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0) 디지몬스토리 사이버슬루스 키시베 리에x스에도 아케미

심맥관계

키시베 리에의 방은 단 냄새가 난다.

분홍색으로 도배된 벽에는 리에 자신의 초상화가 여덟 개 걸려있다. 그녀의 나르시즘을 단도입적으로 나타내는 소품이다. 키시베 리에의 방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방을 반으로 나누면 인테리어가 정확히 대칭된다는 점인데, 초상화 역시 오른쪽의 네 개와 같은 초상화 네 개가 왼쪽에도 똑같이 걸려있는 것이다. 방에서 가장 커다란 소품은 극상의 폭신함을 자랑하는 침대 – 허리 건강에는 안 좋은 일이다. – 이다. 키시베 리에는 이 침대에 커튼을 치고 나신으로 극세사에 푸욱 갈아앉아 인형처럼 잠든다. 침대 앞의 것 두 개를 포함해 총 여섯 개의 꽃병이 있다. 수백 송이 장미가 키시베 리에의 공간을 진한 향기로 범한다.

침대의 서쪽에는 하얗게 도색하여 진짜 금을 박아넣어 꾸민 목재 서랍장이 있다. 작은 칸 두 개와 큰 칸 세 개 전부 합해 칸 다섯 개다. 주로 카미시로 엔터프라이즈 1급 기밀이나 키시베 리에의 ‘생필품’ – 전뇌공간에서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 같은 것이 담겨있지만 맨 윗줄의 작은 칸 두 개 중 오른쪽 칸은 키시베 리에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용품’으로 빼곡하다. 키시베 리에 본인을 제외하면 대기업 카미시로 엔터프라이즈에서 스에도 아케미가 유일하게 모든 서랍을 열어본 사람이다.

키시베 리에는 욕망에 있어 열정적이면서도 행동에 있어 늘 이성적이고 영리한 점이 매력적인 여자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스에도 아케미는 무감정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스에도 아케미는 평균 사람보다 감성이 발달한 축이다. 키시베 리에의 바탕에는 새빨간 욕망이 있듯이 스에도 아케미의 바탕에는 유리 같은 감성이 자리잡고 있다. 키시베 리에의 본분이 욕망의 충족에 있듯이 스에도 아케미의 본분은 감성의 안정화에 있다. 그리고 본분을 퇴색시키지 않되 맹목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스에도 아케미는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키시베 리에를 존경했다.

바로 목재 서랍장 두 번째 칸에 키시베 리에는 녹슬지 않은 욕망의 일면을 노골적으로 모아두고 있다. 그 칸에서는 다양한 냄새가 난다. 스에도 아케미는 그것에 자신의 냄새가 섞여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더러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의 경우 키시베 리에는 대부분 그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자랑으로 여기는 것도 키시베 리에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을 먹었을 뿐인 일이다. 해로운 일도 아닌데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동시에 키시베 리에는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아무나 골라서 했을 뿐이므로 행위에 부여할 특별함 따위는 없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특별한 포상이라도 받은양 자랑스러워하는 태도도 똑같이 키시베 리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배고프면 배를 채웠을 뿐인 일이다.

최근 키시베 리에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스에도 아케미다. 그는 키시베 리에가 평생 대면한 인간 중 가장 고고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짓밟고 더럽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황홀했다.

스에도 아케미에게 키시베 리에와의 행위는 새로운 일이었다. 노쇠한 몸은 키시베 리에에게 격렬하게 반응했다. 모든 것이 스에도 아케미가 이전에는 관측해본 기록이 없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키시베 리에의 애무에 반응하고 학대에 반응했다. 이어 키시베 리에의 체향, 목소리에 반응했으며, 급기야 키시베 리에의 존재 자체에 반응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스에도 아케미가 경험한 적이 없는 알고리즘이었다. 키시베 리에가 스에도 아케미와의 행위에 특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에도 아케미는 알고 있다. 스에도 아케미는 그것이 변수의 통제에 편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키시베 리에”가 “로드나이트몬”으로 개명했을 때 로드나이트몬과 스에도 아케미가 서로를 떠나는 것에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스에도 아케미의 관측은 불완전한 채로 남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연구가 아니다. 관측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의 가설은 틀렸다. 가장 극심한 금단현상을 성기관이 아닌 심맥관계가 겪었던 것이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MN] 사형  (0) 2016.06.13
[BA] 소신증명  (0) 2016.05.21
[니아메로] 空  (0) 2016.05.21
[아오<이치<킷슈] 에일리언  (0) 2016.05.21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2016. 4. 26)

멜로는 와미즈 하우스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달이다.

운동장을 뛰노는 멜로는 반짝반짝 빛났다. 미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금발을 흔들었다. 피부는 땡볕 아래 핏기 가득한 건강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단련된 동작으로 골대에 공을 차 넣으면 아이들이 환호했다. 멜로가 활짝 웃었다.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곁에서 빨간 머리 소년이 함께 웃으며 팔을 치켜올렸다. 소년들의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니아는 와미즈 하우스에사 가장 고독한 태양이었다.

L의 후계자는 하얀 방에서 백지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새하얗게 점멸하는 와미즈의 태양. 하얀 파자마를 입은 니아는 머리카락이나 피부까지도 창백했다. 홀몸의 태양이 따갑게 작렬할수록 달도 밝게 빛났다. 달님 멜로는 생명을 불태워가며 창백한 태양을 앞지르려 빛을 냈다. 멜로는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퍼즐을 맞췄다. 퍼즐의 빈틈에 고여있던 빛이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밀려나 흘러넘쳐 니아의 소매에 튀었다. 니아는 빛나는 것을 볼 때마다 멜로를 생각했다.

해와 달은 뜨고 지고, 돌고 돈다.

(사랑하는 멜로.)

니아는 멜로에게 네가 나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고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늘 자신보다 밝게 빛나고 싶다며 멜로는 열등감을 불태웠다. 그 열기가 꼭 여름 같아서. 여름이라는 계절은 꼭 멜로 그 자체였기 때문에 니아는 여름을 좋아했다. 태양이 가장 미움받는 계절이다. 멜로의 열등감은 해가 지날수록 가속도를 붙여갔다. 매년 여름 니아는 새롭게 미움받는 것 같았다. 멜로의 증오를 사랑했다. 그래서 니아는 멜로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멜로가 지나치게 니아를 싫어했다.

