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하반기~2012년 초 추정)

 "……와타루."

 진홍색 머리칼이 잔뜩 흐뜨러진 채 실버가 허덕이며 와타루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색 눈부터 주홍색 머리칼과 거친 피부까지, 그리고 그의 빌어먹을 성격도 전부, 전부 다. 그가 웃을 때마다 보이는 송곳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웃음은 역겨웠으니까. 그런데도 와타루는 입꼬리를 올린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를 사용해 실버의 턱을 살짝, 그러나 강렬하게 들어올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간격을 크게 좁힌다.

 "실버, 많이 지쳐 보이네? 강하지만, 역시 넌 나약한 부류야. 그 옐로였나 하는 녀석처럼."

 "크윽……, 넌 그 옐로한테 당한 녀석 아니냐."

 그쯔음 겨우 버티던 두 다리의 힘이 풀린 실버는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재미있는 자세네. 아, 옐로 그 계집 말이지. 하지만 말야, 너도 인정하고 있잖아?"

 "이…… 입닥쳐."

 "내가 그 때 말했듯이 넌 애정이 너무 부족하잖아? 그 계집은 정이 많은 녀석이었지. 그래서 너보단 강한 거라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옐로보다는 못해도…… 너보단 강할지도 모르지."

 "그런 꼴인 주제에 말은 잘 하네?"

 그렇다. 입은 놀리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잘난 게 아니었다. 실버의 뽀얀 피부는 군데군데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상처 안 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 셔츠는 마구 찢겨져 흰 속살을 드러내었다. 와타루는 우세한 상황이었기에 태평하게 있을 수 있었지만, 그 역시 그렇게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완전히 망가진 실버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그 역시 피로 얼룩져있었다. 그런 그는 무게를 가해 실버를 눕혔다. 머리가 땅에 닿자, 붉은 머리칼은 아름답게 퍼졌다. 와타루는 말없이 그의 가슴골을 물어 키스마크를 새겨넣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송곳니 때문일 것이다. 와타루는 상처를 입에 문 채로 이빨을 거두고 빨기 시작했다. 실버의 피는 달콤했다. 실버는 증오를 거두지 않은 채 은색 눈으로 와타루를 째려보았다.

 "흐읏……, 떨어져."

 실버가 말하자, 의외로 와타루는 쉽게 떨어져준다. 그리고 가슴골에서 막 떼어낸 입술을 실버의 입술 위에 포갠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바로 떼어낸다. 빨간색 겉옷과 검은 케이프를 두르며 뒤를 돌아보자, 강물로 얼굴의 피를 씻어내는 실버가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상처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묻은 피를 씻겨낸 그의 얼굴은 다시 본래의 새하얀 색깔을 되찾았다. 와타루는 그가 중국풍의 겉ㅇ소을 걸치고 지퍼를 올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내일, 거기로 찾아와."

 "다시는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둘은 헤어졌다. 실버는 그 까마귀를, 와타루는 그 용을 사용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6시 반의 황혼은 아름다웠다.

 실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크리스와 골드와 함께 웃으면서 식사나 하겠지, 하고 와타루는 생각했다.

 다음 날, 무척이나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개의 기술을 사용해가며 실버가 인연의 그 곳을 찾아갔을 때에, 이미 와타루는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타루."

 "마치 9년 전의 그 때 같네?"

 "그래서, 어쩌려고?"

 와타루가 그 물음에 권총을 꺼내었다. 실버는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흐응……."

 실버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무기를 꺼내자 무언가 살벌한 분위기가 방을 채웠다.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둘은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와타루가 무기를 든 채 실버의 입술을 덮쳤다. 그들은 서로 타액을 주고받으며 혀를 놀렸다. 그리고 와타루가 총구를 실버의 등에 갖다대자 실버는 그에 반응한 듯 칼을 바로잡는다. 날카로운 칼날이 파고들자, 와타루의 옷은 붉게 붉게 물들어간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매우 위험한 종류였던 총알은 실버의 심장을 관통한다.

 "영원히 재회하지 말자고, 와타루."

 "기꺼이 수락하지."

 피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한다.

 몇 개월 뒤, 바다에서 배 출몰 사고가 일어나, 그 바다는 매우 샅샅히 수색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도 며칠 뒤, 이제는 평범하디평범해진 기사가 나왔다.

