답했다. 그래도…, 두 의자 비었는데…. 그녀의 얌전하지만 집요한 고집에 져버린 무크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쪽으로 가죠, 나의 귀여운 크롬.

 

 "저어, 여기 외에 자리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 쪽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무크로가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테이블의 맞은 편에 앉은 눈을 가린 금발은 또 그 옆에 앉은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마몬."

 

 소녀 - '마몬' - 가 대답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깐깐하게 군다고 해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말하며, 무크로가 앉았다. 그의 왼편에 가만히 서 있던 크롬도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동호회'라고 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지 않습니까."

 

 무크로가 물었다 - 고 하기보다, 말했다. 마몬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만약 그렇다면 실례겠지만, 어차피 당신도 딱히 동호 활동을 목표로 신청서를 작성한 건 아니겠지?"

 "아니오, 나도 딱히 동호회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1층의 자리가 가득 차서…, 가입을 한 것이 맞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어색하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당신 소속감이 강한 사람이네."

 

 마몬의 평에, 조금 놀란 듯이 무크로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그렇습니까."

 "이름이 뭐야?"

 "로쿠도 무크로, 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일본인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

 "아니오, 이탈리아인입니다. 댁의 이름은?"

 "마몬이라고 부르면 족해. 탐욕의 악마로부터 따온 이름이지."

 "자그마한 소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군요."

 

 무크로와 마몬의 대화를 그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금발이 '시시싯', 웃으며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내 생각에는 지독하게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마몬이 그에게 눈총을 주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벨페고르 - 나태의 악마의 이름이지. - 라고 부르면 되겠어. 애칭으로 '벨'이라고도 불리우지만, 처음 보는 천민에게 애칭으로 불리는 건 사양하겠다구."

 

 '벨페고르'의 말투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무크로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루시퍼(오만의 악마)가 아니라 벨페고르?"

 "스페르비(오만)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따로 있어. 굉장히 교만한 녀석이지."

 "그 호칭들은 어떠한 특정한 단체에서 부여받은 겁니까?"

 "뭐어, 그렇지."

 "재수없는 네이밍 센스라고 한 마디 해둬야겠군요."

 "시시싯."

 

 벨페고르의 인위적인 웃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단절났다. 지켜보기만 하는 것에 제법 지루해진 마몬은 크롬에게 말을 걸었다.

 

 "Good afternoon(굿 애프터눈; 좋은 오후), 거기 너."

 "앗…, …응……."

 "넌 이름이 뭐니?"

 "내 이름은 크롬. ……크롬 도쿠로…."

 "응, 응, 그래. 두 번씩 말 안 해도 알아먹어."

 

 마치 다른 나라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묘하게 답답한 대화였다. 그래서 곧 흥미를 잃은 마몬은 거기서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나서 테이블에서는 별 다른 대화 없이, 간간히 코코아를 홀짝이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크롬이 머그잔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해치우는 것을 기다리던 무크로는 그녀가 마침내 잔을 비우자 곧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아아, 그래. 자릿세 낼 생각 없으면 쓸데없는 감사치레 하지 말고 가라고, 가."

 "쿠후후, 저이의 말대로, '마몬'이라는 호칭이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너는."

 "흥."

 

 "다음 기회에 또 뵙기를."

 "……."

 

 무크로가 등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별 말은 없는 크롬이었지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의 의사를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마몬은 크롬에게 눈빛을 돌려주었고, 벨페고르는 말없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흔들기도 귀찮았나보다. 그의 이름, '벨페고르'의 의미를 무크로는 그제서야 약간이나마 이해한 느낌이었다.).


ㅡ A/N(작가의 말) : 기적적으로 둘째 편입니다! 백년만의 연재소설이라 이게 무사히 연재될지가 걱정이지만ㅠㅠ 일단 이걸 읽고 계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러저러한 사항은 1편때 전부 주의드려서 AN에 쓸게 없네요 ㅋㅋㅋ

 

 아, 맞다. 굳이 Good Afternoon이나 Good Morning 따위를 영어로 써놓고 괄호()를 쳐서 해석을 넣는 이유는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좋은 아침, 좋은 오후보다는 안녕하십니까, 같은 뉘앙스인데, 안녕하십니까는 또 아니고 해서..

 

 (전부 쓰고 나서) 이번 화는 굉장히 날림으로 쓴 느낌이네요ㅠㅠ 사실 이번 화에 묘사하고 싶었던 부분이 글로 풀 게 만만치 않은 부분이었어서…. 딱딱한 세계에서 서로의 세계에 접촉하기 시작하는 낯선 사람들, 이라는 느낌이에요! ㅡ

 

 

초콜릿 동호회

-The Chocolate Club-

#2

 

 

 "어이, 무크로."