사실 니아는 무섭다.

멜로가 눈에 살의를 담으면 누구든 무서워한다.

니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멜로는 꼭 그런 눈으로만 니아를 보았다.


L이 죽었다.

로저가 멜로를 보며 제안을 말했다. 니아는 표정 없이 동의했다. 드디어 멜로를 잡았다고 생각한 찰나 멜로는 흩뿌리며 와미즈 하우스에서 사라졌다. 엇갈렸다. 니아는 멜로가 혼자서 키라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안다. 숨 죽인 안녕―니아는 차라리 스스로 멜로를 죽이기로 정했지만 니아는 늘 사적인 감정은 억제할 줄 알았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BA] 소신증명  (0) 2016.05.21
[리에아케] 심맥관계  (0) 2016.05.21
[아오<이치<킷슈] 에일리언  (0) 2016.05.21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2016. 1. 19)


에일리언


도쿄 뮤우뮤우

아오야마 마사야, 모모미야 이치고, 킷슈


 A.

 킷슈에게 남아있는 사랑은 없다.


 모모미야 이치고. 킷슈는 그 이름을 떠올린다. 킷슈에게 있었던 사랑의 이름이다. 그것은 잠시 사랑이었다. 잠시. 애초에 사라잉 아니었고 종국에도 사랑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간지러운 호기심이었고 끝에는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그런 조잡한 것이었지만 잠시만큼은 사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프다. 들이쉬는 숨마다 몸 속에 독을 퍼뜨리듯 킷슈는 서서히 죽어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어쩌다가 이렇게. 상념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이름은 아오야마 마사야다. 아오야마 마사야의 존재 때문에 이렇게 되었던가. 그래서 그를 그토록 증오했다. 새까맣게 불타는 증오심으로 그를 죽이고 이치고를 차지한다는 작전이 있었다. 그것은 나쁜 계획이었다. 아오야마 마사야가 없어진 시점에서 모모미야 이치고가 자신을 돌아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이었다. 모모미야 이치고의  말. 그런 어떤 말을 들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 말은 날카로운 낱붙이가 되어 지금까지도 같은 감도로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각주:1]


그래도 한 때는 모모미야 이치고를 사랑했노라고 킷슈는 회상한다. 그런 점에서부터 킷슈는 이미 아오야마 마사야에게 지고 있다는 것을 킷슈도 안다. 킷슈는 여전히 아오야마 마사야에게 지고 싶지 않지만 이제와서는 다 꼴도 보기 싫을 뿐이다. 왜냐면 이제 킷슈에게 남아있는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외계적인 고독이다.


B.

 모모미야 이치고는 지옥에 당도했다.


 아오야마 마사야가 모모미야 이치고의 전부였다. 그는 완벽한 연인이었다. 그런 그의 미소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구를 지키기도 했고 그가 죽는다면 나 역시 죽겠노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죽지 않았다. 이치고는 죽은 듯이 어색하게, 그러나 사랑간다. 숨을 멈춘 채로 호흡한다는 것 그와 같은 모순의 궤적을 남기는 일상의 굴레. 아오야마 마사야를 생각했다. 다른 바다에 그러나 똑같이 갈아앉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그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고 한 선언은 그 나름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아오야마 마사야의 손을 잡고 다닌 모든 장소가 지옥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치고는 아오야마를 옆에 끼고 온 도쿄를 쏘다닌 역사를 지녔다. 발을 딛는 거리마다 녹아내린 아오야마 마사야의 다정이 끈적하게 밟혔다. 이치고는 꼭 한 발짝도 움죽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자동차가 매연을 뿜어냈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에서 아오야마 마사야의 불행을 보았다.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


 아오야마 마사야는 불행한 남자였다. 이치고는 그런 그를 웃게 하고 싶어서 무엇이든 했을 터였다. 이치고 자신은 타고나지 않은 불행. 그런 모모미야 이치고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그리고 아오야마 마사야로서는 이해를 바란 적 없는, 그러나 이치고는 이해하고 싶었던. 모모미야 이치고와 아오야마 마사야의 엇갈림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ㅡ내 것이 되거나

 ㅡ부서져라


 이치고의 머리를 스치는 3류 로맨스 스릴러에 나올 법한 대사는 킷슈의 대사다. 킷슈, 잊을 수 없는 이름. 아오야마 마사야를 증오했던 이의 이름. 그리고 그의 말은 이제와서는 불길한 예언이 되었다. 이미 맞아떨어진. 생생한 고통이 어렸던 금빛 눈을 떠올린다. 이치고는 이제야 알게 된 아픔. 그러나 선명한 금빛 광채의 이미지를 그려내면 일단은 소름이 끼친다.


 거기서 문득 이치고는 숙명적 감각에 사로잡힌다. 혐오의 차례가 곧 자신에게 돌아오는 숙명이다.


  1.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본문으로]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에아케] 심맥관계  (0) 2016.05.21
[니아메로] 空  (0) 2016.05.21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2015. 12. 22)

암리타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0.
기라티나의 세계는 깨어져있다. 기라티나는 일그러짐의 수호자다. 앞면과 뒷면, 빛과 그림자ㅡ모든 숨는 것들이 기라티나의 아래에 집결한다. 깨어진 세계에는 빛도 역사도 없지만 기라티나는 기억한다. 빛. 그것은 자신과 세계의 오욕을 전부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던 아버지의 환함. 비틀린 시간축에서 과거로 남겨지지 못하는 사건이다.



1.
ㅡ아버지 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습니까


2.
소녀는 기라티나를 찾아온다. 빛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아이. 표면의 세계가 숨긴 모든 어둠의 집결지, 깨어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 깨어진 세계에 있어서는 안될 아이. 표면 세계의 축복, 깨어진 세계의 재앙. 그럼에도 소녀는 기라티나를 찾아온다.