 「바다 수색 중, 타살로 추정되는 10대 소년 한 명과 20대 남성 발견」

 아무도 두 사람의 비극을 아는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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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8

*R2 감상 전에 씀


 루루슈가 손짓했다. 그러나 그 상대―쿠루루기 스자쿠―는 마치 맹수처럼, 눈의 흰자위를 빛내며, 이빨을 드러내고 그르렁댈 뿐이었다.

 "제로라는 이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쿠루루기 스자쿠는 ㅏㅇ마 현재의 루루슈에게 있어서 쓰레기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근거 그 첫째, 루루슈는 아마도 매정하게 쿠루루기 스자쿠의 살의를 씹어먹었―정정한다, 씹어 뱉었다. 선혈을 담아놓은양 붉게 빛나는 눈이 미약하게나마 호선을 그렸고, 입은 확실하게 냉소를 짓고 있었다. 

 다정하지 못하게나마 웃어주는 옛날 친구, 소꿉친구라 해도 좋을 소년에게, 스자쿠는 잠시동안 '저 작은 새끼한테 빅엿을 먹여줄까 칼빵을 먹여줄까' 고민하던 것을 금방내 접어버렸다.

 태도가 차갑네. 루루슈가 흥얼거렸다. 그리고 엄청난 발상을 해냈다. 나는 앞으로 원수지게 될 이 남자에게―

*

 루루슈는 쿠루루기 스자쿠와는 달랐다. 그는 그의 빛바랜 친구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고 등짝을 토닥이고 허리에 양손을 감았다―날려주려던 더블 뻐큐 대신에.

 상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효과는 굉장했다! 정도의 대사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루루슈는 확실히, 대단한 지략가였다.

 따뜻할 법한 포옹을 빅엿이라거나 더블 뻐큐라거나―같은 말이긴 하지만―그런 것에 비교할 만한 화력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하게 그의 빛바랜 쓰레기에게 언제든지 총구를 들이댈 수 있도록 구속구를 채웠다.

 "유페미아는 쓰레기였다."

 수갑에 묶여있어서야―따뜻할 법한 포옹에 구속당해서야―그렇게 말하는 이의 심장을 도려낼 수는 없다.

 "너도 만만찮은 쓰레기지."

 살코기를 우물거리며―목줄을 당기며―루루슈가 계속했다. 이래서야 반론도 꺼낼 수 없다.

 "그러니 둘이서 쓰레기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도록 하지 그랬어."

 7년 전을 상기시키는 순수하고 예쁘장한 쇼타미소에, 다리에 중압감이 느껴, 질 리 없다. 천천히 경험자의 다리를 옭아매 너무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꾸는 루루슈가 족쇄를 채운다.

 ―부녀자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한 말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장미밭에 온 소감을 부디.


-

2017. 1. 9

제 소감은요......... 아.......................................................... 때려쳐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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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4)


 눈이 뜨였다.

 서서히 통감되기 시작하는 한기에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정신이 차려졌다. 아직 잠 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아직 무감각한 손을 어찌어찌 뻗어 더듬거리며 몬스터볼의 여닫이 버튼을 찌르듯 눌렀다. 튀어나온 날쌩마를 보고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블레이범이 아니였다니…, 내가 잠을 아직 못 깼나 보구나. 어쨌든 똑같은 불꽃 타입이니 상관은 없다.

 "좀 데워줘. 열풍."

 모기만도 못한 볼륨의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빠뜨린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게 뭔지 떠올라야 말이지. 좀처럼 시원스레 떠오르질 않아서 안 말하고 말았다.

 -히히히힝!

 쓸데없이 고개를 쳐들어서 품위를 자랑하며 날쌩마가 울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급속도로 후끈해지는 지대--아니, 순간적으로 빠뜨렸던 '중요한 키워드'가 떠올라버렸다.

 "멈춰! 당장 멈춰! 너 이자식, 날 죽이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돌던 차가운 기운은 어디가고, 어느새 필요 이상으로 후끈해진 지대였다. 재빨리 말렸기에 망정이지 몇 초만 늦었어도 치명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배틀의 용도로 존재하는 기술이니까.