 

 주말도 아니라 빈 자리가 넘쳐나는 평일 오전의 카페 쇼콜라티시모에서, 한번 잠시 만나고 말 줄로만 알았던 상대편으로부터 먼저 이름을 불린 것은 무크로에게 제법 의외의 일이였다.

 

 "마몬…과 벨페고르, 였던가요. Good morning(좋은 아침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무크로가 맞인사를 건넸고, 언제나처럼 그의 곁에서 크롬도 눈인사를 건네었다. 자연스럽게 마몬과 벨페고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둘에게, 마몬이 말했다.

 

 "누가 앉아도 된다고 했지?"

 

 무례한 지적에, 무크로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었다. 그러자 그를 붙잡으며 마몬이 말했다.

 

 "자릿세…는 주지 않을 것 같네. 뭐, 좋아. 어차피 당신이 간다고 해서 돈이 들어오는 게 아냐. 앉아도 좋아."

 "이제는 더 이상 너희들의 곁에 있고 싶지가 않군요."

 "그래? 그렇다면 우리도 굳이 당신을 붙잡고 싶지는 않아. 다만,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 크롬? 이쪽에 앉지 않을래? 나도 그쪽이랑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거든."

 

 지목받은 크롬이 움찔하며 시선을 무크로에게로 돌렸다. 어떻게 하죠, 무크로 님? 크롬이 시선을 보내왔지만, 무크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 무크로 님을 따라야 해요."

 "그건 어째서지? 응,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 벨, 이 녀석들, 붙잡을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 시시싯. 너희, 여기 조금 있다 가주지 않겠어? 동호인 사이인데  말이야."

 

 "…무크로 님."

 

 며칠 전 생각없이 꺼낸 말을 인용당한 무크로가 움찔했다. 그에게 있어 나머지 두 사람은 어찌되든 좋았지만, 크롬에게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며, 무크로가 말했다.

 

 "좋습니다."

 

 

 "남자랑은 연인 관계인가?"

 "아, 아니야…."

 

 마몬이 묻자 크롬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흐음, 그래? 잘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마몬이 되물었다. 그걸 보다 못한 무크로가 나서 크롬을 대신하여 말했다.

 

 "일단은…, 저로써 말하자면 보호자 같은 위치입니다."

 "당신, 보기 보다 나이가 많은 모양이지?"

 "아니오, 그녀와 나는 실제로 고작해야 두 살 정도의 차이입니다. 단지 금전이 부족하던 그녀를 일본으로부터 거두어와 동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호오, 그래서 결혼은 언젠데?"

 

 벨페고르의 '폭탄발언'에 나머지 세 명의 이목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경쾌한 퍽 소리와 함께 그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팔꿈치를 거두며 마몬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 너무 입을 함부러 놀리지 말도록 해."

 "으으…, 방금 거 아팠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데?"

 

 몸을 일으키며 볼멘소리로 벨이 따졌다.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마몬이 대답했다.

 

 "여자아이에게 결혼이란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함부로 소재로 삼아 놀리지 말도록 해."

 "역시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마몬."

 

 벨의 마지막 한 마디는 무시한 채 마몬이 소재를 돌렸다.

 

 "로쿠도 당신, 보기보다 상냥한 사람이네. 무보수로 딱한 처지의 사람을 거두어주다니 말이야. 아니면 혹시 크롬에게 연애감정이 있는걸까?"

 "앗, 그건…,"

 

 당황해 손사래치는 무크로에게 마몬이 웃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안 해도 되."

 "아."

 

 그렇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료를 빨아마시는 소리와 과자를 부수어 먹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피로한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는 무크로를 따라 크롬도 자리에서 일었고, 벨페고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재미있었어. 조만간 또 얘기하자."

 

 무크로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크롬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몬 역시 미소지었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미소지은 채 마몬이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마몬의 미소가 조금 씁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주저 없이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2014. 7. 4)


 두근, 두근, 두근.

 

 바쿠라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서 그의 맥박이 요동쳤다.

 

 두근, 두근, 두근.

 


 "뼛속까지 날 이용했다고 생각했어? 유감이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용당한 건, 결국 너야.“

 

 두근, 두근, 두근 


 세상이 붉은 고통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감상하며,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Bakura Ryo x Yami Bakura

w. Runtz


 

 위태위태하게 아름다운 남자는 옥상 난간 위에서 휘청거렸다. 두근 두근,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리고 그가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침대 위에서 멀쩡히 눈을 떴다. 언제나 그랬듯, 지겹게도그가 천년 링을 째려보자, 기분 나쁠 정도로 그의 기분과 대조적인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하하하! 뭐야, 약해 빠진 숙주 같으니라고!”