기라티나의 유일한 광원, 태초의 빛이었던 아르세우스 뿐이었던 빛은 그 정의를 소녀만큼 확장한다.


소녀는 어느덧 깨어진 세계의 중력법칙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3.
ㅡ암리타를 알아?


소녀의 말이다. 그 맑은 울림이 깨어진 세계의 공허 속에서 메아리친다.


ㅡ저번에 봉신마을에서 들은건데, 신들이 마시는 꿀이래.


ㅡ기라티나는 신이잖아?


우주 모든 치욕의 신


ㅡ암리타, 마셔본 적 있어?


기라티나가 고개를 저어 소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의사를 표명한다. 아버지는 기라티나에게 달콤함을 부여하지 않았다. 오로지 칠흑, 칠흑, 칠흑만이.


ㅡ그렇구나


ㅡ그치만 괜찮아! 왜냐면 암리타는 말이야, 입으로 암리타,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대.


암 리 타


ㅡ자, 기라티나도 말해봐


4.
소녀는 오류ㅡ지나치게 우월한 실패작이다. 그는 한 때 표면 세계의 축복이었지만 그가 낳은 뒤틀림의 크기는 그가 지닌 빛의 크기를 추월하기에 이른다.


생명을 낳고 죽음을 부여하는 것은 오롯이 신의 권한.


아르세우스는 명했고 기라티나의 충성은 늘 죄를 한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라티나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빛이고 그의 사랑은 늘 죄를 통하여 성사한다. 기라티나가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와 소녀. 그의 우주의 모든 빛. 기라티나가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과 아버지의 명은 일맥상통한다. 아버지가 명하는 죄를 삼키고 죄를 낳는 소녀를 단죄하는 것 모두가 기라티나의 사랑이다. 아버지가 주시는 절망도 모두 사랑하고 기라티나에게는 영겁의 절망 뿐이다.


5.
기라티나는 소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진득한 붉은 꿀을 뒤집어썼다. 암리타. 기라티나가 읊조렸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아메로] 空  (0) 2016.05.21
[아오<이치<킷슈] 에일리언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하리사오]  (0) 2016.05.21

(2015. 8. 12)

광휘 군은 빛나 양과 절친하다고 들었는데, 빛나 양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나요?


 그녀는 구 년 전 첫 포켓몬을 받고 여행을 떠났어요. 그녀가 팽도리를 골랐던 그 순간에 나는 바로 옆에서 그걸 보고 있었죠. 그녀만큼 총명한 팽도리였고 그녀도 그녀에게 포켓몬 도감을 건네었던 마박사도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희망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성공하고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여행은 아주 멋졌어요. 우리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썩히느라 읽어왔던 소설들과 보아왔던 영화들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여행만큼 스펙타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빠르게 성장했고 모든 배지를 따기는 물론 콘테스트를 제패하거나 갤럭시단이라고 이름 붙여진 해괴한 악의 집단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실은 열 살짜리 소년소녀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참혹한 임무였지만 그녀도 포켓몬도 강했습니다 신오지방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그녀의 꽃향기마을에서의 (그녀는 그곳에서 일생의 파트너가 될 꼬몽울을 잡기도 했습니다) 사사로운 참견은 그녀와 갤럭시단의 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천관산 정상에서 그녀는 시간의 신과 손을 잡고 악의 보스를 물리쳐 세상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을 구한 히어로가 되었고 그 이후로 금방 여덟 번째 배지를 손에 넣고 사천왕, 그리고 챔피언도 넘어선 그녀는 지구의 은인, 그리고 신오지방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행운이 꽃피고 우리는 실로 행복했습니다. 그런 과분한 것은 달라고 한 적도 없건마는, 우리에게 한순간에 그렇게 많은 것을 주었던 신은 또 한순간에 모든 것을 되 앗아갔습니다.


 그녀는 화려하게 여행하고 화려하게 배틀하다가 종종 오박사로부터 받은 포케트레를 만지작거리며 휴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명성은 차츰 잦아들었고 포케트레를 들고 풀숲을 거니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여유도 즐길 줄 아는 유연하고 튼튼한 아이였죠. 그녀는 배틀을 하고 포핀을 만들고 드레스를 입고 포케트레를 돌리고 포켓몬을 만나고 쓰다듬고 안고 키스하고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엠페르트와 로즈레이드가 모든 낮과 모든 밤에 그녀를 지켰고 사람을 생각하면 고향에 어머니가, 배틀타워 앞에서 반겨주는 용식이가, (부끄러워서 안 그런 체하기는 했지만) 항상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있었습니다. 일상의 행복을 잊지 않는 빛나는 평생 행복할 자격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누가 감히 신오 챔피언, 세계의 구세주인 그녀를 건드렸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라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녀를 제물로 PC 박스 보관 시스템의 취약점이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어모으게 되지요. 이수진은 말합니다. ‘데이터 손실’. 그렇게 그녀는 삼 년간 자기 자신보다도 그리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두 마리의 포켓몬을 비롯하여 열아홉 마리의 포켓몬을 유실합니다. 개중에는 그녀가 아끼던 천공의 신 레쿠쟈나 초록색 동미러, 은색 배루키와 같은 귀한 포켓몬도 있었지만 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한 소실은 엠페르트와 로즈레이드 두 마리였습니다. 공허한 그녀의 박스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브케인만이 몇 마리 나뒹굴고 있었지요.


