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8)

  1. 빌헬름

 

  죽고 싶었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 것은 백 년 조금 넘은 청소년 시절이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불사의 몸으로 백 년 하고도 또 오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그는 아직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도 긴 생을 살았기에 삶에 질려있었으나, 왕자가 죽인 동물이나 인간의 시체를 치울 때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죽음이 아님을 깨달았다. 왕자는 말했다. 죽음이야말로 빛이요 안식이라고. 하지만 불사의 남자는 왕자의 잠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고 죽을 떠먹일 내일이 없는 것을 상상하곤 속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문득 그는 자신이 또 백 년 뒤에도 살고 싶을 것인지 궁금해한다.

 

 

빌헬름이 거의 모든 연성에서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어 고통스러운 남자'로 비추어지길래 빌헬름이 죽고 싶지 않다면? 하는 생각에 휘갈겨본 것.

 

 

 

  2. 무제

 

   인도자에게 선택받기 전까지, 전사는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으며, 또 여러 장소에 존재한다. 그네들은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기억을 상실하고 있으며, 감정을 느끼지 않는 동시에 허무하다. 그러나 인도자에게 선택받은 전사는 험난한 운명이 예정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전사는 인도자를 기다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전사일 수 있는 것이다.

 

 

 

 3. 메리아+벨린다 

 


 "너는 누구니?"

 

 연분홍빛 미소를 걸친 고운 소녀가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나는……, 벨린다."

 

 눈의 여왕이라고도 불리우는 하얀 여인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소녀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당신은 벨린다구나? 나는 메리아야."

 "그건 내 어릴 적 이름이에요."

 

 조소하는 소녀에게 여자는 여유롭게 고했다. 소녀의 표정이 일순 뒤틀렸다. 얇은 것에 힘만 잔뜩 주어 갈라져나오는 목소리로 소녀는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아니고, 메리아도 아니야! 당신은 가짜일 뿐이지!"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여자의 목을 휘감더니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소녀와 함께 여자가 쓰러졌지만 아무런 소음도 나지 않았다.

 

 "당신은 죽은 내 흉내를 내면서 천천히 오빠를 망가뜨렸어. 당신이 미쳐버렸기 때문이야! 당신이 오빠를……. 오빠는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야! 내 흉내를 내는 당신도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겠지!"

 

 기계처럼 차가운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혹은 않았다. 씩씩거리며 여자의 목을 조르다가 이내 제 풀에 지쳐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뗀 소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 오빠를 사랑했어?"

 "당신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거에요. 당신 말대로 저는 당신의 카피니까요."

 "불완전한 것이."

 

 "그렇게 들어왔지만."

 

 하얀 여자가 말한다.

 

 "특히, 인격 기능이 불완전하다고 들어왔죠. 그렇지만…, 당신을 대면해보고 나니 알겠군요. 나의 인격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리지널의 인격을 그대로 복사했을 뿐."

 "당신 따위랑 내가 같다고 말하는거야!"

 

 소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소녀는 상처받고 있다. 여자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말한다. 그녀는 그다지 소녀를 감싸고 싶지 않다.

 

 "그래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난 당신이 느끼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요."

 

 여자는 눈을 뜨고 한참 전부터 자신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소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오빠의 사랑을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제게 질투하는거죠?"

 

 우후후후. 여자는 불길한 웃음을 흘린다. 그럼 이제 제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는 그만해주시지 않겠어요? 당신이 아무리 목을 졸라봐야 여기서는 그 누구도 살아있지 않은 만큼 그 누구도 죽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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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자크] 

 

 "야, 개새끼야!"

 

 아이자크가 눈에 밟히자 리즈가 짖궂게 웃으며 큰 소리로 불렀다. 시비조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자크는 불쾌한 표정으로 홱 돌아보았다.

 

 "씨발, 왜."

 "뭐? '씨발'? 너 이 새끼, 잘 걸렸어!"

 

 다짜고짜 리즈가 손바닥에서 화르륵, 불꽃을 피워냈다. 아이자크는 기가 차면서도 목검을 들었다.

 

 "당신 오늘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돌았어. 뭐 잘못 먹었냐?"

 "그건 싸워보면 알겠지."

 

 리즈는 손목을 풀면서 도발했다. 아이자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파란 눈이 살기를 띄었다.

 

 "그럼 맞짱 까."

 

 

 둘이 치고받는 1미터쯤 뒤에서, 아이자크의 맹우 에바리스트와 그의 스승 베른하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요즘 안 싸우더니 또 싸우네요. …그러게 말이다. 스승님, 쟤네 왜 저러는지 혹시 짚이는 거 없어요?

 

 

 "야, 이거 존나 불공평하다고!'

 "지랄하네."

 "아니, 당신은 불을 쓰는데 난 목검이라고! 이게 안 불공평하냐?"

 "나는 능력이 있는거고 넌 없는거고. 공평하지! 꿀리는 것 같으면 항복하던가."

 "씨발놈."

 

 

 "리즈는 말이다……."

 "예?"

 "오늘 밤 제법 위험한 임무를 나가는 걸로 되어있다. 체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어, 예에…, 그렇군요…. 부관님도 함께 나가시나요? 아니, 나와 프리드리히는 대기다. 아, 예.

 

 

 "개새끼, 오늘은 내가 특별히 이쯤 하고 물러나준다."

 

 별안간 리즈가 아이자크의 양팔을 틀어잡고 말했다. 아이자크는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비꼬았다.

 

 "쫄았냐?"

 "개소리 한다. 쫄긴 뭘 쫄아, 임무 나가려면 좀 쉬어야지."

 "뭐? 임무 있었어? 임무도 있는 주제에 왜 지나가던 사람한테 시비를 털어?"

 "글쎄 말이다. 아무튼 좀 쉬다가 다녀와야지. 개새끼 잘 있어라!"

 

 껄껄 웃으며 리즈가 따끈따끈한 손으로 아이자크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이자크는 반사적으로 리즈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리즈는 가볍게 방어했다.

