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2

[제목은 Nirvana의 Heart-Shaped Box로부터. 키미키메 개인지에서 이어지는 설정이 있습니다.]


죽음은 끔찍한 발상이다.


크로스는 힘겹게 발을 내디딘다. 다리는 철근처럼 무겁게 올라가고 덜 마른 피가 피부와 옷가지 사이에서 지독하게 진득하다. 걸음이 휘청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곁에서 포켓몬이 함께 걷는다. 포켓몬의 숨결이 다리에 닿아올 정도로 가까이에서 걷는다. 무거운 숨. 루가루암이 침을 넘긴다. 숲은 고요하고 그 소리는 소년에게도 들린다.


우리가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


이대로 엠라이트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말로 꺼내어지지 않는다. 결코. 크로스는, 그리고 그와 길을 같이하는 짐승들은 일체의 약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유분방하게 뻗은 거친 나뭇가지나 뾰족한 바위에 찔려 생채기가 늘어날 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생각이 서서히 퍼지는 독처럼 머릿속을 잡아먹는다.


여기서 죽으면 어쩌지.


죽을 때까지 함께,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년과 포켓몬 사이의 관계는, 인연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포켓몬의 시선이 질기게 소년에게 고정되어있다. 들짐승의 시뻘건 눈빛을, 소년은 주춤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다.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각오이다.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약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신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굽어살피는 박애주의적이고 희생적인, 경전 속 상냥한 신 따위는 날조라는 것을 소년은 포켓몬과 함께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나약한 인간들이 지어낸 날조. 그런 것을 믿고 기도했던 세월이 걸음마다 무너져내린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를 주관적으로 편애하는 탐욕스러운 신―한낱 인간이나 짐승 따위, 일생 자신을 갈고닦아 죽음의 문턱에서야 신의 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년은 더는 경배하지 않는다.


살아서 신의 발치까지 기어올라, 끌어내리고,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일어설 것이다. 그 욕망만이 소년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할 생명에 가치 따위는 없었다. 이런 숲에서 쓰러질 정도라면, 영광 받을 자격도 없다. 도달해야 할 자리는, 오직 왕좌에, 여기에서 쓰러진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지는 숲의 밤 속에서, 루가루암의 두 눈이 충혈되듯 붉게 빛난다. 침이 묻은 뾰족한 이빨이 번뜩거린다.


여기서 쓰러진다면 저 어금니의 먹이가 되겠지.


소년이 낮게 웃었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포켓치의 배터리는 아직 살아있다. 전설의 포켓몬의 위치를 가리키는 마커가 아직 같은 곳에 멈추어있다. 분명히 이 숲속, 분명 이 근처. 감정의 신 엠라이트. 쓰러뜨려 주마. 쓰러뜨리고……




“……?”


녹색.


숲?


녹색…… 회색?


“아, 크로스. 눈을 떴구나.”


숲이 아니다―사람. 낯익은 얼굴.


“너는 죽고 싶은 거니?”


소우지.


크로스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실내다. 숲의 냄새도 전혀 없고, 대신


엷은 약 냄새가 감돈다. 과하게 깨끗한 냄새. 무엇이든지 잊어버리고 편안해지라고 강요하는 듯한 인테리어. 포켓몬센터. 온몸이 욱신거린다. 실려 온 모양이다. 살아있는 모양이다. 그치만 어떻게?


“운이 좋은 줄 알도록 해.” 숲 같은 녹색의 소년이 무기질적인 눈으로 내려다본다. “나도 엠라이트를 쫓고 있었어. 우연히 너와 비슷한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너는 죽었을 거야.”


소우지는 심각한 내용의 책을 읽듯이 말하고,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몬스터볼 속에서 루가루암이 뛰쳐나온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크로스는 루가루암에게 묻고, 소우지가 대신 대답한다.


“위급상황에서는 포켓몬을 몬스터볼에 돌려보내도록 해. 그렇게 하는 편이 포켓몬만이라도 안전할 수 있으니까.”


문득, 소우지가 얼굴을 구긴다.


“그리고 네 경우엔……”


루가루암이 제 파트너에게 담담한 시선을 보냈다. 불신과 동시에 신뢰인 눈빛. 다른 한쪽의 트레이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약한 녀석은 죽으면 돼.”


그렇게 뱉어내곤, 몸을 일으키려고 한 크로스의 움직임은 꿈틀거림에 그쳤다. 그 광경에 소우지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낡은 전자기기를 꺼냈다. 크로스의 물건이었다.


“입은 살았네. 그리고 포켓치는 압수야.”


“야!”


자신의 물건을 낚아챌 심산으로 기세 좋게 손을 뻗은 크로스였지만 물어뜯기는 듯한 통증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팔을 다시 내렸다.


“그러다간 팔을 잃을걸. 얌전히 쉬도록 해.”


“내 포켓치를 내놔라.”


“포켓치는 인간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지,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크로스.”


소우지가 허리를 숙여, 다른 한 명의 소년과 시선을 맞추었다. 은빛 호수 같은 눈이 단단한 금빛으로 넘쳐흐른다. 색소가 옅은 입술이 야무지게 움직여, 단호한 문장을 형성한다.


“우리는 동료야.”


고요하게, 무겁게 선언한 소우지가 금세 물러났다. 누워있는 채로, 크로스가 눈동자를 굴려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우지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멋대로.”


“내가 정한 게 아니야, 그렇게 되어버린 거지.”


신을 탓해도 좋아, 소우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크로스가 대답했다―나가라.


'Log > 2017~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WIXOSS] 이상하지 않은 일들  (0) 2019.02.05
[신지+레이지] 울지 않는 아이  (0) 2019.02.05
[신사토] 프레셔  (0) 2019.02.05
[효우나타] Born To Die  (0) 2019.02.05
[마레→쿠쿠] 별일  (0) 2018.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