 “말 걸지 말아줄래?”

 

 “어리광쟁이 주제에 차갑게 굴기는! 또 죽는 척을 해서까지 이 몸의 관심을 받고 싶었나?”

  

 “착각에도 정도가 있죠. 적당히 해.”


 “뭐야, 뭐야. 요즘 너 이상하게 차갑게 군다?”


 자신의 어둠의 인격의 말을 피식 웃어넘긴 바쿠라는 더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이젠 대답도 안 해주겠다는 거냐. 그렇게 중얼거린 것을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그 역시 대화를 그만두었다 -

  

 “네놈은 절대 죽을 수 없다.”


 - 고 바쿠라가 생각한 찰나, 그가 제멋대로 못박았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그 선언을 무시하지 못하고 바쿠라가 간결히 대꾸했다.

  

 “, 언젠간 큰코다칠거야.”

 

 “어이쿠, 그러겠죠.”

  

 거기서 그제서야 대화가 동결났다.

 

 


* * *

 

 


 “저기, 어느 옷이 어울릴까?”

  

 “하아, 그걸 나한테 물어?!”

 

 양 손에 한 개씩 옷걸이를 들곤 천연덕스레 물어오는 숙주가 기가 막혀숙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가 항의하듯 딴지를 걸었다. 그러면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숙주가 대답했다.

  

 “. 너는 무지무지 오래 살았을테니까, 그 만큼 많은 패션을 봐왔겠지. 많은 패션을 보아왔다면, 패션센스도 역시 좋지 않으려나?”

  

 “, 넌 뭘 입든 상관 없지 않나? 계집애처럼 이쁘장하게는 생겨먹어가지곤. 그래, 그 계집애 옷 같은 걸로 입어라. 그쪽이 어어울린다.

  

 “그래야겠다. 고마워. 이럴 때만 정말이지 도움 되는 애라니까.”

  

 변덕스럽구먼. 숙객이 중얼거렸다. 세 번째 잠옷 단추를 풀러내며 바쿠라가 웃었다. 무슨 놈이 말도 안 되게 매력있어가지곤. 미워해야 정상인 상대일 터.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가 아주 말도 안 되게 매력있었기 때문에.

  

 “역시 천년 링은 패션의 완성! 이랄까나, 역시 내다버리고 싶은 물건이지만.”

 

 “우와, 굉장한 폭언인데?”

  

 “저기, 너 슬슬 피곤하지 않니? 슬슬 수면시간 아냐?”

  

 “내가 깨어있고자 하기만 하면 그런 건 없어.”

  

 “안타까운 일이네.”

  

 바쿠라가 비이냥거리길 그만두고 구겨신은 운동화를 고쳐신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현관문이 열리면서 달려있던 차임벨이 서로 부딪치며 우아한 소리를 내었다.

 

 


* * *

 

 


 크리스마스 저녁의 번화가는 북적거렸다. 인파에 섞인 많은 인구 중, 바쿠라 료도 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엔 항상 함께였던 친구들은 어저께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미 만나두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홀로 걷던 그였다. 사람들은 곧잘 수려한 생김새의 그를 흘깃흘깃 쳐다보기도 했지만, 거대한 유동인구는 빛나는 그의 존재감조차도 묻어버렸다.


SWEETS

  

 바닥에 쌓인 눈, 아니면 걸음을 멈추는 그 본인과 깔맞춤하듯 하얀 간판 앞에서 바쿠라가 멈추어섰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달콤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간판이 설명한 그대로 스위츠  달콤한 것들이 가득한 가게이다. 쓸쓸하던 표정의 바쿠라가 금세 미소지었다.


 “맛있겠다.”

  

 쟁반에 슈크림을 얹으며 바쿠라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또 하나의) 그가 대답했다.

  

 “또 그거냐. 맛도 없는 게 지지리도 달기만 하던데.”

  

 “맛있어. 피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뜯어먹고 앉아있는 네 입맛이 이상한 거 아냐?”

  

 스스로와 말을 주고받는 바쿠라에게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밖에서 보기엔 아무래도 괴상한 언행이 사랑스러운 미모와 겹쳐져 더욱 그런 것이리라. 바쿠라는 가볍게 그것들을 떨쳐버리곤 쟁반을 카운터에 가져갔다.

  

 “슈크림 두 개, 와플 두 개, 마카롱 하나……. 1050엔입니다! 드시고 가세요?”

 

 “.”

  

 잔돈을 찾아 지갑을 뒤적거리는 바쿠라는, 언뜻 보기에 행복해 보였다.