 

 "아놔, 당신 오늘 임무면 마음껏 때리지도 못하잖아. 괴물 새끼 속 시원하게 조지고 오고 난 좀 건드리지 마라."

 "귀엽게 구네."

 "염병할."

 

 

 "리즈 새끼 드디어 뒈졌냐?"

 "아이자크!"

 

 (2014.4.10)

 아이자크가 시선을 끌자 에바리스트는 매섭게 다그쳤다. 마지못해 아이자크가 목소리는 낮췄지만 눈빛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

 

 "에바는 알아? 얼마나 좆같은 새끼였다고."

 "아이자크."

 "맨날 '아이자크, 아이자크'……."

 

 아이자크는 뾰로퉁해졌다. 에바리스트는 안타깝게 아이자크를 쳐다보았다. 아이자크는 사실 리즈와 친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리즈에게 화가 나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고, 가끔은 알 수 없었다. 물과 기름 같았다. 태양과 달 같았다. 그러면서도 레지멘트 내에 두 사람의 친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리즈 개새끼……."

 

 에바리스트는 다가가 아이자크의 등을 조심히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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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1~2014.4.10)


 그냥, 언젠가부터 네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달갑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일은 피곤하기 그지없었고, 네가 아니더래도 마음을 써야 할 사람들은 이미 충분했다. 그렇지만 마냥 싫었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마음속 한편에 어여쁘게 켜진 호롱불이 있어 예전보다 덜 초조한 듯도 했다.

 

 네 얼굴은 희다. 손도 새하얗다. 본 적 없는 다리도 분명 희리. 또 가느다랗기도 하겠지.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진다. 살결이 매끄럽겠다. 네 무릎 뒤편, 뼈마디 사이를 한입에 물어 머금는 상상을 한다. 야들야들한 피부가 씹혀 들어오는 쾌감. 혀로 보드란 살을 핥는다. 맛있다.

 

 네 입술은 옅은 분홍빛, 신기하리만치 투명하다. 그 입술을 훑는 상상도 해 본다. 입술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바스락거린다. 그리고 달콤하디달콤한…… 철분……. 공상 속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그 맛은… 피……. 네 입술을 질끈 씹어보면, 거친 입술이 찢어져 왈칵 혈액이 쏟아진다. 맛있다.

 

 여러 생물, 여러 사람을 죽여왔다.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단결되는데도 불구하고 너는 특별하다. 네 목을 뚫을 창은 세상의 모든 다른 검붉은 고철과 차별되는 성창聖槍이오. 특별하다, 네가…, 네가…….

 

 너는 총명하고, 지적이며, 잔인하면서 성스럽다. 아무리 강요받아도 외우지 못했던 화가들의 이름과 그들이 남긴 여러 예술품의 제목, 멋스러운 시나 소설의 문구…, 너는 그런 것들을 곧잘 외우고 있다. 네 목소리는 곱고 아름다우며, 너는 분명 노래를 잘 부를 것이다. 예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나보다 훨씬 잔혹한 방식으로 소용돌이의 생물들을 죽였다. 그리고 너는 자신의 여동생 또한 그 손으로 죽이겠지. 너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이다. 그런데도 너는 너무나도 성스러워 눈부시다.

 

 금방 사라질 덧없는 감정을 보물처럼 끌어안았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을 좋아했다…. 차갑게 식어버리기 전에 이 고귀한 감정과 함께 네가 나를 죽여다오. 애정을 이 품에 끌어안고 스러질 수 있도록, 지금 당장 나를 꿰뚫어줘! 브레이즈여…….

 

 

 

 "정신나간 소리를."

 

 그룬왈드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브레이즈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부활한다고 하더군."

 "부활?"

 

 브레이즈가 갸우뚱했다.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없는 정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현세로의 부활…….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이라 믿고 있었을 무렵, 녀석들은 나를 이 성유계로 데려와 전투를 시켰지. 그리고 현세보다 이 장소가 더 마음에 드는 지금, 다시 현세로 부활하라고 하는군."

 

 그룬왈드가 엷게 웃었다. 브레이즈는 웃지 않았다. 대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함께인가?"

 

 브레이즈가 안간힘으로 성대를 울렸다. 그룬왈드는 가벼이 대답했다.

 

 "당장은 아니야."

 "……이 세계에서 우리는 '페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 함께일수는 없는 법이겠지. 하지만 성유계에 온 순서대로 현세에의 부활도 이루어진다면, 너도 머지않아 부활할 것이다."

 "……그래."

 "현세에 부활해서도 너를 다시 만날까."

 

 브레이즈가 울컥했다. 애써 포장한 감정이 한겹한겹 벗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추호도 관심은 없는 주제에 어째서 그런 말을 했니. 브레이즈는 그룬왈드의 (묻는 것이 아니였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것이……, 빛이다!"

 

  전방에 선 브레이즈가 스킬을 썼다. 대기하는 그룬왈드는 무표정하게 벌어진 상처가 도로 아무는 것을 감상했다. ‘성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치유의 파동’……, 우습게도 이것이 브레이즈의 캐릭터 카드에 쓰여있는 설명문이었다. 그룬왈드는 조소했다.

 

​ "일단 물러나지. 후에는 좋을대로 해라."

 "좋다. 내가 나가지."

 

 인도자는 브레이즈에게 그룬왈드와 교체할 것을 명령했다. 후방으로 물러나는 브레이즈의 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넘실거렸다. 그룬왈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뒷모습만 보면 기만적인 얼굴이 안 보여 정말로 성자인 듯 하다.

 

  빨간 드레스의 여자아이가 팔짱을 끼고 거만한 얼굴로 그룬왈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한 암흑을 알고 있어? …나는 알고 있어.”

  “죽음은 삶보다 낫지.”

 

  말이 안 통하네! 소녀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개의치 않고 그룬왈드는 인도자의 지시대로 스킬을 준비했다.

 

  “그 목숨, 내가 받는다. (정신력 흡수)”

  “크윽……!"

 

  이래서야 ‘슈퍼 히로인’도 쓸 수 없잖아! 소녀의 표정은 더욱 더 나빠졌다.

