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스트리밍 종료를 클릭하자마자 미소라의 얼굴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미소라는 사실은 팬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상하고, 기분 나쁘고. 단편적이고 인위적인 이미지를 수긍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아가서는 광신하는 남자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호응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팬은 미소라에게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필요하기 때문에만 두는……싫은 쪽이다. 이스루기 미소라는 이성적이고, 의심 많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무심코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라는 뜻이다.

 찰칵, 찰칵. 두 번이나 찍히고 나서야 미소라는 자신이 무심코 타키가와 사와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자의 카메라라는 사실조차 일순 잊고 있었다. 팬들에게 필요 이상의 먹이를 주는 것만큼은 싫은 일인데도.

 찰칵. 그리고 미소라는 세 장, 네 장째의 사진이 찍히도록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무심코가 아니었다.

 자신이 카메라를 향해 웃기에 사와가 웃는지, 사와가 웃기에 자신이 카메라를 향해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기억을 잃은 수상한 물리학자의 미소에 걸었듯이, 또 한 번 미소에 걸기로 했다.

 사와처럼 환한 미소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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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7)

 

 “그럼, 그럼……”

 주방을 뒤적거리는 타키가와 사와를 확 노려보는 이스루기 미소라. ‘어디까지나 우리 정체를 밝히지 않을’ 기사에 연구실에 대한 내용은 전혀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한 센토 때문에 ‘본격적인’ 것은 취재할 수 없게 되었지만, 작은 사실도 부풀리면 특종이라는 것이 사와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메뉴판을 꼼꼼히 받아적기도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하고 커피포트를 들춰보기도 하고.

 “그렇게 뒤져봐야 아무것도 안 나오고.”

 “특종과 특종이 아닌 것의 차이는 사실의 크기가 아닌 관점의 넓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생각은 완전 금물!”

 기자의 철학을 한쪽 귀로 흘리며 미소라는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하다. 어떻게 조용히 시킬 수 없을까. 센토, 귀찮은 걸 데려와서는. 문을 열어놓는 멍청이는 또 어떻고. 어떻게 조용히 시키고 돌려보낼 방법이…… 앗, 이어졌다.

 “그럼 차라리 커피라도 마시고 빨리 가버리는 게 낫겠고. 늦은 기사는 아무도 관심 없고.”

 “어어, 그래도 나는 좀 더 천천~히 구경하다 가고 싶은데!”

 “좀 더 빨~리 갔으면 좋겠고.”

 적당한 컵을 집어 포트에 있던 커피를 아무렇게나 따라서 뻔뻔스러운 기자에게 건네었다. 미소라의 불친절한 눈빛을 마주 본 사와는 살짝 웃었다.

 “설탕 넣어줘.”

 “이것저것 요구하고, 최악이고.”

 불만을 곱씹듯이 중얼거린 미소라가 각설탕 두 개를 퐁당퐁당 빠트렸다. 사와는 말없이 팔에 튄 커피 방울을 닦아내었다.

 “사장님은 저쪽?”

 웃었다. 미소라는 그에게 미소를 뺏긴 것처럼 한층 인상을 구겼다.

 “식기 전에 마셨으면 좋겠고.”

 미소라의 재촉에 사와가 잔을 들었다. 후, 후, 하고 두 번 불고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댄다. ‘드디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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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3


1. Time is Running Out


 쥰은 늘 시간에 예민했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이 절대적이며, 방심하면 모든 것을 헤집어놓는 첨예한 것이라는 것을 쥰은 아주 잘 알았다. 세상은 무지하게도 아주 느긋했지만, 쥰은 그들과 달랐다. 쥰은 시간에 익숙해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다.

 포켓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신지의 발끝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 트레이너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쥰은 화가 났다. 포켓몬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 정성을 다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시간의 무서운 점은 뭐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점이다.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변하기 전에 움직여야만 한다. 강하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변하기 전에, 혹은 강함이 변하기 전에.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내일의 자신은 앞지를 수 없지만, 쥰은 달렸다. 10초 정도라면 앞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초 전. 9초 전. 8초 전…


2. 긴 햇빛 속에 있다보면


 히카리.

