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2014.4.10)


 그냥, 언젠가부터 네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달갑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일은 피곤하기 그지없었고, 네가 아니더래도 마음을 써야 할 사람들은 이미 충분했다. 그렇지만 마냥 싫었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마음속 한편에 어여쁘게 켜진 호롱불이 있어 예전보다 덜 초조한 듯도 했다.

 

 네 얼굴은 희다. 손도 새하얗다. 본 적 없는 다리도 분명 희리. 또 가느다랗기도 하겠지.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진다. 살결이 매끄럽겠다. 네 무릎 뒤편, 뼈마디 사이를 한입에 물어 머금는 상상을 한다. 야들야들한 피부가 씹혀 들어오는 쾌감. 혀로 보드란 살을 핥는다. 맛있다.

 

 네 입술은 옅은 분홍빛, 신기하리만치 투명하다. 그 입술을 훑는 상상도 해 본다. 입술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바스락거린다. 그리고 달콤하디달콤한…… 철분……. 공상 속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그 맛은… 피……. 네 입술을 질끈 씹어보면, 거친 입술이 찢어져 왈칵 혈액이 쏟아진다. 맛있다.

 

 여러 생물, 여러 사람을 죽여왔다.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단결되는데도 불구하고 너는 특별하다. 네 목을 뚫을 창은 세상의 모든 다른 검붉은 고철과 차별되는 성창聖槍이오. 특별하다, 네가…, 네가…….

 

 너는 총명하고, 지적이며, 잔인하면서 성스럽다. 아무리 강요받아도 외우지 못했던 화가들의 이름과 그들이 남긴 여러 예술품의 제목, 멋스러운 시나 소설의 문구…, 너는 그런 것들을 곧잘 외우고 있다. 네 목소리는 곱고 아름다우며, 너는 분명 노래를 잘 부를 것이다. 예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나보다 훨씬 잔혹한 방식으로 소용돌이의 생물들을 죽였다. 그리고 너는 자신의 여동생 또한 그 손으로 죽이겠지. 너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이다. 그런데도 너는 너무나도 성스러워 눈부시다.

 

 금방 사라질 덧없는 감정을 보물처럼 끌어안았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을 좋아했다…. 차갑게 식어버리기 전에 이 고귀한 감정과 함께 네가 나를 죽여다오. 애정을 이 품에 끌어안고 스러질 수 있도록, 지금 당장 나를 꿰뚫어줘! 브레이즈여…….

 

 

 

 "정신나간 소리를."

 

 그룬왈드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브레이즈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부활한다고 하더군."

 "부활?"

 

 브레이즈가 갸우뚱했다.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없는 정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현세로의 부활…….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이라 믿고 있었을 무렵, 녀석들은 나를 이 성유계로 데려와 전투를 시켰지. 그리고 현세보다 이 장소가 더 마음에 드는 지금, 다시 현세로 부활하라고 하는군."

 

 그룬왈드가 엷게 웃었다. 브레이즈는 웃지 않았다. 대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함께인가?"

 

 브레이즈가 안간힘으로 성대를 울렸다. 그룬왈드는 가벼이 대답했다.

 

 "당장은 아니야."

 "……이 세계에서 우리는 '페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 함께일수는 없는 법이겠지. 하지만 성유계에 온 순서대로 현세에의 부활도 이루어진다면, 너도 머지않아 부활할 것이다."

 "……그래."

 "현세에 부활해서도 너를 다시 만날까."

 

 브레이즈가 울컥했다. 애써 포장한 감정이 한겹한겹 벗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추호도 관심은 없는 주제에 어째서 그런 말을 했니. 브레이즈는 그룬왈드의 (묻는 것이 아니였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것이……, 빛이다!"

 

  전방에 선 브레이즈가 스킬을 썼다. 대기하는 그룬왈드는 무표정하게 벌어진 상처가 도로 아무는 것을 감상했다. ‘성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치유의 파동’……, 우습게도 이것이 브레이즈의 캐릭터 카드에 쓰여있는 설명문이었다. 그룬왈드는 조소했다.