 

  "끝이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

 그룬왈드가 배시 스킬로 마무리를 지었다. 마지막 일격을 맞은 소녀는 쓰러져 미련하게 그르렁거리며 초록색 피를 토해냈다. 끔찍한 참상이였다.

 

 

 

 "나쁘지 않아."

 

 소년이 말했다.

 

 "난 나쁘지 않아."

 

 소년이 찡그리며 그룬왈드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은 텅 빈 눈으로 소년을 향해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말해달란 말이야……!"

 

 소년은 그룬왈드의 옷자락을 찢어버릴 듯 당겨댔다. 히스테릭한 소년에게 그룬왈드의 눈동자는 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그룬왈드는 마치 인형처럼 굴었다.

 

 "왜 말해주지 않아……? 말해주지 않는 넌 나빠……. 네가 나쁘다고……."

 

 소년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거야!"

 

 소년은 이제 울먹이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그룬왈드의 허리를 콩콩 주먹질했다. 그런데도 그룬왈드는 정말로 인형마냥 미도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은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쳤다.

 

 "왜 말을 안 하냐고!"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그룬왈드는 소년을 보았다. 입을 열었다.

 

 "질 나쁜 놈."

 

 

 "……어린 아이에게 가차없군, 그룬왈드.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협정심문관 브레이즈 로아트가 팔짱을 끼고 나타나 그룬왈드를 책망했다. 그룬왈드는 태평하게 변명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그게 최선이였다.

 

 "하, 질 나쁜 놈."

 

 브레이즈는 픽 비웃었다.

 

 "동정하지."

 "좋을대로 해라."

 

 그룬왈드는 어디까지고 무신경했다. 죽어도 남의 마음은 몰라주는군. 브레이즈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네가 상냥하게 말해줬다면 내 손에 용기가 잡힐지도 모르는데도. 하지만 너는ㅡ

 

 "나빠도 괜찮다."

 

 그런데 문득 그룬왈드가 말했던 것이다. 흠칫 놀라며 브레이즈가 그를 쳐다봤다. 어서 더 말해봐. 그에게 갑옷이란 가슴이 허망한 기대에 부풀어오를 때에 압박하기 위해 존재했다. 여전히 무신경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룬왈드는 말을 내뱉었다.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되지. 그 뒤엔 아무것도 없다."

 

 브레이즈도 그룬왈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룬왈드는 개의치 않고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너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길 갈망하지."

 

 '착해빠진 녀석.' 어서 더 말해봐. 뭐든 덧붙여봐. 그에게 갑옷이란 가슴이 허망한 기대에 부풀어오를 때에 압박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룬왈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레이즈의 혀가 그룬왈드의 입속을 부드럽게 훑었다. 서로의 혀가 입천장에, 치아에, 맞닿고 서로 얽히는 진한 스킨십 - 키스. 연인들이 으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즐기는 스킨십.

 

 그런데 너는 아무래 입맞춘들 내게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룬왈드의 구내는 차가웠다. 그의 혀는 아주 힘없이 느릿하게 움직였고, 또렷하게 뜬 두 눈은 도취의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입맞출 때, 브레이즈는 언제나 눈을 감았다.

 

 공허한 빨간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두 눈을 꼭 감고, 그가 의욕이 없음을 실감하지 않기 위해 더 격렬히 혀를 섞었으며, 그의 차가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를 더욱더 끌어안고 더욱더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리, 그래 봐야 그룬왈드는 산송장인데.

 

 브레이즈와 '연애'할 때, 그룬왈드는 언제나 숨 쉬는 시체였다. 그는 얼굴을 붉혀주기는커녕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은 느슨했고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룬왈드가 연애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혼자 고독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룬왈드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몸임을 알았다.

 

 왕국의 음지, 깊숙한 골목에는 여자들이 값싼 제 몸을 파는 붉은 불빛의 사창가가 있었다. 그룬왈드는 그네들처럼 값싼 몸을 팔고 싶지 않았다. 값싼 마음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도, 그리고 차례로 사랑받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왕자는, 브레이즈의 열렬한 구애에 값싼 자신을 팔아넘기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브레이즈는 아주 고귀하고 성스러운 남자였다. 그룬왈드는 그의 앞에 설 때마다 한없이 싼 값의 자신이 싫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네게 어울리지 못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은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결국 그룬왈드는 어느샌가 자신이 싫었던 것조차 잊어버렸다. 브레이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브레이즈는 배가 아팠다. 그는 요즈음 자주 그랬다. 마치 누군가 창자에 대고 부채질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배가 살살 아파져 오니 짜증이 솟구쳤다.

 

 브레이즈는 요즈음 스트레스가 많았던 걸 기억했다. 과연, 스트레스성 반응인가. 그는 가볍게 넘기듯 생각한다. 다 큰 오빠가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프다고 말하더라도 누가 믿어줄까. 레지먼트에서 브레이즈는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나 (병약하긴 하지만) 예쁜 여동생을 두고 부모님과 주위 이웃들에게 널리 신임받는 유복한 녀석으로 통했다. 그런 그가 아프다고 한들, 힘들다고 한들 누가 믿어줄까. 더구나 브레이즈가 여태껏 불평을 입 밖으로 낸 횟수는 가히 꼽을만했다. 동정 어린 연민의 시선은 그야말로 기대할 수 없었다. '아파? 네가' 하며 갸우뚱대는 것이 그의 동료들에게는 최선일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복 받은 놈이 불만 사항도 많으시네.' 하는 핀잔을 예상했다.

 

 브레이즈는 금세 쿡쿡 찌르는 아픈 것을 참는 데에 익숙해졌다. 찢어지게 아플 때에도 원칙 -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 - 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대신 고통이 유난히 심한 날에는 속에 하나둘 쌓아두는 대신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진통제를 삼키고 눈물과 한숨을 쏟아내는 요령도 배웠다. 고통을 참는 것에 있어서는, 스스로 약속한 것을 착실히 지켜나가는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브레이즈가 토했다. 메스꺼움을 식수로 대충 달래고 씩씩하게 팔등으로 축축한 입을 닦고 일어서는 중에 그룬왈드가 다가왔다.