 "앞으로 아침에 내가 잠긴 목소리로 열풍 명령하면 아주 약하게 쓰도록 해라. 추우니까 방 데피라는 뜻이야. 배틀할 때처럼 뜨거우면 곤란해. 그렇다고 또 배틀할 때까지 열풍을 미풍으로 쓰면 그날부로 너랑 나는 끝이다."

 미래의 안전을 위해 조금 따끔하게 말했을 뿐인데, 엄청 진지하게 말한 '이자식 날 죽이려고,'와 '그날부로 너랑 나는 끝이다,' 때문인지 날쌩마의 기가 팍 꺾인 게 보였다. 위로 차원으로 활활 타는 갈기를 부드럽게 쓰담아주자 날쌩마는 다시 명랑해졌다. 지나치게 에너제틱한 움직임에 그만 그 뿔에 찔릴 뻔했고, 아슬아슬하게 피하고서는 다시 따끔한 꾸지람을 놓았다. 결과적으로 날쌩마는 다시 우울해졌지만 방금까지의 사건으로 이 포켓몬은 기운이 없는 편이 낫다는 교훈을 얻은 나는 별달리 위로해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 이상 뜸 들일 시간이 없어, 재빨리 침낭을 접고 짐을 챙겼다. 내야 할 속도와 날쌩마에게 남은 체력 등을 고려하여 날쌩마를 볼에 되돌려놓고는 제브라이카를 꺼내었다. 배낭을 대충 매고서 포켓몬의 등 위에 올라탔다. 첫 번째 우편봉투의 뒷면을 살핌과 함께 목적지는 정해졌다.

  "제브라이카, 일단 북쪽이다."

 

 

*  *  *

 

 

 제브라이카는 초원 위를 초속도로 가로질렀다. 특성이 발동된 모양이다.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상체를 조금 더 기울이고 포켓몬의 목을 더 세게 감싸잡았다. 가장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무슨 풍경보다도 소음이 먼저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내는 소음은 생각보다 작지 않다. 그리고 서서히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마을 풍경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여기다' 싶을 정도로 가까워 졌을 때 제브라이카를 멈춰세웠다. 한바탕 움직여준 제브라이카에게 포상으로 귀와 귀 사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제브라이카가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누구와는 달리 정말 품위있는 모습이다.

 "어어…, 전에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나요?"

 거리를 걷던 중 앳된 소녀가 물었다. 직업상, 만나게 되는 사람이 한둘이여야 말이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쥐어짜보자 대충이지만 소녀가 누군지 기억났다.

 "분명히, 너 저번에 인형을 샀었지?"

 "네! 깜지곰 인형! 생각났다! 언니, 우체부 언니지?"

 "정답!"

 기억해 주니 기뻐서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마음 같아선 더 얘기하고 싶지만, 언니 바쁘거든. 오늘도 편지하고 택배를 잔뜩 가져와서, 빨리 배달해주지 않으면 안되. 그럼, 다음번에 보자! 언니 직업이 직업이잖니, 언젠가 꼭 다시 이 거리를 걸을 날이 올거야."

 "언니, 약속이야?"

 "그래, 약속."

 무릎을 꿇어서 키높이를 맞추고, 꼬마 소녀가 내민 앙증맞은 새끼 손가락에 비교적 각져 보이는 내 새끼를 걸고 힘차게 두 번 흔들어줬다. 그러자 '후후후,' 소녀가 웃었다.

 "참, 다음번에 만나면 꼭 이름을 불러줘야 되?"

 "어…?"

 "하루! 여기저기서 보이는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이(李 말고 this) 하루는 특별해진거야, 잊으면 안되! 앞으로는 매일 오늘처럼 양갈래로 묶을 테니까!"

 "알았어. 그럼 또 보자."

 "응, 언니!"

 

 

*  *  *

 

 

 집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보니 좋지 않은 타이밍에 온 것 같았다. 그래도 별 수 있나.

 "편지 두 장이랑 소포 하나 왔어요!"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어쩔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였다. 불평하며 거칠게 문을 열어제낀 사람은 의외로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미청년이였다.

 "여기요. 착불이네요. 300 포켓이요."

 "더럽게 비싸네. 자."

 당신 입버릇이 더 더럽습니다요. 어쨌든 확실히 수입 300포켓은 거두어들였다.