 코우헤이는 그 이름이 참 좋았다. 그 주인과 꼭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히카리는 참, 밝고 눈부신 사람이었다. 코우헤이는 그 사람이 참 좋았다.

 작은 인연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뒤바꾸어놓았는지,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예정조화처럼 평탄하게 흘러가던 삶에 당신이 얼마나 햇빛처럼 쏟아졌는지, 그러자 사각형 인공공간 같은 삶에 어떤 계절들이 생겨났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것이기에, 코우헤이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코우헤이는 펜을 들었다.

 ‘코우헤이’가 공평하다는 뜻인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십 년을 살아도 삶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포켓몬을 받고 여행을 떠나면 무언가가 생기리라 기대했는데, 여행을 떠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그저 평이해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히카리’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그 단단한 삶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 거 있죠.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역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하게 돼요.

 태그배틀 때, 당신을 처음 만나고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로 당신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계절이 참 느릿했는데, 여름에 만난 당신이 얼마나 기적 같던지. 더운 공기와 아지랑이 속 당신의 모습이 꼭 꿈처럼 지나갔어요.

 이제는 가을이 한창인데, 계절이 또 느려졌어요. 사실 지금껏 상대성이론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증명해주었어요. 히카리상. 지금도 당신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요? 저는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또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전부 당신과 만나고서부터예요.



3.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줘


 확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 화석이 되었을 때쯤 캐내어줄 의향은 있었다.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하듯이, 효우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은 화석에 대한 모욕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평소에 다른 무언가가 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다 폭력적인 생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화석은 효우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 평소에 누군가가 화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은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토우간 그 자식은……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화석을 캐기조차 싫은 날은, 무조건 토우간의 책임이었다. 화석에 대한 열정마저 놈에게서 물려받은 성질이라 생각하면 혐오스러웠다. 효우타의 표정이 어두운 날이면, 탄광의 작업원들도 알아서 그가 돌아갈 때까지 말을 걸지 않는 배려를 보였다. 쿠로가네시티에서 어느정도 지낸 사람들은 다 현 짐리더와 전 짐리더의 집안사정을 알았고, 누가 보아도 압도적으로 전 짐리더 쪽의 잘못이 컸다.

 ‘화석이 좋다!’ 하고 무식하게 외치곤 하는 아버지는, 그런 식의 고백으로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일까. 다음주는 결혼기념일이다. 효우타는 미오시티로 가서 토우간 녀석을 집으로 끌고올 생각이었다. 변명은 받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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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18


뉴욕. 타치켄-> 켄하지, 뭇타치. 근데 뉴욕이 어떤 데였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영화 좀 보자.


타치바나 : 화학 전공, 인턴 약사. 진학하고 싶어함. 켄자키와는 대학 동기. 이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 켄자키와 동거 중.

켄자키 : 화학 전공, 대학생, 주유소 아르바이트생. 타치바나 하나만 보고 뉴욕까지 왔다. 타치바나보다는 적응력이 좋아서 일본인 친구도 미국인 친구도 꽤 사귀었다. 타치바나와 동거 중.

하지메 : 아마네라는 여아와 함께 거주 중인 신원불명의 남성. 본인 명의의 것이 아닌 계좌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네 : 하지메와 동거 중인 여자아이. 아버지가 실종된 도시인 뉴욕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한다. 공립 초등학교 재학 중.

하루카 : 아마네의 모친, 도쿄 거주민. 일본에서 생활하며 하지메와 아마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

 무츠키 : 일본인학교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 농구부. 자존감 부족, 우울증, PTSD.

 노조미 : 무츠키의 유일하다시피한 친구. 무츠키의 적은 죽인다.