 

 "왜 토했어?"

 

 브레이즈는 깨달았다.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역시 자신은 미숙하고 유약했다.

 

 "유일하게 내뱉어도 되는 거라서."

 

 무슨 소리야. 그룬왈드는 추궁하지 않았다. 무신경한 그룬왈드는 브레이즈에게 아주 마음 편한 동료였다.

 

 

  안녕, 오랜만이군. 브레이즈가 인영에게 말했다.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형상을 한 인영은 대답이 없었다.

 

 "넌 여전히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구나."

 

 브레이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죽어버려."

 

 브레이즈가 검 카드를 총동원해 '그룬왈드'를 한 방에 잘게 썰어버렸다. '그룬왈드'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조각난 살덩이 사이로 빨간 피 대신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그를 침식해갔고, 어느새 그룬왈드였던 인영은 한 줌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브레이즈는 만족스러운 듯 검을 넣고 손을 털었다.

 

 "속 시원하네."

 "그가 싫은가 보네요."

 

 인형은 브레이즈의 과거를 알았지만, 그 마음까지는 알지 못했다. 브레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했다……."

 "그렇습니까."

 

 인형에겐 마음이 없었고, 마음이 없는 그녀는 좋아한다는 마음의 당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형은 브레이즈에게 반론하지 않았다. 브레이즈는 낮게 중얼였다.

 

 "녀석은 참 일방적으로 나와 연을 끊었지……."

 "거짓말."

 

 브레이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형이 반론했다. 브레이즈가 흠칫했다. 마음이 없는 인형이 그토록 단호하게 반론한 것은, 분명 그녀가 객관적으로 그의 말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형에게는 바인더의 그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인연을 끊은 건 브레이즈, 당신입니다."

 

 브레이즈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웃지는 않았다. 눈이. 눈물이나 흐느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그가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었다. 들이쉬는 숨이 파들파들 떨렸다. 마음 없는 인형 주제에, 괘씸하군.

 

 "너도 봤을 터. 내 잘못이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당신 잘못이에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룬왈드는 당신에게 좋아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브레이즈의 숨이 멎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네 말이 옳다……. 난 그 못난 놈이 뭐가 좋아서 여태 물고 늘어진지……. 웃기는 일이야."

 

 인형은 주기적으로 눈만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브레이즈는 슬픈 걸까? 하지만 그는 웃기다고 말했다. 그가 웃기다고 말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웃기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슬퍼보였다. 무어라 말해주어야 그가 기쁜 듯이 웃어줄까.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사실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면 그는 기뻐할까?

 

 "당신은 그룬왈드가 아니라 그룬왈드에게 마음을 바치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요?"

 

 브레이즈는 무너져내렸다.

 

 인형은 그저 갸웃거렸다. 사실을 알려줬는데 왜 기뻐하지 않는걸까……?




4월 8일 브레그룬 : 낮잠, 평화로웠다면.

 

 만약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에 살았었다면.

 

 넌 론즈브라우 왕국의 셋째 왕자로 널리 사랑받았고, 죽음이라거나 하는 이상한 취미에 홀리는 일도 없었다.

 

 나는 평화로운 마을의 예쁜 하얀 주택에서 좋은 부모님과 건강한 여동생과 함께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신임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레지먼트에…… 입대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세상에는 검은 소용돌이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그것과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레지먼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레지먼트에 입대했을 시절, 대신 나는 명문 대학을 지망하는 고시생이 되었고, 너는 왕위를 물려받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우리는 그 시절이 삶의 고비였다. 앉아서 공부하는 게 삶의 고비라니……, 실로 실없는 상상을 한 것 같아 실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해서 운명으로 이어진 우리가 (오글오글) 만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나는 무사히 지망했던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너는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민들과 같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같은 학교로 편입 온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렇게 우리는 대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과 수업을 들었지만, 우연히도 강의실이 가까이에 있어서 서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그렇게 점차 친해진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고……,

 

 

 눈을 떴다.

 

 오늘 밤은 오염자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암살 임무였다.




4월 9일 브레그룬 : Nice to meet you

 

 우리는 교만했다.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왠지 사람들은 가볍게 서로 이해하노라 말한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자란 우리도 쉽사리 착각에 빠진다. 너를 이해해.

 

 죽음에 홀린 그를 이해하노라 말했었다. 그를 동정한다고 했다. 우연히 검은 소용돌이와 맞닿아서 우연히 죽음에 홀렸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세뇌당하듯 죽음에 매혹되어갔다고…, 너는 그런 거라고, 나름대로 단정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수긍했다. 타인의 결론을 믿기가 가장 쉬웠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보단 타인의 말에 따르는 편이 좋았다. 그는 말했다. 넌 더 비참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나는 멍하니 끄덕였다.

 

 우린 서로 이해했고, 서로가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다고 자만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필요했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있지 않았고, 그렇게 끝까지 내게 닿지 못한 채 그는 생을 마감했다. 혼자 남겨져서 몇 달 밤을 고민하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 이해했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타인이었고, 타인은 절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도. 사람은 타인에게 의존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 스스로 깨달은 자신의 모습은 타인이 말해준 것보다 몇 배는 징그러운 흉상이었다. 모든 것을 결론 내린 이튿날, 내게도 죽음이 덮쳤다.

 

 그는 나보다 먼저 성유계에 와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확고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브레이즈 로아, 잘 부탁한다."

 "반갑다."

 

 그림자 세계는 햇볕이 강했다.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평행하게 늘어졌다.




4월 10일 : 만나서 반가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째서 존재하는지 따위 알 수 없었다.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 쉬고 있었다.

 

 어느 날 빨간 치마를 입은 인형과 어둠침침한 전사 ㅡ 네가 찾아왔다. 우리는 싸웠다. 너는 나를 죽였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태어났다. 지시자의 '바인더'의 일원이 되어, 마음(영혼)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자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브레이즈 로아. 너는?"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다."

 "만나서 반갑다, 그룬왈드. 잘 부탁하지."

 

 너와 악수를 하고, 잠시 생각하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묻겠다. 너는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나?"