  

 “여기요, 1050.”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층에 자리 없으시면 2층도 이용가능하세요.

  

 “, . 고맙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묘한 어감이라고 생각하며 바쿠라가 척 봐도 자리가 찬 1층 홀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싹싹한 녀석이로구만.”

 

 “카운터의 여자 아이?”

  

 “아니, 네놈.”

  

 역시나 꽂히는 시선과 대답의 필요성의 무게를 비교한 바쿠라는 대화를 끊고 창가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맛있냐?”

  

 “.”

  

 두 번째 인격이 말을 걸어왔지만, 슈크림을 우물거리는 바쿠라의 반응은 무시일색이었다.

  

 “어이, 정말로 대답 안 해줄 작정이냐?”


 “.”

  

 “재미없게시리 말이야. , 자러 간다.”

  

 두근, 두근, 두근.

 

 “.”

 바쿠라가 틈을 놓치지 않고 불현듯 나이프를 쥐어들었다. 무게를 실어 나이프를 다른 쪽 손목을 향해 내리찍으려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숙주 놈이 죽어버릴까봐 눈 좀 붙이기도 힘들다니까.”


바쿠라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 * *

 

 


 두근, 두근, 두근.

  

 바쿠라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서 그의 맥박이 요동쳤다.

  

 두근, 두근, 두근.

  

 "으윽."

  

 또 하나의 인격을 밀어내느라 잠시 역겨워하던 바쿠라가 이내 냉소지었다. 힘겹게 큰 숨을 들이키고, 그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둠 인격아, 들리니? 마지막으로 너와 대화하고 싶은데.“

  

 우습다는 듯, 비웃으며 또 하나의 그는 대답했다.

  

 “? 마지막? 웃기지 마라.”


 그러나 몸의 주도권을 지킨 채 바쿠라가 말했다.

  

 "어머, 인격을 바꾸시게? 내가 죽는 게 아니꼽니? 어차피 네게 난 어찌되어도 좋은 존재잖아? , 역시 생존을 위해 숙주가 

필요하겠구나. 그런데 잊지 말아줬음 해 - 내가 주인격이고,  숙객일 뿐이야. 넘겨주기 싫으면 내 몸은 내 거야. 찌그러져 있으란 말야.“

  

 신랄한 연설은 계속되었다.

  

 “그거 알고 있니? 넌 이용가치가 다 해서 죽는거야. 혹시 지금 귀를 의심하고 있다면 맞게 들은 게 맞아. 넌 이용가치가 다 해서 죽은거야.

  

 이제와서 웃기겠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있어 행복했어.

  

 난 내가 너무나도 무가치했어. 의미 없는 나날이었어. 당장 죽어버려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 인류의 낭비, 쓰레기였다고!

  

 그런데 널 만난거야. , 나를 이용하고 유린했지. 내 동료들이 상처입어 가는 건 결코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거랑은 또 별개로 네가 있어 기뻤어. 너는, 내게, 존재의의를 줬어.

  

 , 그런 바보 같은 자기만족도 이젠 필요없으니 죽어버리겠어. 너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뼛속까지 날 이용했다고 생각했어?유감이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용당한 건, 결국 너야."

  

 바쿠라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던 손을 내렸다. 곱게 웃으며, 그가 스스로와 또 하나의 스스로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널 위해 한 가지 해줄게.

  

 어떻게 죽는 내가 보고 싶니? 말해봐, 얼른. 원하는 대로 해줄게. 뭐든 말이야. 유명한 자살, 1974년의 드릴 자살이나 1983년의 냉장고 자살 같은 것도 있었지."

  

 두근, 두근, 두근.

  

 대답을 기다리며 설레였다.

  

 “어이!”

  

 조금의 정적이 흐르니 그제서야 어둠의 인격이 말하기 시작했다. 바쿠라는 화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만둬라. 죽기 직전에 질질 짜봐야 되돌릴 수 없게 된다고! 생각을 좀 해 보란 말야!”

  

 "뭐야. 이제와서 상냥한 상식인인 척 해도 말이지, 이미 넌 스스로가 어떤 놈인지 증명했다고? 그런 거,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만 토해내는 위선이잖아? 안 속아. 날 어떤 식으로 죽이고 싶어, 그리고 어떤 식으로 넌 죽고 싶니. 그걸 대답하라고.“

  

 바쿠라(숙객)이 고민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는 대답했고, 걸린 시간에 비해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음에도 바쿠

(숙주)는 수긍해주기로 했다.

  

 “집행유예. 애원하마. 내 평생의 부탁이다.”

  

 “좋아.”

 

 


* * *

 

 


 “천년 링?”