 타치바나 사쿠야를 뒤쫓아 뉴욕시로 온 켄자키 카즈마는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만큼 심신이 야윈 그를 마주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자키는 기꺼이 타치바나를 안고 둘은 서로를 격려하는 생활을 한동안 유지하지만, 혜성처럼 나타난 아이카와 하지메는 켄자키를 별처럼 끌어당긴다. 타치바나는 켄자키에게 자신도 넉넉하지 않은 주제에 신원불명의 하지메를 챙길 때냐고 핀잔하지만 켄자키는 이미 하지메로부터 떨어트릴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버림받은 기분의 타치바나가 우연히 만난 것은 카미조 무츠키라는 이름의 고등학생. 밤중에 방황하는 버릇을 가진 그를 켄자키는 긴말없이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타치바나는 그에게 마음이 동해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무츠키는 타치바나의 틈을 파고들듯이 그를 더 깊게 끌어당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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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1

무슨 글을 영어로 써놨는데

AO3에 올리기엔 영어를 너무 못해서 여기다 올림;


T/W: Gang violence, swearing


Team Gaim



 “The fellas out there think we’re crap. They think we’re society’s trash. What’s worse is that some of us Beat Riders are actually crap. Talk about fuckin’ reputation… but bottom line―we’re not gonna be that. We, Team Gaim ain’t gonna be no piece of shit. We’re here to dance, and when we fight, we fight to protect our stage.”


‘What’s worse is that some of us Beat Riders are actually crap,’ Mitsuzane suddenly remembers his team leader’s words. Actual crap. That was what was in front of him now. Mitsuzane doesn’t understand how a person can be made of just violence and arrogance, but what he does understand is that his opponent would cut him into ribbons without hesitation if he couldn’t get out of this.

 Mitsuzane makes a bet that even a creature of pure ignorance would understand fear.

 “Mister, do you see me? Not only do I look little, I am actually quite young, and in other words I am a legal minor. You must be aware what happens when you’re caught abusing a minor? And you’re not gonna get away from this either, ‘cause I know who you are. I know exactly who you are. I’m sure you aren’t willing to bust me when your whole life ahead of you is at stake, are you?” Mitsuzane tries to sound calm, sound smart, sound like he knows what he’s talking about. He tries to sound like he’s going to university―which he will, too.

 And then the Red Hot idiot starts to laugh, and Mitsuzane knows things have went wrong. The Red Hot keeps laughing and laughing, as if Mitsuzane said something hillarious. At last Mitsuzane can’t stand it: “What’s so funny?”

 “Minor? You say you’re a fuckin’ what? A fuckin’ minor? You think any of us give a fuck? You think you’re a minor―you think you’re a fuckin’ child. But you know who else is a fuckin’ child? Beat Riders! Every single one! You don’t become one if you ain’t a fuckin’ kid! Face it, you’re a Beat Rider because you’re a fuckin’ kid, and you know kids ain’t scared of busting another kid.”


 “Mitchey!”

 The moment Mitsuzane heard the voice, he realized he was saved. It was like a moment of baptization, when one realizes Christ’s love for them or something. The feeling that resonated within the heart the moment Mitsuzane heard the voice, the moment he saw the well-known figure storming into the alley.

 “Kouta-san…!”

 “Now who the fuck is this? A watchdog?” The Red Hot still got his attitude, and he’s still confident he can beat the hell out of Gaim with his slightly crazed up eyes and his other Red Hot friends. But Mitsuzane is no longer afraid. He’s got Kouta, and Kouta means victory. In physical rumbles at least, where humans fight humans and no Inves is related, that was how things worked.

 “Well, I guess that could be sorta true,” Kouta laughed a half-hearted laugh. Not even a bit nervous. And Kouta’s laugh is different from the Red Hot’s. It’s the kind of laugh that warms hearts, makes people smile and sometimes cry at the same time. “I’m not really a dancer anymore, and so I guess I’m sort of only a half-Gaim.”

 Kouta pauses his words to help Mitsuzane get up. Mitsuzane takes Kouta’s hand, and it’s warm.

 “You see, although I don’t dance anymore I’m still in shape ‘cause I work a lot,” Kouta states, calmly. “And I think that means you don’t really wanna mess with me.”

 The Red Hot snorts out a scornful laugh, and then it’s a fight.

 Kouta never really lost one of those.


 Kouta brings Mitsuzane back to the garage, and Mitsuzane feels truly home. And then Mitsuzane is suddenly honest. He starts to cry and he can’t stop it, so instead he grabs onto Kouta as he lets the hot tears run down his cheeks. Mitsuzane sniffs and Kouta smiles, and he gives his Mitchey a light but warm hug.