 그녀의 행복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녀는 본래 매사에 긍정적이어서 궁지에 몰려도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그녀를 너무나도 철저히 부러뜨렸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잃어버려 더는 일말의 행복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가엾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의 축복도 닿지 않을 만큼 철저한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그녀는 여행자에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더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숨 쉬는 것이 부끄러워 어찌 어머니를 만나겠느냐고 합니다. 그녀가 부끄러울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는 데 말입니다. 포켓몬을 떠나 인간에게로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배틀도 하지 않고 포핀도 만들지 않고 드레스를 입지도 포켓몬을 만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PC 보관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판도라의 상자 그 밑바닥에도 희망은 남아있었습니다. 아직 따뜻한 알 네 개. 그녀는 가슴에 그것들을 하나씩 품고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녹색의 로젤리아가 네 마리 태어난 것입니다. 로젤리아는 울음소리가 웃음소리인 포켓몬입니다. 그것들이 태어나면서 꺄르르 웃던 소리를, 그걸 듣고 빛나는 일련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하지만 웃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배틀도 하지 않고 드레스를 입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울지도 웃지도 않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서서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로젤리아에게 먹일 포핀을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얼마 후에는 포케트레를 켜고 로젤리아와 함께 풀숲을 거니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잘 웃는 사람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로젤리아가 포핀을 먹고 기뻐할 때나 특별한 색의 포켓몬과 조우할 때 가끔 환하게 웃어요. 포핀은 먹여놓고 콘테스트는 나가지 않지만.그녀가 웃으니까 뭐 어때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갈색 찌르꼬를 안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도 다행인겁니다. , 또 로젤리아 한 마리는 칼로스지방의 재능 넘치는 신참 트레이너에게 맡겼는데, 최근 뉴스에서 그 애가 로즈레이드를 데리고 포켓몬 월드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했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그걸 듣고 빛나가 또 웃었어요. 환하게. 그래서 나도 다시 행복하기 시작할 것 같았는데…….


 별안간 죽어버렸어요. 천관산에서 뛰어내려버렸어. 하하, 다른 지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관동 챔피언 레드도 은빛산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던가? 똑같이 돼버렸어…….

 

 

 

 

 

포켓몬의 권위자 마박사 님의 조수이자 손자인 광휘(19)군이30일 새벽 202번도로 부근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포켓몬에 의한 자살로……


 

용식은 TV를 껐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오<이치<킷슈] 에일리언  (0) 2016.05.21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하리사오]  (0) 2016.05.21
[미나마츠] 외로움 싱크로, 아픔나누기  (0) 2016.05.21

(2015. 5. 27) 다크펫♀ ← 깜까미♂

 안녕, 난 미미야.

 미미는 아직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미미라는 이름을 붙인 소녀는 진작에 미미를 버리고 사라졌다. 미미는 소녀도 이름도 저주했지만 별달리 새 이름을 지어주는 이도 없었기에 계속 자신을 미미로 소개했다. 미미의 좌우명은 복수와 불신이다.

 

 깜까미는 자신의 이름은 커녕 언제부터 자신이 그 동굴에서 보석을 파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두 눈마저 보석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는 트라우마도 추억도 없다. 그래서 그는 문득 동굴에서 나가보기로 했다. 언제부터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에 나간 적이 있었던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온 호연을 어슬렁거리던 깜까미는 우연히 송화산에서 미미를 만난 것이다. 미미는 아주 예뻤다. 깜까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곧 보석을 뜻했다. 미미는 보석이 아니다. 그런데 아름답다. 그런데 보석이 아니다. 깜까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미미의 빨간 플라스틱 눈알이 보석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것은 보석이어야만 하므로.

 

 미미에게 보석은 전혀 다른 것을 뜻한다. 미미는 인간의 탐욕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몹시나 혐오한다. 모든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보석을 탐한다. 인형을 팔면 돈이 되니까 인형을 만들고 되팔 가치도 없는 인형은 갖다 버릴 뿐이다. 그들은 미미를 질뻐기가 우글거리는 쓰레기장에 집어던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발길을 돌렸다. 미미는 너무 낡아서 팔아도 돈이 안 나올거야.

 

 천 원 가치도 남아있지 않은 미미에게 깜까미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화려하게 말할 줄 모르는 깜까미의 아주 간결한 고백이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고 미미도 그를 믿었다. 오른쪽 눈을 파이기 전까지는.

 

미안해, 난 네 눈이 보석인 줄로만 알았어.

 

 팔짱을 끼고 그르렁거리는 미미의 발치에서 깜까미가 싹싹 빌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함을 표현할 방법조차 몰라서 미안해를 그저 반복했지만 미미의 마음은 약간도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눈에 손 댔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내 눈을 노리고 지금껏 추태 부렸다는 거지?

 

 미미가 남은 눈을 쿡쿡 찔러대며 깜까미를 몰아붙였다. 싸구려 플라스틱 소재였다. 보석에서 눈물이 흐를 수 있었다면 깜까미는 펑펑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거 아니야! 제발 믿어줘!

그런 거 아니면? 그런 거 아니면 뭔데?

네 눈을 보는데, 그게 갑자기 너무 보석 같은 거야. 너무 반짝반짝하고,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만 한 순간 보석이라고 착각해서 그런데 보석이라고 생각하니까 통제가 안 되는 거야…… 나는 보석을 먹고 사니까…….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미미가 홱 돌아섰다. , 잠깐만, 가지 마. 울먹거리며 깜까미는 처절하게 팔을 뻗었지만 미미는 성큼성큼 가버렸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하리사오]  (0) 2016.05.21
[미나마츠] 외로움 싱크로, 아픔나누기  (0) 2016.05.21
[체레N] Hitorinbo Envy  (0) 2016.05.21

(2015. 3. 14)

“우승 축하해, 하리.”


코가네시티 콘테스트홀은 막 끝난 콘테스트의 여파로 아직 뜨거웠다. 환호와, 드문드문 일찍 탈락한 참가자들의 푸념이나 오열, 온갖 소음 사이에서 사오리가 하리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방금 리본을 수여한 코가네대회 우승자와 호연 그랜드 페스티벌 우승자가 대화한다. 그 광경에 군중이 크게 술렁거렸다.


“어머, 사오리, 땡큐. 이게 얼마 만이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지극히 하리의 취향에 맞추어 꽃다발의 장미는 이미 다 시들어있다. 하리는 시든 장미를 한 손으로 채가듯 가져가며 한 손으로는 머리를 넘겼다. 매일 고심해서 손질하는 머리카락은 완벽한 모양새로 휱날렸다. 하리는 흡족했다.


“달링은 잘 지냈어?”


달링. 자극적인 단어 선정에 군중이 또 수군거렸다. 내일 신문에는 하리와 사오리의 열애설이 1면에 실릴 것이다. 물론 사실무근이다. 하리는 생각 없이 말을 뱉는 사람이었다.