  

 바쿠라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비었다. 상쾌한 공기가 맨살에 닿고 있었다. 가벼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없었다.


 “그랬었던가.”

  

 바쿠라는 석판에 끼워지던 천년 아이템들, 천년 링을 기억했다. 무너져내리던 신전을 기억했다. 이별한 것인가. 또 하나의 유우기와, 또 하나의 나와, 고대의 영혼들과. 성가셨던 그는 이제 없다.


 두근, 두근, 두근.

  

 바쿠라가 웃었다. 완벽한 기쁨으로부터의 웃음이었다. 슬프리만치 자연스러웠던 이해나 행복의 부재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전혀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현세에는 더 이상 자신을 붙들어둘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그리운 얼굴들은 전부 명계에 모인 것이다. 남은 과제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간단했다. 망설일 필요 없이, 이제 명계로 건너가면 된다.

  

 선혈을 두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너와 재회할게.

  

 두근, 두근, 두근.

  

 바쿠라가 선반에서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꺼내었다. 공항에서 아버지가 사다주신 물건이었다. 순수하게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 바쿠라는 더 이상 구애받지 않았다. 바쿠라가 오덕五德 나이프의 메인 기능이기도 한 칼을 꺼내어 가볍게 자신의 목의 경동맥을 그었다. 세상이 붉은 고통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감상하며,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2014. 9. 21)

 나의 시간은 흐르고 있는걸까

 

 

 나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혹은 멈추어 있다. 혹은 거꾸로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

 내가 n년 전의 마사고 코우키와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렇지, 코링크?)

 나 마사고 코우키가 n년 전의 마사고 코우키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렇지, 히카리?)

 

 

 시간의 신 디아루가의 주인이기도 한 후타바 히카리는 나의 시간을 뒤흔든다.

 

 

 "나는 예전의 코우키가 더 좋았어."

 

 "예전의 코우키든, 지금의 코우키든, 코우키는 코우키야!"

 

 "코우키는 옛날에는 특별한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코우키에겐 지금이 더 행복해보여!"

 

 "예전의 코우키"

 "지금의 코우키"

 "같은 코우키"

 "코우키"

 코우키

 

 히카리

 

 "철 없던 꼬맹이가"

 

 나나미카도 박사

 

 "코우키는 옛날에 그런 짓도 했었지"

 

 쥰

 

 "코우키"

 "코우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 시간의 마사고 코우키는 나일까. 아니면.

 히카리는 그를 마사고 코우키로 취급하는가. 히카리는 무엇을 마사고 코우키라고 부르는가.

 

 후타바 히카리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마사고 코우키였을 터인 2006년 가을 무렵의 그는 어째서 나보다 사랑받는가.

 

 

 "너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

 "예전의 코우키는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지."

 "나는 예전의 코우키가 더 좋았어."

 "예전의 코우키는 좀 더 어른스럽고 지적인 느낌이었는걸."

 

 

 "옛날에 코우키는 그런 짓도 했었지."

 

 "철 없던 꼬맹이가"

 

 

 "나는 예전의 코우키가 더 좋았어."

 "예전의 코우키든, 지금의 코우키든, 코우키는 코우키야!"

 

 

 

-

 

 

 

 사이코 얀데레 코우키도 좋다고 생각한다. DP를 깨던 시절엔 내가 10살보다 어렸던 탓에 깨닫지 못했지만 10살에 나나미카도의 조수라니... 아... 어... 물론 말만 조수일수도 있겠지만서도. 코우키한테는 천재라는 이미지가 어울린다. 그리고 천재니까 사이코 얀데레. "신오 트리오"의 한 축이면서도 쥰과 히카리의 연대에 비해 어딘가 뒤떨어진 그런 느낌, 열등감이라거나, 소외감이라거나, 그런 것도 좋다고 생각함.

 

 나의 코우히카를 정의하다.

(2013. 6. 21)

"유우기~!"
"안즈."

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결코 내가 바랬던 시선으로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스스로를 속인다. 환상적이리만치 소설 같은 상황. 낭만적이다. 설령 보상받지 못하는 짝사랑이라 하더라도, 비극으로 똘똘 뭉친 전개라고 하더라도, 로맨틱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희망을 건다. 희망을 걸기 때문에…

"파트너…."
"응? 무슨 일 있어?"
"파트너,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정도는……. 게다가 난 곧…,"

…그렇기 때문에, 더욱 쓰디쓴. 그런 현실. 낭만적이지 않다. 혹은 씁쓸한 부분조차 너무나도 낭만적이게 비극적이어서…. 생각과 생각이 겹쳐 모순이 생겨나지만 어찌할 방도도 없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다. 오오, 고귀한 나의 왕님이여.