 "생전의 기억은 없다. 너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나?"

 "아니, 아무런 기억도 없다. …이상한 장소로군. 이렇게 어엿이 자신이 존재하는데도 과거는 전혀 알 수가 없어."

 "금세 익숙해질 거다."

 "그런가."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치고는 만나고서부터 허물이 없었다 (너는 원래 허물없는 사람인 듯도 했지만). 고맙게도 지시자는 우리를 '페어'라며 같은 덱에 넣기를 즐겼고, 덕분에 우리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서로에 대한 과거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해 알아갈 것은 많았다. 사소한 생활 습관, 욱하는 부분, 잠이 많아지는 시간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도 지시자는 내게 제안했다.

 

 "브레이즈, 기억을 찾고 싶습니까?"

 "…생전의 기억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돕겠습니다."

 "가능한가?"

 "예, 가능합니다."

 

 나는 잠시 너를 생각했다. 내가 기억을 찾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뭐가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금방 네 생각을 떨쳐냈다. 어차피 너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럼 부탁하지."

 "그렇다면 당장 박쥐를 잡으러 가죠."

 

 

 기억을 찾는 것은 험난한 일이었다. 박쥐, 늑대, 철갑기사, 억울하게 죽은 자, 백은 박쥐, 흡혈 박쥐, 버섯 토끼, 박쥐, 박쥐, 박쥐, 박쥐, 박쥐…… 박쥐!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 지시자와 나는 몇백마리의 몬스터를 잡아 족쳤고, 몬스터를 정제한 코인으로 여러 빛깔의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자, 브레이즈, 수고했어요.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드디어 박쥐 잡이도 끝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온 생전의 내가 듣는다면 우습기만 하겠지만, 무척 진지하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박쥐를 잡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설마요."

 "뭐?"

 "우리가 지금부터 볼 것은 당신의 많은 기억 중 첫 번째 파편에 불과합니다. 모든 기억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앞으로 박쥐는 수백마리 더 잡아야 합니다."

 "농담은 그쯤……."

 "농담이 아닙니다."

 

 맙소사. 나는 한숨을 쉬며 뒷목을 잡았다.

 

 "아무튼간, 첫 번째 기억을 되찾도록 하지."

 "예, 좋습니다."

 

 

 "기억을 찾고 왔나, 브레이즈. 기분이 어떻지?"

 "놀랍군."

 "표정을 보아하니 생전 좋은 사람은 아니였나보군."

 "제멋대로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대로다, 그룬왈드."

 

 나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길 잠시 망설였지만, 그룬왈드라면 아무래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아 계속했다.

 

 "네 동료들과 너를 죽이려 했더군."

 "그런가."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기가 찬 그 모습이 되려 안심되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서 반갑다, 그룬왈드.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징그럽게 굴긴. 그래,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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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2)


 이런 거 싫어요, 스승…….” 

 

 가늘게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훌쩍, 훌쩍. 두 번 훌쩍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지 못한 채 프랑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왜 제가 범죄자에요?” 

 

 마음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겨우 한 숨 들이마쉬고는 프랑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질문했다

 

 왜 제가 마피아에요? 왜 제가 사람을 죽여요?” 

 

 거기까지 말한 프랑은 더 말하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 로쿠도 무크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미안해요, 미안해요,’만을 반복하는 그에게, 프랑은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물었다

 

 스승인가요? 저를 끌어들인 건?” 

 

 무크로는 숨이 멎는 듯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때묻지 않은 제자를 처음 끌어들였던 것은 자신이 맞았기에

 

 무크로는 한 번도 기억을 되찾은 프랑이 그러한 식으로 충격먹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 만난 프랑은 윤리관이 흐릿했고, 마피아에 대해 거부감도 의구심도 갖지 않았었다. 어째서 기억을 되찾은 그는 갑자기 물러터진 소년으로 변해버린걸까. 자문해보아도, 무크로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아, 무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로쿠도 무크로가 무른 사람을 싫어한 이유는 단지 짜증나서 뿐만이 아니었다오히려,가장 큰 이유는 나약함은 전염되기 때문이었다. 무른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함께 물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함께 나약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파멸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크로는 무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다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목 놓아 흐느끼는 프랑에게, 조심스레 무크로가 말을 건네었다

 

 네 탓이 아닙니다. 너를 마피아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 

 

 그럼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프랑을 보며 무크로는 조바심이 나 입술을 물었다. 서글피 우는 제자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자기까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나약한 인간도, 선한 인간도 아니었을 텐데. 역시 물러터진 사람을 곁에 두고 있으니 나약함이 전염된건가

 

 되돌아갈 수 없잖아요…….” 

 

 딸꾹질하며, 흐느끼며, 프랑이 힘겹게 문장을 꺼냈다

 

 이미 마피아의 일에 간섭해버렸으니까…, 이제 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프랑의 비참한 절규에 무크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왜 못 돌아갑니까. 무지개의 대리전쟁은 거의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대로 나와 인연을 끊으면, 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였지만(정확히 무엇이 그리 열받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크로는 서서히 언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유감이군요, 프랑. 너는 인재였습니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점이지만,너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듯하군요. 아무쪼록 그 강력한 환술을,일상생활에서나 어디 한번 잘 써먹으면서 사십시오.” 

 

 점점 말하는 속도에 있어서도 목소리의 크기에 있어서도 열을 띠기 시작하는 스승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프랑이 갑자기 쿡,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무크로는 경악했다

 

 “……?!” 

 

 스승, 그 새 쇠약해지셨나요? 설마 me가 그 정도 하찮은 일로 그렇게 울고 불고 할 것 같았나요?” 

 

 무슨……,” 

 

 두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붉힌 무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따

 

 속아넘어간겁니까.” 

 

 네 입버릇이 안 나올 때부터 의심해봤어야 했습니다, 무크로가 작게 덧붙여 중얼거렸다

 

 , 더 바보 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깨달은 게 어디에요? , 그나저나 의견 잘 들었구요. 인재! 수재!” 