“그래, 나도 그럭저럭.”

“근처에 좋은 바가 있던데, 같이 안 갈래? 앉아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구.”


하리가 사오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약간 아플 정도였지만 사오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가네시티 콘테스트회장에서 끌려나오며 사오리는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결이 고운 보라색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하리가 그녀를 데리고 온 곳은 록 음악이 시끄러운 장소였다. 적어도 사오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사오리는 늘 재즈 취향이었고, 하리는 늘 그런 음악은 따분하다고 칭얼거렸다. 사오리는 <님바사>를, 하리는 <러스티 클레피>를 주문했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소녀 바텐더가 셰이커를 흔들었다.


“그간 리본은 몇 개나 땄어?”

“나?”


하리가 자랑스럽게 리본케이스를 꺼내보였다. 뚜껑을 열자 네 개의 리본이 반짝거렸다. 매일같이 닦아줘가면서 성실하게 관리한 결과로 특별한 광택이었다.


“네 개.”

“정말로 대단하구나, 하리. 이런 때에도 리본을 따다니.”

약간의 존경, 그리고 노골적인 책망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꼬맹이들이랑 내 콘테스트는 무슨 상관인데!”

“그래, 그런 점이 대단하다고.”


사오리가 위스키를 들이켰다. 하리의 눈을 들여다보면 사오리가 비칠 뿐 그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공과 사가 철저한 사람이었던가. 그래도 절친했던 아이들의 안부조차 물어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은 얄미울 지경이었다. 사오리가 하다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


“슈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

“그래? 난 예전부터 그 꼬맹이가 마음에 안 들었어.”


하리가 성급하게 잔을 들었다. 적갈색 <러스티 클레피>가 약간 넘쳐 옷을 적시자, 하리는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오리가 답답한 마음으로 그의 한심한 언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내가 울어주기라도 바라는거니?”

“.......”

“아니면 뭐, 내가 가서 그 소년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라도 하라고?”

“...그래, 네가 그렇게 해줬으면 참 좋겠다.”

“야, 사오리, 울어?”


사오리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님바사>의 수면 위로 눈물이 딱 한 방울 떨어졌다.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걔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


하리가 잔을 비웠다.


“그래, 그럼, 네가 듣고 싶은 얘기나 좀 해보자. 카모쨩은 잘 지내고?”


카모쨩? 아.


“하루카 말이구나. 그 앤……”

“다음 콘테스트에도 안 나와?”

“토우카시티의 온실에서 몇 달째 은신하고 있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온실? 남친이랑 같이?”


사오리는 실소했다.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그럴 리가.”


이어서 사오리도 잔을 비웠다. 차라리, 하리 말대로였다면 좋았을텐데. 사오리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슈를 떠올렸다. 참혹했다. 귀공자라고 불리우던 소년의 얼굴은 거무튀튀하게 그늘이 드리웠고 그가 항상 긴 소매로 숨겼던 팔목에는 길게, 하얗게 흉터가 있었다. 소년은 예로부터 극단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예민했고,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런 그에게 코디네이터ㅡ연예인ㅡ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첫눈에는 유약한 인상이었던 소녀는 성격이 유연해 각종 가십, 몰려오는 리포터들, 철없는 여자아이들(슈의 광팬)의 저주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오로지 콘테스트를 계속했다. 그러나 소년이 썩어문드러지고, 소년을 사랑했던 소녀는 그와 함께 추락했다. 소녀가 사랑했던 소년의 상처는 그대로 소녀 자신의 상처였다. 슈는 아무도 모르는 엔쥬시티의 작은 여관집 방구석에 처박혀 그저 멸망해가고 있었고, 소녀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 소유의 온실에서 포켓몬과 지내며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했다.


둘과 함께 여행길을 떠났던 하리는? 슈와 하루카가 급속도로 망가져가는 동안?


네 개.


사오리는 그만 울 것만 같았다.


“너는 그 애들한테 느껴지는 게 없어?”


사오리가 하리를 노려봤다. 하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없어. 콘테스트에도 못 나오는 코디네이터 따위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어.”


하리는 무척이나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일생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두 코디네이터를 잃었다.


ㅡ내가 관심이 있는 건


하리는 허리를 숙여 머리카락도 얼굴도 눈도 입술도 빨간 여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몹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ㅡ이제 사오리밖에 없어.


사오리는 좁은 테이블 위에 동그랗게 엎드려 조용히 흐느꼈다. 하리는 오직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한 번, 카운터를 한 번 흘겨보더니 테이블 위에 지폐 두 장을 쾅 내려놓고는 홀로 장소를 빠져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리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두 개 계산했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미나마츠] 외로움 싱크로, 아픔나누기  (0) 2016.05.21
[체레N] Hitorinbo Envy  (0) 2016.05.21

(2015. 3. 3)


 엔쥬시티의 짐리더가 죽었대.


 그거 정말이야? 응, 고스트는 역시 불길해, 그치? 세상에… 고스트한테 살해당한거야? 아니, 그건 아니래. 그럼? 사람한테. ...난 고스트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것 같아. 그치만 그 사람, 살해당하기 전부터 이미 이상해져 있었대. 그건 역시 고스트의 짓이 아닐까? 무서워…


 그만해. 미나키는 토할 것 같았다. 일부러 들리도록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소문은 삽시간에 야마부키 시티까지 퍼졌다.


 다시는 스이쿤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이쿤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 앞에서만 나타난다고 전해지니까. 소년 시절부터 가져왔던 길고도 달콤한 꿈이었다. 아니, 현실이었다. 스이쿤만이 자신의 현실이었다. 하나의 현실로부터 죽음을 경험하고 또 하나의 현실로. 아니, 이제부터야말로 꿈을 꿔야할지도 모른다.


가장 마주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마츠바.


 

*  *  *


 

 “뭐라고?”


 “미나키, 그건 못 들었다는 뜻, 아니면 못 들은 척 해주겠다는 뜻?”


 마츠바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미나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반복했다.


 며칠 전에. 세키치쿠의. 안즈랑. 했어.


 “...마츠바, 이건 자제력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자제할 생각이 없는거지?”