"유우기는 당신이 고민하는 건 원하지 않을거야, 분명. 그러니까 기운 내, 유우…, 으음…."
"아아, 그것도 그렇군. 고맙다, 안즈."
"그보다, 뭘 할까? 난 당신이 부담스럽지 않은 걸로 좋으니까! 기껏 유우기가 시간을 내 줬으니까, 그냥 보내기에도 미안한 거 아냐?"

아냐, 틀려. 거짓말이다.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나를 좋아하듯이, 나는 당신을….

"앗…,"
"또 카드샵에라도 갈까? 유우기는 카드를 볼 때 가장 즐거워 보이니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그래."

-당신이 나를 안아줄 수 있는 곳.

(2013. 6. 20)

 전부, 그래,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 고 세토는 생각했다.


 과거를 파괴했다. 수많은 전장에서 싸워 이겼다. 수많은 적을 짓밟았다. 수없이 여러 번 우월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왠지모를 갈증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를 - 무토 유우기를 - 만났다. 싸웠다. 패배했다. 투지를 불태웠다. 부수었던 과거를 몇 조각 다시 주워들어보았다. 그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없다. 하하하, 세토가 낮게 웃었다. 덧없는 실소였다. 그가 사라지고 잊고 있었던 갈증에 대해 기억해냈다. 주워들어 미래와 나란히 두고 숭배한 과거는 다시 날카롭게 날을 세워 날아들었다. 그래,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실로 그의 존재로써 해결 된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부질없었다. 솔직히, 그가 그립기도 했다. 어둠 - 아니, 어둠보다 괴로운 공허 - 무. 빛도, 어둠도, 그 중간조차 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존재하지 않음 - 을 잊게 해준 그가. 하지만 그 훨씬 이상으로... 부질없었다. 색안경 - 이라고 하기보단, 좀 더 외설적이지만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콩깍지 - 을 씌여 맛본 행복은 너무나도 거짓되고 일시적이었다. 거짓됨 -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참이든 거짓이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오, 그 일시성! 그 거짓행복은, 금세 이렇게, 맥없이, 실체를 드러내었다. 영원히 계속될 듯한 공허일 뿐인 그 실체를.


 길 자체를 잘못 들었었다. 목적 자체를 잘못 잡았었다. 잘못 해메어 들어온 거리, 거기서 목표로 해 찾아해메었던 것. 무엇? 자신의 잘못된 곳을 꿰뚫어 보아, 그걸 고쳐 줄 애정어린 사람. 무토 유우기. 애초부터 그런 건, 그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고 삽질 끝에 찾아낸 뒤에야 깨달았다. 그걸, 그를 찾아 해메인 거리. 잘못 흘러들어온 거리. 이것도 듀얼 디스크로 실체화시킬 수 있다면, 「WRONG WAY」라고 시뻘건 대문자로 확실히 박힌 표지판을 장착해둬도 좋겠지. ...부질없는 공상이었다.


 "...님! 형님!"
 "아아, 불렀나?"


 곤히 생각에 잠겨있던 세토가 언제인지 방에 들어온 동생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응, 세 번!"
 "미안하다."


 "사과하지 말아요!"
 "그래서, 무슨 일로 불렀지?"


 "유우기가 왔어!"


 유우기인가. 유쾌하지 못한 이름의 어감에, 세토가 인상을 구겼다.


 "괜찮아요, 형님?"


 모쿠바가 걱정스레 묻자, 세토는 애써 평정을 되찾은 얼굴을 하곤 대답해주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아까부터 걱정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군."
 "괜찮대두...!"


 "유우기인가, 들여와라."
 "예!"


 기쁜 듯, 모쿠바가 촐싹거리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잠시지만 다시 혼자 남겨진 세토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유우기. 그 녀석이 무슨 일로? 보나마나 또 하찮고 시시한 일일 것이 뻔하지.



*  *  *



 "...그러니까 카이바 군, 협력해줘!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내겐 의미 없다."


 나지막히 대답한 세토가 예전의 자신에 비하면 너무나도 상냥한 어조였음을 깨달았다. 아득히 머나먼 예전의 자신은 어떠했던가. 쏘아붙였을 테지. 교양없이 큰 소리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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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1)

 현재진행형으로, 나는 너를 위해 울어줄 수 있을까.


 어렵고 중요하지만 도태된 질문이야. 나는 너로 인해 수억번은 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너로 인해가 아닌 너를 위해 운 적이 있나? 2.지금은 둘 중 한쪽이라도 가능한가.