 

 프랑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던 무크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심어린 살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낀 프랑은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아주세요, 스승! 그저 이 만큼이나 me의 환술이 늘었다고 조금 과시해보고 싶었—” 

 

 ! 프랑이 문장을 채 끝내기도 전에, 무크로의 주먹이 무방비하던 프랑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필요 없습니다, 급조된 변명 따위는. 그럼 내일 다시 보도록 합시다. 오늘은 하도 속이 끓어서 이만 물러나야겠습니다.” 

 

 ~! 내일 또 봐요, 스승!” 

 

 그렇게 서럽게 울던(환각을 보여준) 것은 언제였냐는 듯이, 멀어져가는 무크로에게 해맑고 해맑은 목소리로 프랑이 인사했다

 

 

* * * 

 

 

 글쎄, 어느 쪽이 환상이려나.” 

 

 분명 그럴 거다, 믿어버리면 그 시점부터는 환각에 완전히 지배당해 버린다고…,” 

 

 스승이 그렇게 가르쳤었죠?” 

 

 프랑흐느껴 울던 진짜 프랑이 독백했다

 

 이런 거, 정말 싫은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이어서 비참한 울음소리가 공허하게 숲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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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4)

서두

 

1. 가끔씩, 길을 걸을 때, 스스로 내가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를 새삼스레 깨닫고는 치가 떨릴 정도의 어색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뱌쿠란 씨와는 달리 딱히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덮쳐오는 공허함이나 어색함 따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본론

 

2. 익숙해져 있었던 탓이다. 비록 익숙해져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닌 10년 후의 나로, 일종의 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억 속에 있던 감정들은 이제는 제법 무던히, 그러나 아직 너무나도 생생히 내게 다가온다. 그 - 10년 후의 나 - 는 지금의 나와는 성격도 외모도 다름에도, 그는 너무나도 '나'였다. 그는 뒷세계를 주름잡는 마피아 패밀리의 2인자였다. 흰 제복을 입고 당당히 걷는 그는 ('나'인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조용한; 잠잠한 그런 박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를 보고 공포에 글자 그대로 오들오들 떠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명 그는 공포스러운 사람이었다. '조용한 박력'으로 거리를 주름잡았던 내가이제는 다시 원래대로, 이치대로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을 때에는,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에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3. 나는 앞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자주 자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미래의 내가 밟은 인생을 그대로 따라 밟는 인생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루프(loop)하는 꼭두각시와도 같은 인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와서 본연의 꿈을 좇으라 하더라도, 지금의 내게 그런 용기가 있을 리 또한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뇌에 찬 얼굴로 걷는 나를, 사람들은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저 아이는 묘한 아이다. 저 아이는 이상한 아이다. 있지도 않은 술렁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망상장애일까나.

 

 

결론

 

4.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나는 이전보다도 밖을 다니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가족들을 보는 것도 거의 마찬가지의 수준으로 꺼려졌기에, 결론적으로 나는 있을 곳이 사라졌다. 세계를 구해낸 결과 치고는 굉장히 허무맹랑한 결과여서, 몇번인가 허탈하게 큰 소리로 웃은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정신병자 같은 짓은 하지 않지만. 타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 것은, 분명히 기억이 돌아온 이후부터.

 

꼬릿말

 

5. 나는 내가 정말로 원망스럽다. 전부  탓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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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4)

 

 “M.M ?” 

 

 ? 누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쩍 뒤돌아보니— 

 

 

 암퇘지 호박?!” 

  

 커다란 한쪽 눈망울로 자신  길고 빨간 머리카락과 똑같이 붉은 눈, 차이나풍 원피스  코스프레 차림  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암퇘지년’; 크롬 도쿠로를 발견한 M.M이 과장된 동작으로 펄쩍 뛰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크롬 도쿠로가 입을 열었다

 

 “Il mio nome e’ Chrome; 크롬…. 크롬 도쿠로에요.” 

 

 그리하여 말하는 게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짜증나는 이름이었어서, 확 열받은M.M은 버럭 고함을 쳤다

 

 누가 모른댔니? ! 너 같은 년은 가질 자격도 없는 이름을 누구 앞에서 주제넘게 나불거리고 있어!” 

 

 그치만 무크로 님이…,” 

 

 타악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크롬의 목소리는 멎고 대신 경쾌하고 시원스런 타격음이 났다. 짜증이 날 대로 난 M.M이 씩씩거리며 말하고 있떤 크롬의 뺨을 냅다 후려친 것이다

 

 으읏…,” 

 

 뭐야, 약한 소리나 내고 있어!” 

 

 애꿎은 크롬을 계속 닦달해대는 M.M이었다. 하지만 크롬은 몸은 나약했을지언정 기는 전혀 죽지 않은 모습이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M.M은 계속 씩씩댈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크롬이 갑작스레 화제를 돌렸다

 

 “…저기…, M.M …,” 

 

 ?” 

 

 그 차림은……?” 

 

 히이이이이이익!!” 

 

 크롬이 묻자, M.M이 갑자기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펄쩍 뒤로 물러났다

 

 “…?” 

 

 하지만 정말로 그런 M.M의 심정을 모르겠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크롬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코스프레. 코스프레라고.”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M.M이 드디어 대답했다

 

 코스프레…?” 

 

 으아아아!!” 

 

 연신 갸우뚱거려대기만 하는 크롬의 모습에 M.M은 다시 열을 내며 신음 섞인 비명  절규 을 질렀다

 

 코스튬 플레이! Costume play!” 

 

 아아….” 

 

 그제서야 이해한 크롬이 두어번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밀려오는 성취감에 M.M은 스스로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예뻐요….” 

 

 ?” 

 

 희고 아름다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던 M.M의 피부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 순수한 쑥스러움으로

 

 , 별로, 너 따위가 그렇게 말한대도 전혀 기쁘지 않거든!” 

 

 퉁명스럽게 M.M은 내뱉었지만, 크롬의 낯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크롬이 말했다

 

 그건 츤데레라고 하는 거죠?” 

 

 하아?!” 

 

 저번에 치쿠사가 알려줬어요. 그게…, , ! 에다가, 데레, 데레! …라고!” 