 “그 말대로야.”


 미나키가 이마를 짚었다.


 “어이, 마츠바. 안즈는”

 “12살이라고. 그걸 말하고 싶은거지?”

 “키요우가 이걸 알면...”

 “하? 키요우가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키요우는 관련 없지. 이건 네 자신의 양심에 대힌 얘기라고! 네가 구제불능인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지킬 건 지켜, 제발 좀!”


 “.......”


무언가 대답하려던 듯한 마츠바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져갔다.

 

“마츠바?”


 그는 이따금씩 대화하던 중에도 갑자기 멍해지곤 했다. 그것이 매번 그가 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보고 있는 순간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를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자라고 소개했다. 미나키는 그를 잠시 기다린 뒤 조용히 물었다.

“...뭘 봤어?”

“모르겠어…. 거므스름한 것들. 아마 유령… 악령이겠지..”

나 참, 내가 만만해보이는건지. 그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유령이 보이는 사람은 극히 적기 때문에 유령들은 모두 절실했다고 그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후우, 피곤한 것들이라니까.”


“...마츠바, 얘기 도중이었는데 말이지.”

“그래, 그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피임은 제대로 했어?”


 미나키의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야! 미나키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했을 것 같아?”

“나는 걱정돼.”

“했을 리 없으니까.”


어이, 마츠바! 미나키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마츠바는 슬쩍 웃고는 미나키를 가까이 끌어당겨, 귀에 속삭였다.


괜찮아.


그리고는 귀끝부터 콧등까지 새빨개진 그를 밀어내 거리를 두고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불임이니까, 난.”


마츠바의 솔직한 말에 문득 울적해진 미나키는 밝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호우오우는 올바른 마음을 가진 트레이너 앞에만 나타난다고 하던데.”

“제기랄. 그럼 넌 스이쿤이 좋아하는 깨끗한 마음을 가졌고?”


그가 키득거렸다.

“적어도 너보다는.”


 

*  *  *


 

“젠장! 또 놓쳤어.”


미나키가 흙바닥에 얕게 찍힌 발자국을 노려봤다. 의심의 여지 없이 스이쿤의 발자국이었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날듯이 우아하게 뛰는 스이쿤은 아주 옅은 흔적만을 남겼다.


“나는 십수년째 너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너는 그리도 내가 싫은거냐.”


익숙한 거리의 풍경. 멀리까지 들려오는 전통 음악.


“...아니면 날 엔쥬시티로 인도한건가, 스이쿤?”


“어서와, 미나키. 스이쿤은 잡았어?”

“그럴 리 없잖아.”

“머물다 갈거야?”


질문이었다. 마츠바는 부탁하지 않았지만 미나키는 거절할 수 없었다.


“몇주일만. 잠시 쉬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스이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도 항상 호우오우에게 기도하고 있지만, 역시 넌 평생 스이쿤은 못 잡을 것 같은데.”

“...다른 데 가서 쉴까.”


하하하, 농담이야. 그가 마르게 웃었다. 느긋하게 있다 가. 이 계절의 엔쥬시티는 가장 아름다우니까.


“오래 있다 가.”


목소리가 거칠었다. 긴 소매 옷과 목도리로 평소보다 야윈 몸을 가리고 있다는 걸 미나키는 알 수 없었다.


마츠바는 미나키를 집으로 초대했다. 주로 엔쥬 짐에서 만났기 때문에 미나키가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제법 오랜만의 일이었다. 평범한 엔쥬시티식 가옥이었지만 구석구석에 녹아든 그의 향기가 좋았다. 곳곳에 붙여진 부적의 갯수는 눈대중으로 보아도 저번보다 상당히 많아진 갯수였다. 전부 그가 직접 오린 종이에 붓에 먹을 묻혀 쓰고 그려서 만들어졌다. 미나키의 망토 안쪽에도 한 장이 붙어있었다. 앉아. 그가 1인용으로 보이는 좁은 코타츠를 가리켰다. 미나키가 착석하자 그는 저벅저벅 부엌에 가서 선반을 뒤적거렸다. 컵 두 개와 작은 통을 꺼냈다. 미리 가스렌지에 올려져있던 주전자를 집어들어 물을 부었다. 물줄기가 스테인레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했다. 그리고 가스렌지에 다시 주전자를 올리고, 불을 켰다. 그는 센 불을 애용했다. 얼마 안 지나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키는 눈을 감았다.

딸깍, 마츠바는 불을 껐다. 물소리가 멈췄다.


“나도 집에는 자주 안 오니까 별로 대접할 게 없네. 녹차라도 가져왔어.”


그는 단풍이 그려진 쟁반에 티백을 담근 주전자와 컵 두 개를 내왔다.


“충분해, 마츠바.”


그가 다가와 미나키의 맞은편에 앉았다.

컵을 양손으로 감싸드니 따뜻함이 미나키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호호 불어서 식힌 다음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켰다. 뜨끈한 물이 혀에서부터 목으로 넘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녹차였지만 맛있었다.

마츠바의 컵에서도 김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는 냉수를 마시듯 차를 넘기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음식은 항상 지나치게 달거나, 짜거나, 시거나, 매웠다.. 그는 모든 것을 일반인보다 덜하게 느꼈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엔쥬 짐에서 보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나키는 물었다. 마츠바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츠메랑 헤어졌어.”

“최근에? …..난 한참 전에 헤어진 줄 알았는데.”

“왜?”


고개를 갸웃하는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연애는 한 사람만 바라보면서 하는 거니까.”

너, 봄에는 안즈랑 했었잖아. 미나키가 한숨지었다.


“연애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고 표현했으면서도 지나간 것을 연애라 표현하는 데에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야?”


“나츠메는 날 이해해.”

“그런 식으로 어리광부리니까…”

“그런 의미가 아냐, 미나키.”


마츠바가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그러고보면 야마부키 시티의 짐리더는 미래를 본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츠메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을까.


“그치만 끝까지 이해해주지는 못했으니까...  헤어지게 됐어.”