 

​ "일단 물러나지. 후에는 좋을대로 해라."

 "좋다. 내가 나가지."

 

 인도자는 브레이즈에게 그룬왈드와 교체할 것을 명령했다. 후방으로 물러나는 브레이즈의 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넘실거렸다. 그룬왈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뒷모습만 보면 기만적인 얼굴이 안 보여 정말로 성자인 듯 하다.

 

  빨간 드레스의 여자아이가 팔짱을 끼고 거만한 얼굴로 그룬왈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한 암흑을 알고 있어? …나는 알고 있어.”

  “죽음은 삶보다 낫지.”

 

  말이 안 통하네! 소녀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개의치 않고 그룬왈드는 인도자의 지시대로 스킬을 준비했다.

 

  “그 목숨, 내가 받는다. (정신력 흡수)”

  “크윽……!"

 

  이래서야 ‘슈퍼 히로인’도 쓸 수 없잖아! 소녀의 표정은 더욱 더 나빠졌다.

 

  "끝이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

 그룬왈드가 배시 스킬로 마무리를 지었다. 마지막 일격을 맞은 소녀는 쓰러져 미련하게 그르렁거리며 초록색 피를 토해냈다. 끔찍한 참상이였다.

 

 

 

 "나쁘지 않아."

 

 소년이 말했다.

 

 "난 나쁘지 않아."

 

 소년이 찡그리며 그룬왈드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은 텅 빈 눈으로 소년을 향해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말해달란 말이야……!"

 

 소년은 그룬왈드의 옷자락을 찢어버릴 듯 당겨댔다. 히스테릭한 소년에게 그룬왈드의 눈동자는 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그룬왈드는 마치 인형처럼 굴었다.

 

 "왜 말해주지 않아……? 말해주지 않는 넌 나빠……. 네가 나쁘다고……."

 

 소년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거야!"

 

 소년은 이제 울먹이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그룬왈드의 허리를 콩콩 주먹질했다. 그런데도 그룬왈드는 정말로 인형마냥 미도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은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쳤다.

 

 "왜 말을 안 하냐고!"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그룬왈드는 소년을 보았다. 입을 열었다.

 

 "질 나쁜 놈."

 

 

 "……어린 아이에게 가차없군, 그룬왈드.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협정심문관 브레이즈 로아트가 팔짱을 끼고 나타나 그룬왈드를 책망했다. 그룬왈드는 태평하게 변명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그게 최선이였다.

 

 "하, 질 나쁜 놈."

 

 브레이즈는 픽 비웃었다.

 

 "동정하지."

 "좋을대로 해라."

 

 그룬왈드는 어디까지고 무신경했다. 죽어도 남의 마음은 몰라주는군. 브레이즈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네가 상냥하게 말해줬다면 내 손에 용기가 잡힐지도 모르는데도. 하지만 너는ㅡ

 

 "나빠도 괜찮다."

 

 그런데 문득 그룬왈드가 말했던 것이다. 흠칫 놀라며 브레이즈가 그를 쳐다봤다. 어서 더 말해봐. 그에게 갑옷이란 가슴이 허망한 기대에 부풀어오를 때에 압박하기 위해 존재했다. 여전히 무신경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룬왈드는 말을 내뱉었다.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되지. 그 뒤엔 아무것도 없다."

 

 브레이즈도 그룬왈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룬왈드는 개의치 않고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너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길 갈망하지."

 

 '착해빠진 녀석.' 어서 더 말해봐. 뭐든 덧붙여봐. 그에게 갑옷이란 가슴이 허망한 기대에 부풀어오를 때에 압박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룬왈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레이즈의 혀가 그룬왈드의 입속을 부드럽게 훑었다. 서로의 혀가 입천장에, 치아에, 맞닿고 서로 얽히는 진한 스킨십 - 키스. 연인들이 으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즐기는 스킨십.