 

 틀려!” 

 

 어라? 아닌가요…?” 

 

 아니, 츤데레는 그게 맞는데…! 으으…….” 

 

 다시금 열을 올리는 M.M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쿡쿡’, 크롬이 소리죽여 웃었다

 

 ! 뭐가 그렇게 웃긴데!”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그보다…, 무척 잘 어울려서…,” 

 

 ?!” 

 

 , 사쿠라 쿄코…. 틀렸나요?” 

 

 크롬이 소심하게 말한 이름에,  렌즈를 낀 M.M의 붉은 두 눈이 휘둥그렇게 띄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거야?!” 

 

 학교에서 유행해서…, 저번에, 켄과 치쿠사가 볼 때…, 같이 봤어요!” 

 

 켄이랑 치쿠사 이 놈들, 괜히 이 녀석한테 쓸데 없는 거나 보여줘서는. 열을 내며 소리지르는 데에도 지친 M.M은 이제 속으로만 씩씩거렸다

 

 그럴 때쯔음,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쿄코 씨! 뭐하고 계세요! 사진사분께서 마미쿄코 트윈 찍고 싶으시대요” 


으엑!” 

 

무심코 소리친 M.M은 그런 자신 앞에서 싱글싱글 웃어대는 크롬을 보니 뻘쭘함이 치밀어와,떠듬거리며 어떨떨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 촬영 가야된다. , 그럼 이만 간다." 

 

그리 말하고는 등을 돌려 도망치듯 뛰어가던 M.M, 뒤에서 크롬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M.M." 


"
? ." 

 

고개만 뒤돌아보며 M.M이 대답했다

 

"그 촬영 구경해도 되요?" 


"
마음대로 해. 따라오든지." 

 

무신경한 듯 말하는 M.M이 목소리에 잔잔히 녹여둔 기쁨을, 크롬은 알아챌 수 있었다

 

 

* * * 

 

 

"아아, 지인분 뵙느라 늦으셨구나. 지인분도 예쁘시네요. 코스해요?" 

 

금발의 마법소녀 - 토모에 마미 - 의 복장을 한 여자가 물어왔다.  M.M은 가벼이 대답했다

 

"실친이에요. 코스는," 


"
안 해요." 

 

저도 모르게 M.M의 말을 끊고 말해버린 크롬은 뒤늦게야 황급히, 조신하게 가는 두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토모에 마미(를 코스프레한 여자)는 웃음을 터뜨린 뒤였다

 

"으으…. 죄송…, 해요." 

 

쥐어짜내듯 크롬이 말했다. 그러자 토모에 마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뜻밖의 제안을 했다

 

"마도마기 좋아하시는거죠? 저기,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실은 저희가 마도마기 팀코기는 한데 사야카가 공석이거든요. 사야카 마법소녀 버젼은 없고 마도카분이 헷갈리셔서 가져오신 교복이 한 벌 여벌이 있는데, 사야카 안 뛰실래요?" 

 

제안을 받은 크롬의 두 눈망울이 평소보다도 더 크게 뜨였다. '어떻게 하죠?' 묻듯, 그녀는M.M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자 M.M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야, 나더러 어쩌라고. 네가 하고 싶음 해." 


"
, 할래, ." 


"
." 


"
, 아뇨!  M.M씨가 불편하시다면," 


"
, 임마." 

 

쿨하게 쏘아붙이고는 M.M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가발이랑 머리핀은 있어요? 보시다시피 얘 눈병신이라 한쪽 눈 가려야 될 것 같은데….

 

토모에 마미가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진짜 눈병때문에 안대 차신 거였구나. , 괜찮아요! 제가 팀코 끝나고 또 미쿠 찍을 게 있어서 컷가발 파란 게 있거든요. 그거 아마 앞머리 한쪽으로 넘기면 촬영퀄 나올 정도로는 가려질거에요." 

 

"그럼 빨리 얘 옷 주세요. 시간도 별로 이제 얼마 없잖아요. 마도마기니까 쿄사야는 몇 장 건져가고 싶은데." 

 

재촉하는 M.M에게 토모에 마미는 "알았어요." 대답하곤 그 큰 울림통으로 소리쳐 불렀다

 

"마도카씨! 갖고오신 교복 좀 빌려주세요! 방금 사야카 캐스팅 성공했어요!" 


"
, 진짜요? 알았어요! 지금 교복 찾아서 갖고갈게요!" 

 

대답하곤 가방을 뒤적거리던 카나메 마도카(의 코스어; 역시.)가 금세 잘 만들어진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만의 특이한 디자인의 교복을 꺼내왔다. 마찬가지로 가방을 뒤적거려 가발을 찾아낸 토모에 마미가 교복과 함께 가발을 크롬에게 건네었다

 

"가발망은 또 없는데 아마 그쪽 머리스타일 보니까 망 없으셔도 될 것 같아요. 아 맞다, 핀은 그냥 쿄코씨가 오늘 하고 오셨던거 써야될 것 같아요. 그럼 지인분 탈의하시는 거 도와주시고 오세요!" 


 "
으으, 귀찮게시리. 알았어요. , 나기, 따라와. 탈의실 가자."

 
차마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를 상스러운 별명으로 칭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또 그렇다고 그녀를 '무크로쨩'이 지어준 특별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도 없었는지,  M.M은 크롬을 그녀의 본명으로 불렀다. 잠시 뜸을 들이던 크롬은 이내 고개를 끄떡이곤 M.M을 쫓아갔다

 

 

* * * 

 

 

우와, 예쁘시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일시적으로 미키 사야카라는 세 번째 이름을 얻은 크롬을 본 토모에 마미와 카나메 마도카가 동시에 감탄했다. 원본과는 차이가 꽤 있었지만, 그 이전에 모델 자체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 평가였다. 

 

 , 고마워요….” 

 

 , , 진짜 예뻐요! 아까전부터 쿄코 씨가 나기 씨…, 맞나? , 그냥 여기서는 편의상 사야카 씨라고 부를게요. 사야캬 씨랑 트윈 찍으시려고 벼르고 계시던데. 얼른 찍고 오세요.” 