 “Kouta-san, I-I thought I’d be busted. Shit, I was so scared,” Mitsuzane rambles as he grips on Kouta’s jacket, “I was so scared.” The poor boy is shaking, so Kouta pats him on the back. “F-fuck… Oh, fuck… I-I’m sorry I m-made you worry… I fucking… I fucked up so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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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포켓몬 레인저 바토나지, 아이스 x 이오리



 「레인저보다 먼저 아루미아의 성에서 푸른 돌을 찾아오라.」


 아이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지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근 씹은 입술에서 피가 날 것 같은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는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보았다―곧 수업시간이다. 이오리 박사가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이스가 의자를 돌려 이오리를 본다.


 “오. 어서와, 이오리 박사.”


 아이스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앉아있다. 이오리가 꼬링크처럼 쫄래쫄래 다가온다. 아이스는 이오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이스 씨. 잘 주무셨나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도 성장에 있어서 공부만큼 중요하다고, 레인저 스쿨 시절 미라카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피곤해 보여?”

 “글쎄요?”


 아이스의 물음에, 이오리가 아이스를 뜯어본다. 듣고 보니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과 수려한 미소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약간?”

 “하하, 그래. 그럼 바로 프로그램 얘기로 들어갈까. 수열 프로그램, 도전은 해봤는데 어떠려나.”


 아이스가 메일 창을 최소화시키고 코딩 프로그램을 켠다. 검은 화면에 형광 초록 글씨가 한 편의 시처럼 이어져있다. 이오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글씨들을 읽어내린다. 아이스는 이오리의 집중하는 표정에 집중한다. 프로그래밍은 흥미롭지만, 아이스에게 있어서는 프로그래밍보다 이오리 박사가 더 흥미롭다.

 뭐니뭐니해도 이오리는 아이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타인이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 자체가 새롭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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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23


 “난 너희가 네크로즈마를 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와서 쓸 만 할 것 같으니까 다시 가져가겠다고?”

 안에 든 포켓몬을 보호하듯이, 아이가 몬스터볼을 그러쥐었다.

 이질적이고 차가운 눈매가 날카롭게 쏘아보았지만, 아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너희한테는 이 아이가 물건으로 보이니?”

 “우리를 적대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너희가 네크로즈마를 상처입혔기 때문이야.”

 아이가 다른 한 쪽 손으로 다른 몬스터볼을 잡았다.

 “이 이상 끈질기게 군다면, 힘을 써야겠는걸.”

 “……그만두지.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겠어.”

 “머리는 잘 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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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9


 니시키노 마키는 가볍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아파트 방은 깜깜하다―별로 의외는 아니다. 거실에 인기척은 없는데 음량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번뜩 빛난다.

 '오늘도 이거란 말이지.'

 니시키노 마키는 경험의 결과로 이 게임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시험도, 피아노도, 라디오 토크도, 댄스도, 이런 것도 반복 학습을 하면 숙련되는 법이다. 마키는 진정으로 노력한 분야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승리하리라 믿는 일종의 오만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마키였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마키는 야자와 니코가 사는 아파트 방의 스페어 키를 쥐고 있었다.

 마키는 좁고 어두운 거실을 성큼성큼 지나 하나뿐인 침실로, 그리고 침실에서 이어져 있는 욕실 안으로 발걸음했다. 어두운 집안에서도 가장 컴컴한 욕실에 발을 들이자, 작은 파도 소리가 연약하게 마키를 반겼다.

 마키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욕조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처량하게 가라앉아있는 자신의 연인을 마주한다. 빨간 홍채가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밝다.

 "안녕, 니코."

 나지막한 미성이 작은 욕실에서 먹먹하게 메아리친다. 니코의 눈이 힘없이 휘어진다.

 "안녕, 마키쨩."

 마키가 조심스럽게 욕조에 손을 담근다. 물소리가 잔잔하다. 이미 차게 식은 온도다.

 "감기 걸리겠다, 우리 니코니."

 "마키쨩은 의사니까, 어떻게든 해 주겠지."

 "바보한테는 약도 안 들어요."