 전자는 없지 싶다. 언제나 도태되는 것은 나였고, 폭풍을 걷고 나아가는 것은 너였다. 너는 결코 도태되는 법이 없었다.


 후자는 어떨까. 너는 수천만번 암묵적으로 나를 기만했다. 그런 비틀린 관계선상에 있는 우리들은 더 이상 서로를 위해 울 수는 없겠지. 너로 인해 눈물을 떨구느냐. 나는 도태되는 성질을 타고나긴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도태될 리는 없겠지.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은 마치 너와 함께 싫어했던 음악을 이제와서 마음에 들어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서 역시나 도태된 애칭을 치웠고, 그리고...


 그럼에도 지금 묘하게 슬픈 것은, 미련이 엉겨붙기 때문인가.


 2012.9.26


 마사고 타운에서 그대의 벗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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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23)

 마키시마가 상체를 일으켰다. 오밤중이었다. 또, 그는 잠들 수 없었다 - 그는 잠이 특히나 적은 편이었다. 푸른 달빛 한 줄기가 창틀 사이로 방에 스며들었다. 마키시마의 순수하게 새하얀 머리칼이 푸른끼 도는 은색으로 빛났다. 그의 눈은 되려 녹색빛 - 그만의 금빛이 달빛 푸른색과 섞인 색 - 으로 빛났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 어쩌면, 언제나보다도 더 - 아름다웠다.

 

 최구성이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당장 뽑아버려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을 - 인공적인 - 가느다란 두 눈을 감고 평화로이 잠들어 있었다.

 

 최구성을 내려다보며, 마키시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이 잠든 그는 정말 순수하고 상냥해 보였다. 그리고 그 두 눈을 뜨면, 그는 무시무시하고 평범한 기만자가 되는 것이었다. 마키시마는 더 이상 그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최구성)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찌되었든 마키시마는 그를 좋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최구성을 그렇게 지어낸 사람인 다름아닌 마키시마 본인이었다. 그걸 두고 그를 탓하거나 증오한다면 매우 우스울 것이다.

 

 최구성 뿐만이 아니었다 - 모든 것이 그랬다. 모든 일의 시초는, 마키시마 자신이었다. 아아, 빌어먹을 시빌라 시스템. 하지만 그가 면죄체질자로 태어난 것은 시빌라 시스템의 계락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필연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면죄체질을 먼저 책망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따뜻했고, 학우들은 썩 다정했다. 어렸을 적 다녔던 - 기회가 생기자 마자 그만뒀지던 - 교회 사람들 역시 항시 클리어 컬러를 유지했던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주었었다. 그런데도! (잠들 수 없는 오밤중엔, 그는 가끔씩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마키시마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2014. 10. 17)

사혼곡: 사이렌 아카이브
  • No.031 바다 배웅
    인물/마키노 케이
    일시/첫째 날/12:00
    조건/붉은 바다를 본다

바다 배웅
하뉴다 마을의 민속행사.
당해의 마지막 날에 검은 제사복을 몸에 두르고 마나천에 몸을 던져 1년간의 죄나 더러움을 정화한다.
그 다음에 행해지는 의식을 바다 맞이라고 한다.

 

  • No.036 바다 맞이
    인물/안노 요리코
    일시/첫째 날/17:00
    조건/시무라와의 대화

바다 맞이
하뉴다 마을의 민속행사.
당해의 마지막 날부터 새해를 맞을 때까지 마나천에 몸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이 새해가 됨과 동시에 해안가를 오른다. 죄악의 허물이 씻기워진 사람들은 신의 은혜와 함께 마을의 주민으로 자리 잡는다.

 

(정보 출처 엔하위키 미러)

 

-

 

본래는 물가를 현세와 상세의 경계로 보고 현세의 더러움을 물로 씻어 상세의 은혜를 기원했던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상세란, 옛부터 바다 건너편에 존재한다고 믿어온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로불사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마키노 케이는 눈을 감았다.

 

 마나천의 물이 금세 제사복 안으로 스며들어 살을 적셨다. 닿아오는 물은 서늘했지만 다정한 감촉이었다. 흐르는 개천이 달콤한 물의 언어로 마키노 케이의 귀에 속삭여왔다. 마키노 케이는 그 목소리가 전부 괜찮아, 괜찮아, 하고 타일러주는 구도녀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마키노 케이는 또 한 명 물과 닮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떠올렸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조차 죄스러워 견딜 수 없는 사람. 마을 제일의 명의名醫, 그리고… 자신의…… 쌍둥이 동생. 부드럽고 차가운 축축한 감촉도 마찬가지였다. 물의 감촉은 구도녀의 모든 것을 감싸는 부드러운 포옹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쌍둥이 동생ㅡ미야타 시로우처럼 차갑고 시렸다.