 

 토모에 마미가 재촉의 의미로 미소지었다. 크롬은 멀뚱멀뚱, 빨갛게 상기된 M.M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못생긴 호박이라면서….  

, , 상관 없잖아! 의외로 옷 예쁜 거 입혀놓으니까 괜찮더라고 말야! 그리고 딱히 너 말고 캐릭터  사야카랑 찍고 싶은 거거든? 오해하지 마!” 

 

….” 

 

으훗. 저도 모르게 뿌듯해진 크롬이 조금 웃었다. 뭐가 웃긴데?! M.M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고, 그 뒤에서 크롬은 더 웃을 뿐이었다.  

 

 

무척 운 좋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무크로 님. 이것도 전부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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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18)


 "츠나 군."

 "무슨 일이지, 백란?"

 

 필살환을 넘겨삼키며 사와다 츠나요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와 더불아 주위 공기도 함께 무거워지는 듯했다.

 

 "아마 조만간, 나는 또 한번 난장판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서, 미리 말해두려 왔지."

 "난장판이라니. 무슨 소리야."

 

 하하하하. 백란이 경쾌하게 웃어제꼈다.

 

 "질렸어."

 

 백란의 눈이 번뜩였다.

 

 "심심하다고. 질렸다면, 역시 혁명이 필요하단 말이잖아?"

 "그래, 철 좀 들으세요. 타케시가 말하길, 네가 달라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성장한 줄 알았더니만, 아직도 정신나간 쾌락주의자 그대로잖아."

 "어머나."

 

 하아, 한숨을 내쉬며 츠나요시는 자신의 앞에 앉은 새하얀 남자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원하는 게 뭐지? 당장 다시 죽여드리기라도 할까?"

 

 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경쾌함을 밀어내듯 조용한 공간에 다시금 외로이 울려펴졌다.

 

 "츠나 군. 너무 오랫동안 마피아에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윤리관이 흐려진 거 아냐? 그렇게 가벼이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시끄러워. 웃기지 마, 대악당 주제에. 사람이었어? 신세계의 신이 아니라?"

 "… …."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소년에게 멱살을 잡힌 청년 - 백란은 간단히 눈을 휘어 비웃을 뿐이었다. 무언의 비웃음은 츠나요시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니, 저 남자는 거짓말쟁이다. 사기꾼이다. 속아넘어가선 안 된다. 나는 선량하다. 그는 반복해 외치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다메츠나, 다메츠나. 그는 계속해 고했다. 선량하며, 때로는 호구가 되기도 하는 얼빵하고 순진한 소년, 사와다 츠나요시.

 

 그에겐 영원으로 느껴진 몇 초간의 침묵이 지나고, 백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매우 의외의 발언으로써, 적어도 츠나요시가 예상하지는 못한 말이었다.

 

 "츠나 군, 사랑은 멋진 거야."

 "…로맨스 영화라도 보고 왔나? 아니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던가?"

 "…." ("어느 쪽일까?")

 "아무래도 후자라고 생각된다. 누군지 맞혀보기라도 하라는 건가?"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형태로 돌아가는 상황에, 츠나요시는 초조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현기증이 났다.

 

 "호오, 좋아!"

 

 하지만 그런 츠나요시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실제로도 그러했겠지만), 백란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츠나요시는 그의 보라색 눈은 투명해서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니. 틀려?"

 

 대화의 내용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이것은 초직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만큼씩 츠나요시의 초조함도 더해져갔다. 필살 모드인데도 여전히 멍청한 게 짜증난다고 츠나요시는 생각했다.

 

 "우와, 맞았어! 그럼 츠나 군도 초조한 것 같고. 슬슬 본론으로 돌아가자."

 "응……."

 

 츠나요시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니쨩은 평화주의자야. 그래서 그 애를 - 아니, 그녀를 사랑하는 동안, 나의 마음에도 평화스런 봄이 찾아온거야. 가을과 겨울을 넘어서.

 

 그래, 내 마음은 여지껏 여름에 있었어. 여름 말이야; 지독하게 더운. 그 속에서 나는 새까맣게 타고 있었어. 그녀는 내게 봄을 가져다줬어. 나는 녹을 수 있게 되었지. 타는 나날과는, 이제 끝이야.

 

 …아니, 끝이었어. 계절은 지나, 다시 불타는 여름이 왔다. 일본은 온대 기후잖아? 흔히 말하는 그거지; 사랑이 식었다. 아니, 틀린가? 뭐, 난 초보니까."

 

 백란이 츠나에게 눈빛 - 신호를 주었다.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내 대사가 끝났으니. 그래서 츠나요시는 대답했다.

 

 "……그래…."

 

 또다시, 얼빠진 대답이었다. 백란은 하는 수 없이 그것에 만족했다.

 

 "세계 재창조라던가, 그런 짓은 다시 안 하니 걱정 말아. 그건 허무맹랑한 짓이라는 게 이미 증명되었으니까."

 

 눈빛; 신호.

 

 "어어."

 

 얼빠진 대답. 이 시점 - 백란이 갑자기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는 - 에서, 츠나요시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대규모 어린이 납치 같은 소소하고, 바보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할 지도 모르고, 아님 무크로네들이랑 어울려서 마피아 소탕? 그런 것도 조금은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어이, 의미없는 범죄는 그만둬."

 

 하하하! 웃음소리만 공허하게 울린 공간은 여전히 경쾌함을 따돌리고 있었다.

 

 "마피아 소탕은 범죄가 아니라고, 이봐? 뭐, 좋아. 지금은 아직 환절기인걸."

 

 '읏챠'하며 백란이 자리에서 일었다.

 

 "기만당한 내 사랑을, 여름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한번 긁어모아주지 않을래?"

 

 제법 '오글거린다'고 할 수 있을 법한 대사였지만, 츠나요시는 그다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떠나가는 백란에게 말했다.

 

 "철 좀 들고 스스로 정리해."

 

 대답은 돌아오지 않은 채로 백란은 사라졌고, 문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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