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9


 니시키노 마키는 가볍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아파트 방은 깜깜하다―별로 의외는 아니다. 거실에 인기척은 없는데 음량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번뜩 빛난다.

 '오늘도 이거란 말이지.'

 니시키노 마키는 경험의 결과로 이 게임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시험도, 피아노도, 라디오 토크도, 댄스도, 이런 것도 반복 학습을 하면 숙련되는 법이다. 마키는 진정으로 노력한 분야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승리하리라 믿는 일종의 오만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마키였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마키는 야자와 니코가 사는 아파트 방의 스페어 키를 쥐고 있었다.

 마키는 좁고 어두운 거실을 성큼성큼 지나 하나뿐인 침실로, 그리고 침실에서 이어져 있는 욕실 안으로 발걸음했다. 어두운 집안에서도 가장 컴컴한 욕실에 발을 들이자, 작은 파도 소리가 연약하게 마키를 반겼다.

 마키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욕조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처량하게 가라앉아있는 자신의 연인을 마주한다. 빨간 홍채가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밝다.

 "안녕, 니코."

 나지막한 미성이 작은 욕실에서 먹먹하게 메아리친다. 니코의 눈이 힘없이 휘어진다.

 "안녕, 마키쨩."

 마키가 조심스럽게 욕조에 손을 담근다. 물소리가 잔잔하다. 이미 차게 식은 온도다.

 "감기 걸리겠다, 우리 니코니."

 "마키쨩은 의사니까, 어떻게든 해 주겠지."

 "바보한테는 약도 안 들어요."

 마키의 섬세한 손가락이 물속을 헤매다가, 이내 니코의 뺨에 자리 잡는다. 부드럽고, 물기 있고, 찬 볼살을 어루만진다. 참 작은 얼굴이다. 니코의 아기자기한 손이 마키의 길쭉한 손 위로 겹쳐진다. 그렇게 손을 매만지다가, 니코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마키를 부른다. 마키이……

 니코가 살짝 상체를 틀어 가슴을 조금 내민다. 툭 튀어나온 갈비뼈와 비슷한 높이에 유두가 솟아 있다. 마른 몸이다. 마키의 시선이 머문다. 니코는 입술을 핥는다. 마키의 손이 니코의 턱선을, 쇄골을 타고 내려가는 도중 니코가 벽을 향해 몸을 비튼다. 마키의 손이 반사적으로 멈춘다.

 "니코니는 아이돌이니까, 만지면 안 돼애."

 ―나른하게 웃는다.

 마키는 타이르듯이 "그래, 그래." 흥얼거리며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물속에서 검은 머리칼이 해초처럼 손가락에 감긴다. 야자와 니코의 얇은 목과 경추를 관찰하며, 마키는 정형외과학도 썩 나쁘지 않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나가야지. 감기 걸려, 정말로."

 "싫어."

 니코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마키는 알아본다.

 "마키쨩도 이리 와."

 마키가 몸을 조금 일으키고 상체를 한층 기울여 간신히 욕조 밖에서 니코에게 닿는다. 니코의 팔이 마키의 목을 끌어안는다.

 마키의 입술을 부드럽고 립밤의 체리 향이다. 니코의 것은 거칠고, 수돗물 맛이 난다.

 "마키쨩."

 "왜."

 "이대로 같이 죽자."

 붉은 눈빛으로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인다. 불현듯 마키는 특정한 충동에 휩싸인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니코의 얇은 목을 휘감는다. 그 순간 야자와 니코가 눈부시게 웃는다. 라디오 토크 쇼처럼 대부분이 역할극이다. 마키가 겨우 기별이 갈 만큼만 손을 조이자 니코가 포르노 배우 같은 소리를 낸다.

 "가버리겠어, 마키쨩."

 거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연기하는 니코의 이마에, 마키가 가볍게 딱밤을 때린다.

 "의사로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 자, 일어나자."

 블라우스 소매가 젖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키가 팔을 뻗어 욕조 마개를 뺀다. 식은 지 오래인 물이 소용돌이치며 쪼르르, 쪼르르, 빨려내려 간다.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자 니코의 작은 몸이 고슴도치처럼 부르르 떤다. 마키는 마른 수건을 가져와 니코의 등에서 시작해서 물기를 닦아낸다.

 마키가 일으키자, 니코는 '영차' 하며 멍한 몸을 일으키는 데에 협조한다. 야자와 니코에게 있어서 몸이란 아무리 작아도 무겁게만 느껴져 온 물건이었다. 중력에 힘겹게 맞서는 몸을, 마키가 곁에서 지탱하기에 가까스로 움직여 미끄러운 욕실 밖으로 나간다. 물에서 나오니 집안이 과하게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제야 니코는 자신이 텔레비전을 틀어두었음을 기억한다. 거기에 더해, 마키가 전등을 켠 탓에 눈까지 부시다. 니코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마키는 니코의 옷 서랍에서 어렵지 않게 속옷을 뒤져낸다. 버터 색 잠옷 원피스는 매트리스 위에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팬티와 원피스를 입히고 열팍한 팔을 폴라 플리스 카디건의 소매에 꿰는 것까지의 과정은 꼭 인형 옷을 입히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 마키가 거실로 나오고, 이제는 제법 균형을 되찾은 발걸음으로 니코가 뒤따른다.

 니코가 따라오자 마키는 텔레비전을 끄는 대신, 소파에 앉는다. 낡았지만 2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이다. 0.5인분짜리 크기의 니코가 마키에게 딱 다가붙어 앉는다.

 브라운관 안에서 스쿨 아이돌이 춤춘다.

 저것 또한 야자와 니코, 그리고 니시키노 마키다.

 춤추는 도플갱어를 노려보며, 야자와 니코는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약하게 만들었는가에 관해 곰곰히 생각한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지금 TV 모니터와 보라색 눈동자에서 절찬 재생 중인 무대 위의 광경과 여동생 두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 오늘도 자신을 구원한 수려한 옆얼굴을 본다. 또 한 번 약해진다. 

'Log > 2017~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이오] 중셉  (0) 2020.06.14
울썬문 드림 조각  (0) 2020.06.14
[WIXOSS] 이상하지 않은 일들  (0) 2019.02.05
[신지+레이지] 울지 않는 아이  (0) 2019.02.05
[루가크로소우] She eyes me like a pisces when I am weak  (0) 2019.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