 

 그런데 너는 아무래 입맞춘들 내게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룬왈드의 구내는 차가웠다. 그의 혀는 아주 힘없이 느릿하게 움직였고, 또렷하게 뜬 두 눈은 도취의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입맞출 때, 브레이즈는 언제나 눈을 감았다.

 

 공허한 빨간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두 눈을 꼭 감고, 그가 의욕이 없음을 실감하지 않기 위해 더 격렬히 혀를 섞었으며, 그의 차가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를 더욱더 끌어안고 더욱더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리, 그래 봐야 그룬왈드는 산송장인데.

 

 브레이즈와 '연애'할 때, 그룬왈드는 언제나 숨 쉬는 시체였다. 그는 얼굴을 붉혀주기는커녕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은 느슨했고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룬왈드가 연애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혼자 고독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룬왈드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몸임을 알았다.

 

 왕국의 음지, 깊숙한 골목에는 여자들이 값싼 제 몸을 파는 붉은 불빛의 사창가가 있었다. 그룬왈드는 그네들처럼 값싼 몸을 팔고 싶지 않았다. 값싼 마음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도, 그리고 차례로 사랑받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왕자는, 브레이즈의 열렬한 구애에 값싼 자신을 팔아넘기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브레이즈는 아주 고귀하고 성스러운 남자였다. 그룬왈드는 그의 앞에 설 때마다 한없이 싼 값의 자신이 싫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네게 어울리지 못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은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결국 그룬왈드는 어느샌가 자신이 싫었던 것조차 잊어버렸다. 브레이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브레이즈는 배가 아팠다. 그는 요즈음 자주 그랬다. 마치 누군가 창자에 대고 부채질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배가 살살 아파져 오니 짜증이 솟구쳤다.

 

 브레이즈는 요즈음 스트레스가 많았던 걸 기억했다. 과연, 스트레스성 반응인가. 그는 가볍게 넘기듯 생각한다. 다 큰 오빠가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프다고 말하더라도 누가 믿어줄까. 레지먼트에서 브레이즈는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나 (병약하긴 하지만) 예쁜 여동생을 두고 부모님과 주위 이웃들에게 널리 신임받는 유복한 녀석으로 통했다. 그런 그가 아프다고 한들, 힘들다고 한들 누가 믿어줄까. 더구나 브레이즈가 여태껏 불평을 입 밖으로 낸 횟수는 가히 꼽을만했다. 동정 어린 연민의 시선은 그야말로 기대할 수 없었다. '아파? 네가' 하며 갸우뚱대는 것이 그의 동료들에게는 최선일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복 받은 놈이 불만 사항도 많으시네.' 하는 핀잔을 예상했다.

 

 브레이즈는 금세 쿡쿡 찌르는 아픈 것을 참는 데에 익숙해졌다. 찢어지게 아플 때에도 원칙 -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 - 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대신 고통이 유난히 심한 날에는 속에 하나둘 쌓아두는 대신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진통제를 삼키고 눈물과 한숨을 쏟아내는 요령도 배웠다. 고통을 참는 것에 있어서는, 스스로 약속한 것을 착실히 지켜나가는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브레이즈가 토했다. 메스꺼움을 식수로 대충 달래고 씩씩하게 팔등으로 축축한 입을 닦고 일어서는 중에 그룬왈드가 다가왔다.

 

 "왜 토했어?"

 

 브레이즈는 깨달았다.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역시 자신은 미숙하고 유약했다.

 

 "유일하게 내뱉어도 되는 거라서."

 

 무슨 소리야. 그룬왈드는 추궁하지 않았다. 무신경한 그룬왈드는 브레이즈에게 아주 마음 편한 동료였다.

 

 

  안녕, 오랜만이군. 브레이즈가 인영에게 말했다.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형상을 한 인영은 대답이 없었다.

 

 "넌 여전히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구나."

 

 브레이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죽어버려."

 

 브레이즈가 검 카드를 총동원해 '그룬왈드'를 한 방에 잘게 썰어버렸다. '그룬왈드'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조각난 살덩이 사이로 빨간 피 대신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그를 침식해갔고, 어느새 그룬왈드였던 인영은 한 줌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브레이즈는 만족스러운 듯 검을 넣고 손을 털었다.