 편지 뒷면을 확인한 청년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반가운 발신자? 어차피 내 알 바는 아니기에 등을 돌리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속편 : http://cafe.naver.com/since20071003/27512 by. 잉어킹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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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3)


카가미네 린 - 노말라이즈


앞쪽을 보고 있어도 아무도 보지 않는 사람들


앉은 의자는 뭔가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져


창문의 저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등불만이 드문드문

계속 바라볼 생각도 지금은 조금 없는듯해

 

 
아~ 어제, 오늘, 내일의 그 끝까지


평탄하고 느슨한 현상이 끝없이 이어져가

 

 


앞으로도 무의식을 노멀라이즈(정규화) 

 
아무것도 없는 듯한 일상, 돌고도는 달


깨달은 척하며 그 나름대로 굽이치면서

 
끝없이 계속 되는 길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채로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앞쪽만을 보고서 당당히 살아가도 보아주는 사람같은건 없어.

그건 당연한게 아닐까. 운명같은건 믿지 않지만, 나, 카가미네 린이라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정의되어버렸으니까. '카가미네 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아니, 이하일지는 모르겠네. 주로는 아니지만, 가끔식 이하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가능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따위엔

말려들고 싶지 않지만, 결국 그건 그들만의 사고방식에서 이 세상에서 '카가미네 린' 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치도 틀리지 않은 정확한 설명이 되어버려서 나조차도 도취되어버려.

 

 

 사는것조차 의미없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곳에 온다. 공식적으로는 '모두의 영역' 이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 곳. 그러니까, 정확하게 따지자면 내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역을 100%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 이곳이니까,

나 하나쯤 눌러앉아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10m 도 못가서 익숙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거리는 장면을 풀사이즈로 볼 수 있는, 원래는 그닥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는 않는 장소이지만

그들은 이 곳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앞에 유리벽 한 장의 차이로 앞에 있다고 해도 귀찮게 설명할 일은 없다. 이 곳의 출입 역시 자유로우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특별이 문을 걸어잠근다거나 하지 않는데도. 기쁜듯한 몸짓으로, 하지만 그와는 상반되는 무표정으로 방방 뛰어다니다가 지치면 벤치에 털썩- 하는 소리를 내며 걸터앉아. 햇살이 제법 강한 여름인지라, 의자의 따뜻함이 신체 안쪽 깊숙히까지 전해져온다.

 

 그러니까, 이 곳을 설명하자면, 그다지 넓지는 않은 정원, 그리고 그 끝에는 벤치와 작은 테이블이 있다. 그 옆에는 금붕어들이 서식중이다. 뚫려있기는 한 곳이지만,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반투명의 유리벽은 꽤나 높은 편이다. 그래서 높은 곳이라고 아래의 경치를 구경하는건 결국 불가능하다. 아래의 경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시끄러운 도시의 한복판에서는 본능적으로 드문드문 반짝이는 등불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보이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는것에 감각같은걸 집중해서 느낄 필요는 없어. 마치 살아가는 이유를 연구하던 몇몇의 철학자들이 갑자기 공허함에 빠지듯. 아니면 조금 더 흔한 걸 예로 들자면, 계절에 따라서 날아오르기를 싫어해 많이 일찍은 아니지만 조금 더 일찍, 아무 생각도 없이 죽음을 택하는 철새라든가.

 

 아아-. 맑게 개인 하늘은 맑다 못해서 뜨거운 공기를 내뿜어.

가끔 오는 비조차도 평범해져버려.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공허해져서, 한숨을 푸욱- 내쉬게 된다.

살아있을 이유, 살아있을 수 없는 이유, 의미있고 보람찬 것이 무엇인가 등등, 내게 그런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단지 그 끝의 '이유' 를 뺀 단순한 선택만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공부할 것이다' 라거나 '잘 것이다' 처럼 단순보다 더 단순한 것에서 '살 것이다', '죽을 것이다' 같은, 조금은 어렵지만, 그래도 끝의 '이유'를 뺀 상태에서는 단순해져버리는 그런 선택들. 그런 선택에서 선택 기준은 단 두 가지, '좋다' 와 '별로 흥미가 없다.' 가끔은 예외도 없지만 예외가 있다면 그건 '이유'까지 생각하는게 되어버려 복잡해지고, 그래서 나는 그런 건 자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 그런 예외의 경우에서도 '남들' 에 대한 것은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현상조차 만지면 금방 흐물흐물해져버려서 더더욱 망가져버릴 정도인데, 거기에다가 남들까지 신경쓸 마음의 여유는 없다.