 마키의 섬세한 손가락이 물속을 헤매다가, 이내 니코의 뺨에 자리 잡는다. 부드럽고, 물기 있고, 찬 볼살을 어루만진다. 참 작은 얼굴이다. 니코의 아기자기한 손이 마키의 길쭉한 손 위로 겹쳐진다. 그렇게 손을 매만지다가, 니코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마키를 부른다. 마키이……

 니코가 살짝 상체를 틀어 가슴을 조금 내민다. 툭 튀어나온 갈비뼈와 비슷한 높이에 유두가 솟아 있다. 마른 몸이다. 마키의 시선이 머문다. 니코는 입술을 핥는다. 마키의 손이 니코의 턱선을, 쇄골을 타고 내려가는 도중 니코가 벽을 향해 몸을 비튼다. 마키의 손이 반사적으로 멈춘다.

 "니코니는 아이돌이니까, 만지면 안 돼애."

 ―나른하게 웃는다.

 마키는 타이르듯이 "그래, 그래." 흥얼거리며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물속에서 검은 머리칼이 해초처럼 손가락에 감긴다. 야자와 니코의 얇은 목과 경추를 관찰하며, 마키는 정형외과학도 썩 나쁘지 않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나가야지. 감기 걸려, 정말로."

 "싫어."

 니코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마키는 알아본다.

 "마키쨩도 이리 와."

 마키가 몸을 조금 일으키고 상체를 한층 기울여 간신히 욕조 밖에서 니코에게 닿는다. 니코의 팔이 마키의 목을 끌어안는다.

 마키의 입술을 부드럽고 립밤의 체리 향이다. 니코의 것은 거칠고, 수돗물 맛이 난다.

 "마키쨩."

 "왜."

 "이대로 같이 죽자."

 붉은 눈빛으로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인다. 불현듯 마키는 특정한 충동에 휩싸인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니코의 얇은 목을 휘감는다. 그 순간 야자와 니코가 눈부시게 웃는다. 라디오 토크 쇼처럼 대부분이 역할극이다. 마키가 겨우 기별이 갈 만큼만 손을 조이자 니코가 포르노 배우 같은 소리를 낸다.

 "가버리겠어, 마키쨩."

 거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연기하는 니코의 이마에, 마키가 가볍게 딱밤을 때린다.

 "의사로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 자, 일어나자."

 블라우스 소매가 젖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키가 팔을 뻗어 욕조 마개를 뺀다. 식은 지 오래인 물이 소용돌이치며 쪼르르, 쪼르르, 빨려내려 간다.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자 니코의 작은 몸이 고슴도치처럼 부르르 떤다. 마키는 마른 수건을 가져와 니코의 등에서 시작해서 물기를 닦아낸다.

 마키가 일으키자, 니코는 '영차' 하며 멍한 몸을 일으키는 데에 협조한다. 야자와 니코에게 있어서 몸이란 아무리 작아도 무겁게만 느껴져 온 물건이었다. 중력에 힘겹게 맞서는 몸을, 마키가 곁에서 지탱하기에 가까스로 움직여 미끄러운 욕실 밖으로 나간다. 물에서 나오니 집안이 과하게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제야 니코는 자신이 텔레비전을 틀어두었음을 기억한다. 거기에 더해, 마키가 전등을 켠 탓에 눈까지 부시다. 니코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마키는 니코의 옷 서랍에서 어렵지 않게 속옷을 뒤져낸다. 버터 색 잠옷 원피스는 매트리스 위에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팬티와 원피스를 입히고 열팍한 팔을 폴라 플리스 카디건의 소매에 꿰는 것까지의 과정은 꼭 인형 옷을 입히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 마키가 거실로 나오고, 이제는 제법 균형을 되찾은 발걸음으로 니코가 뒤따른다.

 니코가 따라오자 마키는 텔레비전을 끄는 대신, 소파에 앉는다. 낡았지만 2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이다. 0.5인분짜리 크기의 니코가 마키에게 딱 다가붙어 앉는다.

 브라운관 안에서 스쿨 아이돌이 춤춘다.

 저것 또한 야자와 니코, 그리고 니시키노 마키다.