 

 "속 시원하네."

 "그가 싫은가 보네요."

 

 인형은 브레이즈의 과거를 알았지만, 그 마음까지는 알지 못했다. 브레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했다……."

 "그렇습니까."

 

 인형에겐 마음이 없었고, 마음이 없는 그녀는 좋아한다는 마음의 당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형은 브레이즈에게 반론하지 않았다. 브레이즈는 낮게 중얼였다.

 

 "녀석은 참 일방적으로 나와 연을 끊었지……."

 "거짓말."

 

 브레이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형이 반론했다. 브레이즈가 흠칫했다. 마음이 없는 인형이 그토록 단호하게 반론한 것은, 분명 그녀가 객관적으로 그의 말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형에게는 바인더의 그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인연을 끊은 건 브레이즈, 당신입니다."

 

 브레이즈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웃지는 않았다. 눈이. 눈물이나 흐느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그가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었다. 들이쉬는 숨이 파들파들 떨렸다. 마음 없는 인형 주제에, 괘씸하군.

 

 "너도 봤을 터. 내 잘못이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당신 잘못이에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룬왈드는 당신에게 좋아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브레이즈의 숨이 멎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네 말이 옳다……. 난 그 못난 놈이 뭐가 좋아서 여태 물고 늘어진지……. 웃기는 일이야."

 

 인형은 주기적으로 눈만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브레이즈는 슬픈 걸까? 하지만 그는 웃기다고 말했다. 그가 웃기다고 말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웃기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슬퍼보였다. 무어라 말해주어야 그가 기쁜 듯이 웃어줄까.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사실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면 그는 기뻐할까?

 

 "당신은 그룬왈드가 아니라 그룬왈드에게 마음을 바치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요?"

 

 브레이즈는 무너져내렸다.

 

 인형은 그저 갸웃거렸다. 사실을 알려줬는데 왜 기뻐하지 않는걸까……?




4월 8일 브레그룬 : 낮잠, 평화로웠다면.

 

 만약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에 살았었다면.

 

 넌 론즈브라우 왕국의 셋째 왕자로 널리 사랑받았고, 죽음이라거나 하는 이상한 취미에 홀리는 일도 없었다.

 

 나는 평화로운 마을의 예쁜 하얀 주택에서 좋은 부모님과 건강한 여동생과 함께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신임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레지먼트에…… 입대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세상에는 검은 소용돌이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그것과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레지먼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레지먼트에 입대했을 시절, 대신 나는 명문 대학을 지망하는 고시생이 되었고, 너는 왕위를 물려받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우리는 그 시절이 삶의 고비였다. 앉아서 공부하는 게 삶의 고비라니……, 실로 실없는 상상을 한 것 같아 실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해서 운명으로 이어진 우리가 (오글오글) 만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나는 무사히 지망했던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너는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민들과 같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같은 학교로 편입 온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렇게 우리는 대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과 수업을 들었지만, 우연히도 강의실이 가까이에 있어서 서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그렇게 점차 친해진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고……,

 

 

 눈을 떴다.

 

 오늘 밤은 오염자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암살 임무였다.




4월 9일 브레그룬 : Nice to meet you

 

 우리는 교만했다.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왠지 사람들은 가볍게 서로 이해하노라 말한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자란 우리도 쉽사리 착각에 빠진다. 너를 이해해.

 

 죽음에 홀린 그를 이해하노라 말했었다. 그를 동정한다고 했다. 우연히 검은 소용돌이와 맞닿아서 우연히 죽음에 홀렸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세뇌당하듯 죽음에 매혹되어갔다고…, 너는 그런 거라고, 나름대로 단정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수긍했다. 타인의 결론을 믿기가 가장 쉬웠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보단 타인의 말에 따르는 편이 좋았다. 그는 말했다. 넌 더 비참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나는 멍하니 끄덕였다.