당연하지 않게 들리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초능력과 영능력은 닮은 것 같아도 전혀 별개니까… 어쩔 수 없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영능력을 가졌다. 그는 몇번인가 미나키에게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미나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 뿐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경청하던 미나키도 알 수 없는 설명에 점차 질려갔고, 언젠가부터 그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을 미나키에게 묘사하는 것을 그만뒀다. 자신이 들어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야마부키 시티의 나츠메가 대신 들어주게 되었다는 것--그리고 그녀는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미나키는 무척이나 안심했었다.


“......내가 들을게.”

“응?”

“네 얘기. 들은지 하도 오래돼서 다시 궁금해졌다.”


그의 탁한 자안이 미나키를 응시했다. 그가 빙긋 웃었다. 그는 죽은 듯이 웃었다.


“고마워, 미나키.”


그리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에피를 쓰는 무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코가네시티의 아카네와 포케슬론에 대해서, 타마무시시티의 에리카에게 받은 꽃이 시든 것에 대해서, 카스미의 짐이 있는 하나다시티의 동굴에 대한 전설에 대해서, 호우오우에 대해서, 그리고 스이쿤에 대해서 얘기했다. 시온타운에 라디오탑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포켓몬타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유령에 대한 소재가 나왔지만 그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츠바는 방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잠들지 못했기 때문에 미나키는 아침이 될 때까지 그와 함께 밤을 샜다. 미나키가 내내 깨어있었다는 걸 몰랐던 마츠바는 밤새 경독에 떨었다.


 

*  *  *


 

미나키는 마츠바를 존중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그가 자신에게 아주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숨김없는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택했다. 그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과자를 사러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집에 남아있던 그가 내내 검은 소매로 가리고 있었던 손목이 너무나도 붉어지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미나키는 외면할 수 없었다. 미나키의 손에 힘이 풀리고 과자가 든 비닐봉지가 중력에 눌려 바닥에 툭 떨어졌다. 과자가 흘렀다.


마츠바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현관에 굳어있는 미나키를 돌아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가 꺼낸 말은 단순했다.


“어서와.”


“......뭘 한거야, 너.”

“아, 미안.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부적도 너무 많이 붙이면 체력소모가 심하니까 임시방편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어. 그는 단조롭게 설명했다. 미나키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했다. 강렬한 남새가 코를 찔러서 생각이 잘 되지를 않았다.


“보기엔 꼴사납겠지만, 이러면 안 들리거든. 소리가.”


그렇게 말하며 마츠바가 한번 더 손목을 그었을 때, 미나키는 비명을 질렀다. 제발 그만해!


그는 키득키득 좀먹혀들어가듯 웃었다. 미나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진정해, 미나키. 죽지는 않으니까.”

“......뭐가 들리길래 그래. 나한테 말해봐.”


마츠바는 또 웃고 있었다. 이번엔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여러가지… 정말 여러가지.”


운을 띄우며 그가 칼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미나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령이야?”

“...아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그가 눈을 가렸다. 자해한 손목이 닿은 턱 주변에도 묽은 피가 묻었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그는 아주 희미하게 중얼거렸지만 미나키는 들었다.


“안 들어도 돼. 네가 무슨 정의의 히어로도 아니고.”

“듣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도 끊임없이 들려와….”

“마츠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고 행동하던 그가 풀죽은 채 웅크린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미나키는 일순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들어주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건마는 상상 이상으로 듣기 괴로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에.

“미나키, 난 피곤해 죽을 것 같아.”

그의 목소리가 울먹거렸지만 그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그는 매 순간 너무나도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너무나도 혼자였다.

“항상 보여. 항상. 잠든 뒤에도, 깨어난 직후에도.”

“…….”

“넌 절대 모를거야.”

알 필요도 없고. 그는 버릇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그치만 열중하고 있을 때만큼은 안 보이니까.”

그가 식칼을 눈짓했다. 미나키의 마음이 찢어졌다.

“배틀할 때나, 그 외에도 이것저것. 그래서 짐리더 자리는 나한테 제격이야.”

미나키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의 음식이 짠 이유. 그가 여자와 뒹구는 밤이 유난히 많은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언제나 그가 다른 곳을 보는 듯했던 이유. 무력감이 미나키를 짓눌렀다.

엔쥬시티의 가을은 항상 추웠지만 그들의 밤은 뜨거웠다.

*  *  *


 

가을을 거듭할수록 마츠바는 점점 푸석거렸다. 그의 음식은 매번 전보다 짠 맛이었다. 미나키가 엔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사기시티에 가있었다. 미캉과 같은 침대에. 협회는 그에게 경고를 내렸다.


그는 새벽에 엔쥬시티로 돌아왔다.


“여어, 미나키.”


듣기 괴롭도록 말라붙은 목소리였다.


“...아침에 오지 그랬어. 미캉이랑 있었다며.”

“네가 왔는데 어떻게.”

“미캉은 아침에 혼자 일어나겠군.”


대화는 건조했다.


“너도 날 기다리고 있었잖아. 잠도 안 자고.”

“너도 안 자잖아.”

“나는 안 자도 괜찮아….녹차라도 가져올까?”

“아니, 자자.”


그가 갸웃거렸다. 같이? 피식거리는 그의 웃음은 영양가가 없었다.


“제발, 자.”

“......최근 더 극성이야. 그런 계절인가봐.”


그리고 미나키는 들었다.


“죽여줘, 미나키.”


못 들은 척 했다.


*  *  *


 

마츠바는 거의 언제나 미나키를 이겼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는 일련의 과정 중에도 습관처럼 싱글거렸다. 표정에서 웃음이 지워지기 전에 그는 미나키의 눈을 가렸다. 시각을 잃자 통각이 예민해져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의 떨림이 너무나도 가깝게 미나키에게 전해져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가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지 미나키는 볼 수 없었다.

  

다만 미나키의 시야를 가리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지고 나서, 눈을 감은 그는 편안해 보였다.


 

*  *  *


 

그의 장례식에서는 흰 옷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한때 수도승이었다. 미나키에게는 낯선 방식의 장례였다.


산 것보다 죽은 것과 친했던 그는 관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  *  *


 

미나키는 엔쥬시티를 뛰쳐나와 죠토지방을 떠났다.