 

 미야타 씨,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마나천에 몸을 담그면 이 엄중한 죄를 지울 수 있는 것일까요.

 

 눈을 감고 있으면 미야타 시로우의 실루엣이 보일 것 같아서, 마키노 케이는 뒤쫓기듯 눈을 떴다. 회색 하늘이 아래쪽에서부터 조금씩 불그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해가 밝았어요, 구도사님."

 

 구도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나와도 돼요. 구도사님은 이걸로 깨끗해진 거예요.

 

 마나천의 반대편에서 아직도 발을 담그고 있는 미야타 시로우가 얼핏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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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4)

Green Green Grass of Home

(song by Tom Jones)

 

 열네살의 빌헬름 쿠르트는 론즈브라우 왕국의 작은 농가에서 나고 자란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총명하고 사려깊었으며 외모 또한 늠름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마을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쿠르트 가문의 사람은 대대로 사랑받았다. 빌헬름의 아버지 또한 매우 강인하고 의젓해 마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총각이었기 때문에 고운 마음씨와 빼어난 미모로 마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처녀였던 빌헬름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런 두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빌헬름 역시 장래가 촉망받았다.

 

 빌헬름은 열일곱이 된 해에 첫사랑을 했다. 상대는 작은 양치기 집안의 아홉살배기 외동딸이었다. 보드라운 하얀 살결과 풀 냄새가 나는 푹신한 갈색 머리가 좋았다. 그리고 이듬해 빌헬름은 군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앉아 빌헬름은 조용히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 마을로 되돌아와 어엿한 숙녀가 됐을 메리에게 청혼해야지.

 

 그리고 빌헬름은 운명적으로 제 주군, 론즈브라우의 버림받은 셋째 왕자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와 만났다. 그는 왕자 앞에서 무릎꿇고 알프트라움에 대고 맹세했다. 이 명이 다할 때까지 오직 주군만을 섬기겠노라고. 그리하여 빌헬름은 주군 곁에서 전장에 나갔다.

 

 제국의 공중전함이 추락했고 저주받은 힘을 가진 사악한 여장군은 죽은 자를 일으켜 론즈브라우군을 덮치도록 했다. 처음에는 론즈브라우가 유리한 듯 보였던 전쟁은 제국의 압승이었다. 장군의 하인이 된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살과 근육과 뼈를 뜯어먹었고 몸을 뜯어먹혀 죽은 사람들은 또 장군의 하인이 되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덮쳤다. 빌헬름의 충성심조차 수없이 몰려드는 죽은 자들 사이를 가를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그의 주군과 최후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장군의 하인들이 몰려와 그의 목과 팔과 다리를 뜯었다. 그는 빌헬름 쿠르트에서 의사 없는 장군의 하인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장군이 죽었고 장군이 부렸던 모든 죽은 이들도 잠들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잠들고 안식을 찾을 때에 불사자 빌헬름 쿠르트는 깨어났다. 깨어난 빌헬름은 주위가 온통 폐허였으므로 자신이 깨어난 곳이 어디인지 깨닫지 못했다. 일단 일어서 걷기 시작한 빌헬름은 얼마 안 가 다 쓰러져가는 낡은 성의 흔적을 발견했다. 문득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나의 고국 론즈브라우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빌헬름은 그 이후로 새로운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고향의 어머니와 아버지, 어여쁜 메리, 저의 주군 그룬왈드……. 예전에 의미를 두었던 것들은 둥둥 떠다니다가 이내 빛바랬고 과거도 현재도 희미해졌다.

  

 언젠가 죽게 된다면 고향의 한때 푸르렀던 잔디 아래 편안히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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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5)


 그룬왈드 론즈브라우가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누군가가 상처받았다.

 그룬왈드는 타인을 상처입히는 것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타인을 상처입혔다. 그룬왈드는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 느끼는 것을 거부했다.

 그룬왈드는 사라졌다.

 

 브레이즈는 반짝반짝거리는 자색 눈동자로 그룬왈드를 보았다. 유리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가 신비했다. 그는 유리 같아서 또한 번뜩거리면서 자신을 비추었다.

 

 "안녕."

 

 브레이즈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룬왈드는 눈동자를 흘깃, 한 번 그를 보고는 도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오돌토돌한 벽에 수없이 시선이 꽂힌다. 그가 앉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브레이즈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투명해서 매혹적이었다.

 

 이성이 말리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되돌아보면 어느새 영롱한 보라빛과 시선이 맞닿아있었다. 금세 다시 공허로 눈을 돌렸지만 벽은 옅게 페인트칠을 한 듯 연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지독히도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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