 

 우린 서로 이해했고, 서로가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다고 자만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필요했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있지 않았고, 그렇게 끝까지 내게 닿지 못한 채 그는 생을 마감했다. 혼자 남겨져서 몇 달 밤을 고민하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 이해했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타인이었고, 타인은 절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도. 사람은 타인에게 의존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 스스로 깨달은 자신의 모습은 타인이 말해준 것보다 몇 배는 징그러운 흉상이었다. 모든 것을 결론 내린 이튿날, 내게도 죽음이 덮쳤다.

 

 그는 나보다 먼저 성유계에 와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확고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브레이즈 로아, 잘 부탁한다."

 "반갑다."

 

 그림자 세계는 햇볕이 강했다.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평행하게 늘어졌다.




4월 10일 : 만나서 반가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째서 존재하는지 따위 알 수 없었다.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 쉬고 있었다.

 

 어느 날 빨간 치마를 입은 인형과 어둠침침한 전사 ㅡ 네가 찾아왔다. 우리는 싸웠다. 너는 나를 죽였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태어났다. 지시자의 '바인더'의 일원이 되어, 마음(영혼)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자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브레이즈 로아. 너는?"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다."

 "만나서 반갑다, 그룬왈드. 잘 부탁하지."

 

 너와 악수를 하고, 잠시 생각하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묻겠다. 너는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나?"

 "생전의 기억은 없다. 너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나?"

 "아니, 아무런 기억도 없다. …이상한 장소로군. 이렇게 어엿이 자신이 존재하는데도 과거는 전혀 알 수가 없어."

 "금세 익숙해질 거다."

 "그런가."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치고는 만나고서부터 허물이 없었다 (너는 원래 허물없는 사람인 듯도 했지만). 고맙게도 지시자는 우리를 '페어'라며 같은 덱에 넣기를 즐겼고, 덕분에 우리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서로에 대한 과거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해 알아갈 것은 많았다. 사소한 생활 습관, 욱하는 부분, 잠이 많아지는 시간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도 지시자는 내게 제안했다.

 

 "브레이즈, 기억을 찾고 싶습니까?"

 "…생전의 기억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돕겠습니다."

 "가능한가?"

 "예, 가능합니다."

 

 나는 잠시 너를 생각했다. 내가 기억을 찾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뭐가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금방 네 생각을 떨쳐냈다. 어차피 너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럼 부탁하지."

 "그렇다면 당장 박쥐를 잡으러 가죠."

 

 

 기억을 찾는 것은 험난한 일이었다. 박쥐, 늑대, 철갑기사, 억울하게 죽은 자, 백은 박쥐, 흡혈 박쥐, 버섯 토끼, 박쥐, 박쥐, 박쥐, 박쥐, 박쥐…… 박쥐!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 지시자와 나는 몇백마리의 몬스터를 잡아 족쳤고, 몬스터를 정제한 코인으로 여러 빛깔의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자, 브레이즈, 수고했어요.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드디어 박쥐 잡이도 끝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온 생전의 내가 듣는다면 우습기만 하겠지만, 무척 진지하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박쥐를 잡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설마요."

 "뭐?"

 "우리가 지금부터 볼 것은 당신의 많은 기억 중 첫 번째 파편에 불과합니다. 모든 기억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앞으로 박쥐는 수백마리 더 잡아야 합니다."

 "농담은 그쯤……."

 "농담이 아닙니다."

 

 맙소사. 나는 한숨을 쉬며 뒷목을 잡았다.

 

 "아무튼간, 첫 번째 기억을 되찾도록 하지."

 "예, 좋습니다."

 

 

 "기억을 찾고 왔나, 브레이즈. 기분이 어떻지?"

 "놀랍군."

 "표정을 보아하니 생전 좋은 사람은 아니였나보군."

 "제멋대로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대로다, 그룬왈드."

 

 나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길 잠시 망설였지만, 그룬왈드라면 아무래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아 계속했다.

 

 "네 동료들과 너를 죽이려 했더군."

 "그런가."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기가 찬 그 모습이 되려 안심되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서 반갑다, 그룬왈드.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징그럽게 굴긴. 그래,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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