*  *  *


 

미나키는 리니어 트레인의 창가 좌석에 앉아있었다. 빠르게 바뀌는 창밖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뒤섞여 흐릿했다. 그의 일생은 이것과 닮은 모습이었던 걸까.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이 타올랐다. 괴로우리만치 밝았지만 뜨거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불은 오랫동안 불타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시 칠흑. 멀리서 몇 명의 남자가 떠드는 소리가 불분명하게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조용했다. 그러다 별안간 땅에 삽을 꽂아넣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흙이나 모래 같은 것이 고체 표면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불규칙하게 반복하는 소리만이 수십번 반복되어 들렸다. 미나키는 미칠 것 같았다.


드디어 눈을 떴을 때는  리니어 트레인 안이었다.

즐거운 여행 되셨나요? 코가네시티, 코가네시티에 도착했습니다. 잊어버린 물건이 없는지 잘 확인하고 천천히 하차해주십시오. 고객님의 다음 승차를 기다립니다.

쓸데없이 긴 안내방송이라고 멍하니 생각하며 미나키는 열차에서 발을 내딛었다. 죠토의 땅을 밟고 죠토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고향의 공기는 낯설기만 했다. 고개를 들었다. 플랫폼의 끝에는

 마츠바?


봄바람에 실려 하늘거리는 끝자락이 빨간 보라색 목도리가 미나키의 시선을 잡았다. 검은 긴소매옷, 회색 바지. 미나키가 시선을 올려 남자의 머리를 보았다. 살랑거리는 금발.  그는 틀림없이


“마츠바?”


미나키가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얼굴을 들었다. 한 치도 틀림없이 마츠바인 이목구비.


편안하게 잠들었을 터인 그가 서있었다. 그는 죽어갈 때보다도 슬픈 눈빛이었다. 그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미나키에게는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미나키는 손을 뻗었다. 그도 팔을 뻗었다.


미나키를 끌어안기 전에 그는 봄바람에 섞여 날아가, 흩어졌다.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하리사오]  (0) 2016.05.21
[체레N] Hitorinbo Envy  (0) 2016.05.21

(2015. 2. 23)

"Hitorinbo Envy"

 

Pokemon BW&BW2 Cheren*N

w. Runtz

 

네 꿈을 꿨다. 너는 손뼉을 치며 경쾌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면 풀숲에 숨어있던 포켓몬이 하나 둘 나타나서 너를 뒤따랐다. 너는 마치 포켓몬의 군단장 같은 모습이었다. '옳지, 옳지, 이리 오너라.'

 


 

"금요일마다 N을 만나. 여기서."

 

N? 정말로? 여기서?

 

"아, 응. 그 녀석이랑은 아는 사이라서. 그런데 금요일이라고?"

 

"응, 금요일."

 

"다음 주 금요일에 녀석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설마 너한테는 아무 말도 안해준거야?"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나 참, 숙녀를 기다리게 하다니."

 

아냐! 아직 금요일도 아니고... 그 사이에 연락을 줄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약속 같은 거 한 적 없는걸!

 

순진하구나.

 

금요일날 널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벨은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 토우코는 N을 찾으러 사라졌다.

 

사정은 있었지만 핑계거리였다. 마음에서부터 멀어져 있었다. 소꿉친구의 끈끈한 인연은 이제 없었다. 토우코가 없는 탓이었다. 세 명이었을 때는 완벽한 균형이었는데.

 

무너졌다.

 

 

 

N이 토우코를 만나면 둘이 함께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서로 찾아 각각 지구의 반대편을 떠돌다 잇슈지방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다시 둘이서 함께 떠나버리고 말았다.

 

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연락은 잦아지지 않았다.

 

 

 

싯포시티의 짐리더가 되었다. 은퇴한 아데크를 대체하는 새 챔피언은 아이리스였다. 네 살 정도 연하의 자그마한 아이였다.

 

첫번째 짐은 도전자도 드물었다. 특색이 없는 노말 타입은 인기가 없었다. 그래도 일은 많았다. 나는 선생님이었다. PWT는 나를 아주 가끔씩만 불렀다. 일이 바쁜 탓이었다.

 

되고 싶었던 건 역시 챔피언이다.

 

 

 

불타오르던 건 지배욕이었다. 그리고 일말의 억울함과 호기심이 있었다. 네 살은 생각보다도 뽀얬다. 너는 여름에도 짧은 옷을 입지 않아서다. 그 살결이 매일 밤 꿈에 나왔기 때문에 한동안 몽정했다.

 

 

 

너는 실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더 꼭 붙잡고 있었다.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일 년에 한두번 나타나는 사람은 한 명으로 충분했다.

 

 

 

너는 언젠가부터 나와 대화하지 않았다. 대신 포켓몬과 두 배로 이야기했다. 너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전부 내 탓이었지만 외로웠다.

 

 

 

네 손을 잡고 라이몬으로 뛰쳐나갔다. 라이몬에서는 1년에 한 번 축제가 열린다. 축제 불빛에 의식을 맡긴 채 모든 걸 잊은 척 했다. 캔디 애플을 두 개 사서 하나를 네 손에 들려줬다. 너는 감이 날카로워서 사격을 잘 했다. 하얀 유카타가 무척 어울렸다.

 

 

 

영원히 엇갈릴 운명은 아니었다. 마름꽃마을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처음 여행을 나선 여름으로부터 3년 뒤의 겨울에 N은 토우코와 재결합했다.

 

 

 

토우코가 청혼했다. N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충격적이게도 축하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녀는 함께 잇슈 땅을 떠났다. 벨도 한층 더 심도깊은 연구를 위해 잠시 호우엔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협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랜만이야, 다이켄키. 나, 짐리더를 관뒀어."

 

 

 

"...N?"

 

"...체렌."

 

 

좋아해, N.


'Log > 2015~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기라히카] 암리타  (0) 2016.05.21
[코우히카] 리포트  (0) 2016.05.21
미미쨩  (0) 2016.05.21
[하리사오]  (0) 2016.05.21
[미나마츠] 외로움 싱크로, 아픔나누기  (0) 201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