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0.

"하우올리의 바닷가로 돌아가고 싶어."

 

1.

파도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공허했다. 밤의 하우올리시티는 참 좋지? 반듯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 습관처럼 두 손을 포개어 머리 뒤에 대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역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지만 알로라에서 태어난 사람인 채로 알로라로 돌아가고 싶었어. 무엇하나 진실인 전제가 없더라도…… 믿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단어들을 질겅질겅 씹듯이 내뱉는 꼴을 바라보는 눈빛이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다. 모래알을 세던 파란 눈동자가 불현듯 그를 쏘아본다.

하우, 이건 네 책임이야.

물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말한다.

왜 그때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준 거야?

 

2.

으음…… 세비퍼의 뱀눈초리처럼 노려보는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이없을 만큼 느긋하게 말라사다를 뜯고 있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생각하던 끝에 말한다. 하지만 네가 너인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사실은 내 쪽이 연상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 같이 웃던 너는.)

 

3.

세키에이에 도달하고 싶었다.

어디에나 있는 짧은 치마였으니까. 하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건 어디에도 갈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열 살이었던 우리는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불행은 불을 보듯 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릎꿇은 반바지 꼬마의 발치에 쓰러진 꼬렛을 볼 때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불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해 줘, 오키드 박사.

그런 약속이었던 게 아니었어?

 

4.

반짝이는 신이 속삭인다.

그렇지만 너는 알로라로 도망쳤기 때문에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

짙어지는 눈그늘을 선글라스 뒤에 숨겼다.

색을 잃어버리는 피부는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 산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져있던 나를 네가 찾아줘서 기뻤어.

 

5.

괜찮아, 시간은 미래만을 향하지는 않으니까…… 너의 구원이 과거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우주의 구석에서 듣는 희망론에는 왠지 모를 설득력이 실린다. 시간의 신의 얼굴을 보고 온 참이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밖에 없는 곳에서 시간의 신은 도대체 무엇을 관장하는 걸까. 그렇다면 앞면도 뒷면도 없이 광활하게만 펼쳐진 우주에서 공간의 신은? 다들 한가해서 이름을 나누어 가졌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회귀하는 것은 너 혼자가 아니야. 전설은 너의 편에 있어.

바다는 땅으로, 땅은 바다로 돌아간다. 무에서 유로 돌아간다.

그래, 외롭지 않겠네.

그럼, 나의 꿈은 어디에? / 그건, 현실의 연속. / 나의 현실은, 어디에? / 그건, '꿈의 끝'이야. (신세기 에반게리온)

(2020.06.30)

 

그는 하나지방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짧은 치마 트레이너다.

이 국가가 장려하는 10세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한, 거친 숲길과 동굴을 지나 포켓몬센터에서 포켓몬센터를 전전한, 그리고 결국에는 여덟 개의 배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기 전에 포기하고 정착함으로써 꿈을 포기한, 포켓몬 리그라는 시스템이 리그 챔피언의 환상을 대물림하는 수단인 평범한 트레이너.

배지 케이스 안에는 승리의 훈장인 동시에 좌절의 상징인 포켓몬 리그 공인 체육관 배지가 다섯 개 빛나고 있다.

아아, 좋은 시절이었지.

좋은 시절은 좋은 시절로 추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이제는 눈을 돌려 현실을 본다. 어린이를 통제하는 것은 포켓몬 리그지만 어른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그것보다도 더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하나지방 자본주의의 중심 블랙시티,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그는 행운아였다.

더이상 꿈은 없었다. 다만 부자와 권력자들이 정교하게 만든 틀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생을 이미 그 틀에 부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는 그것에서 갑갑함보다는 평안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것은 가게에서였을까.

당신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직원은 당신이 건넨 카드를 묵직해 보이는 돌 하나와 함께 돌려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던 돌은 상당히 빛나고 있었다. 진화의 돌, 그중에서도 빛의 돌임을 한때 체육관을 순회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빛의돌이 밝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자신했으며, 그러니 한눈에 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자신이 리그 챔피언의 꿈을 포기할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겠지.

 

흑의 마천루는 블랙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수입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블랙 시티 주민들의 길티 플레저였다.

최강의 트레이너, 포켓몬 리그 제패, 챔피언 같은 말에는 ‘한때는 그랬었지’ 하고 냉소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마천루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사실은 많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천루 안에서는 모두가 초면이었다.

그는 당신이 마천루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보면 높디높은 마천루였지만,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숫자뿐이었다. 잘 지어진 엘리베이터는 붕 뜨는 감각조차 없어서, 마천루에는 배틀에 전념하라는 듯 창문도 없이 오로지 인공적인 빛뿐이어서.

그래서 그는 자신이 8층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쓰러뜨린 연구원이 게이트 트레이너는 9층에 있다고 했다. 포켓몬들은 거의 한계였고, 의사에게는 이미 한 번 부탁했기에 다시 한번 회복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아갈 수 있는 만큼을 나아가고, 실패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한번 올라갈 뿐이다.

마천루를 아무리 오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챔피언이라고 불러주지도 않고, 보스 트레이너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훈장을 달아주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놀이이므로, 마천루에는 패배의 리스크가 없다.

그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당신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저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아득하게 상상했다.

 

우리는 마천루의 옥상에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옥상에 가 닿을 수 있나요? 꼭대기 층까지 오르면 거기엔 파랗고 녹색이고 형광인 조명이 아닌 햇빛이 닿나요? 아득바득 올라왔던 높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 도시는 정말 새카맣구나,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불어오는 바람에 갈색 머리와 코트를 휘날리며, 난간도 없는 옥상에서 당신은 무얼 보는지 곧은 자세로 가만히도 서 있었다.

그런 당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의 발소리였다.

블랙시티에 집어 삼켜진 구두 소리, 그러나 아직은 앳된 걸음 소리가 당신을 뒤돌게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당신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최강의 포켓몬 트레이너 같은 꿈은 진즉에 끝나있었다.

그것은 국가에서 어린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심었던 꿈으로,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의 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긁히고 찢기고 뼈가 부러져가면서 얻은 체육관 배지조차, 스스로 원한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흑의 마천루를 오른 것만큼은 그의 의지였다.

그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당신은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젠 괜찮지 않겠어?

그는 당신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좁혀져, 당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입술 위로 포개져 오는 당신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발밑이 사라졌다.

 

몇 층 높이를 떨어진 것인지, 그는 모른다.

 

눈을 떠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퇴근 후에는 흑의 마천루에 가지 않았다.

 

 

 


 

최근 구세대 포켓몬 기반 자캐커뮤를 뛰게 되어 자료 참고용으로 닌텐도DS를 자주 켜게 되었는데...
분명 기억상으로는 BW2가 DP 다음으로 열심히 했던 시리즈였던 것 같은데 정작 게임을 켜보니 채 50시간이 안되는 플탐에 충격을 받고... 일단 흑의 마천루를 뽀갰습니다. 근데 에리어 8 보스 치요 씨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이건 무조건 나락서사 어쩌구 된다. 그리고 백합이어야 한다. 싶어서 휘갈겼습니다. 
맨 위에 인용한 글귀는 에반게리온인데 다 쓰고 나서 어울리는 것 같아서 인용했고, 실제로는 Mitski의 First Love/Late Spring을 들으면서 썼어요. [ 블랙홀처럼 깜깜한 당신이 잠든 창문 ] ... [ 너의 한마디면 나는 지금 있는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 / 그러니까 내가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도록 그러지 말라고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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