 춤추는 도플갱어를 노려보며, 야자와 니코는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약하게 만들었는가에 관해 곰곰히 생각한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지금 TV 모니터와 보라색 눈동자에서 절찬 재생 중인 무대 위의 광경과 여동생 두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 오늘도 자신을 구원한 수려한 옆얼굴을 본다. 또 한 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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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5


1.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스는 그대로 아오이 아키라의 삶에서 사라졌다.

당연하지 않게 셀렉터 배틀은 다시 한번 시작되었고

전혀 당연하지 않게 잘난 체하는 표정 그대로 인간이 된 피룰루크가 돌아다니기도 했고

배틀에서 좀 졌다고 해서 몸이 손끝부터 사라지는 아주 이상한 일도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스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우라조에 이오나는 썩 담백한 얼굴로 카메라 플래시의 세례를 받고 있었고 진작에 촬영이 끝난 나는 아직 인형탈을 갈아입지 않은 채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증오하던 그 이오나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사랑하던 우리스는 어디로 간 걸까.

싫어하는 것은 늘 간단했다. 뭐든 마음에 안 들기는 쉬운 법이니. 이를테면 피룰루크를 싫어했다. 그리고 된통 당하고 더 싫어졌다.

하지만 증오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어쩌면 사랑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오나 이상으로 누군가를 증오해본 적도, 우리스 이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이오나는 나를 셀렉터로 만들었고 셀렉터가 된 나는 외상을 입었고 우리스를 만났다. 우리스를 만난 나는 아주 러블리해졌고…

당연하단 듯이 아오이 아키라만 빼고 모든 게 없어졌다. 이오나도 셀렉터도 외상도 우리스도 도루묵. 사람은 왜 사는 걸까. 구르고 구른 끝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게 섭리라면 왜 시간은 앞으로 가는 걸까. 산다는 건 죽어가는 일밖에 안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침울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우리스 너는 좋아할까.

그런데 나는 아주 잘 살아있어.

만일 우리스가 알게 된다면 기뻐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잘 살아있다.


2.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손가락, 인간의 머리카락, 인간의 눈과 인간의 혀,

인간의 심장과 인간의 몸무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문득 둘러보니, 둘러보는 그것이 인간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경로로든 몸을 가지게 된다면 미카게 한나, 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쇼윈도에 비친 얼굴은 그 누구의 모방도 아니었습니다.

나나시, 라고 납득한 이유는, 실은, 몸이 없는 자는 이름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몸과 영혼은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른바 유물론(唯物論). 사토미 코우 안에 들어간 카니발님이라거나 끈질기게 자신은 카니발, 이라고 하지만 영락없이 사토미 코우이지요. 영혼이란 그런 것입니다. 몸의 일부. 

아무튼 이렇게 되니 당황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한나님, 이렇게 되었는데도 나는 당연하게 나나시인가요?

만나면 물어봐야지. 만나러 갈 수 있다. 아주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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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6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소년 시절의 레이지에게는 고맙게도, 신지는 어려서부터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돌이켜보면 레이지가 신지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남자가, 울면 얕보이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울면 안 돼.’


 포켓몬을 모으고, 배틀을 하고, 짐뱃지를 모으는 일로 바빴던 시절이었지만 레이지는 항상 기념일에는 쉬도록 일정을 조정했다. 신지의 생일, 자신의 생일,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지가 외롭지 않도록,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모텔 방에 작은 트리를 갖다 놓고, 전구를 둘러놓고, 촛불을 켜두었다. 라디오를 틀면 캐롤이 흘러나왔다. 식탁에서 신지와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튿날 아침에 신지가 깨어나면 발견할 수 있도록, 베개 옆에 선물을 가져다 두었다. 울지 않은 신지에게.


 언제부터 동생과 단둘이서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진 걸까. 포켓몬과 더불어 사는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너무나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인간들이 어느 날엔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레이지도 신지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아, 이제부터는 혼자구나. 그런 생각을,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레이지는 회상한다. 신지도 울지 않았다.

 신지가 울었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지, 레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

 

 눈처럼 하얀 생크림으로 덮인 초콜릿 케이크를 자르던 레이지가 문득 말한다.


 이제 울기에는 너무 많이 커버린 것 같은 신지가 레이지를 올려다본다. 양초의 불이 흔들린다. 레이지를 마주 보고, 신지는 살짝 웃는다.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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