 

 어려운 선택도, 쉬운 선택도, 산뜻한 봄도, 뜨거운 여름도, 청량한 가을도, 차가운 여름도.

그 모든건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채 결국은 그 상태로 굳혀진 상태로 일상속에 쑤셔넣어져.

그런 일상조차 쉽게 질려버린다. 그리고 질려버린 일상속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규화시켜버린 음악도 그렇듯.

 

 그렇게 꽉꽉 채워진 일상인데도, 무언가 가장 중요한게 빠져있는건지 텅텅 빈 것만 같다.

꽉 찬 보름달도, 작아졌다가, 같은 주기로 다시 커졌다가, 다시 작아져서 결국 차있어도 차있는 것 같지 않게 되는것과 같이. 나도 모르는걸 깨닳았다고 속이고서 정열적인 척도 하면서, 일상은

결국 악순환을 계속해.

 

 그래서, 결국은 해답은 저 하늘위로 날아갔다는 거다.

그러면 날아간 대로 그것에 익숙해져서 나는 살아가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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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6)

알고 있어도


"있지, 쇼짱-"

"네? 마쉬멜로 심부름이라면 사양하ㄱ...-"

"으응, 그게 아니라서..- 그냥 궁금한게 있을 뿐이야-!"

"하아?"

궁금해야 할건 저라고요, 뱌쿠란씨. 내가 왜 상사가 처리해야할 서류들을 처리하는것도 못해서

마쉬멜로 심부름까지 해가면서 당신 밑에서 일해야하는지.

제가 그냥 상사하면 안될까요..? 라고 생각할 정도다.

"쇼짱은 어째서 밀피오레에서 일하고 있는거야?"

궁금해야 할건 저라고요, 뱌쿠란씨. 내가 왜 상사가 처리해야할 서류들을 처리하는것도 못해서

마쉬멜로 심부름까지 해가면서 당신 밑에서 일해야하는지.

그리고 어차피 내일이면 안그럴겁니다. 저는 당신을 배신하고 속편하게 살겁니다.

"글쎄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가 그의 품에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는 그를 밀쳐내고 검지와 엄지로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뭐하는겁니까, 상사."

"그 호칭 쓰지 말라ㄱ..-"

일순간에 나는 그를 넘어뜨렸다.

"그러니까 스킨쉽 금지라고요-!"

"다..단지.."

"단지 뭐요?!?!"

"작별인사.. 하고싶었어."

작별인사-, 작별인사-, 설마. 하지만 나의 슈퍼 계산력에 의하면 계산 결과는 하나 뿐이다.

그는 여태까지의 나의 작전을 모두 바늘처럼 꿰뚫고 있었다.

"그걸 안겁니까. 이건 제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나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언젠간 뱌쿠란이 나에게 위급할때 쓰라고 준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째서 제가 이런 방법을 계산해내지 못했을까요."

나는 단도를 그의 목에 대어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는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쇼..짱..."

뱌쿠란의 얼굴에 조금 불안한 미소가 띈다. 어째서 미소짓고 있는건가요. 화가 차밀어오른다.

"무서..워.."

"설마 그 말이 당신 입에서 튀어나올지는 몰랐네요. 네, '천하무적 뱌쿠란' 의 입에서."

천천히 그의 목을 날카로운 칼끝으로 긋기 시작한다. 뱌쿠란의 목에서 언젠간 그가 선물해주었던

아네모네꽃의 색의 피가 흐른다.

"언젠간 내가 선물해줬던 아네모네 꽃- 그 색이네.."

"짜증나게 제 생각을 읽지 마세요."

"쇼짱은, 그 꽃말을 알고있어?"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이지만 사실은 관심 있다. 그가 항상 어린아이같은 말투로 말했었지만 항상

귀 귀울이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지만 분명 다음 생에는, 난 붉은 장미를, 정열적인 사랑을 선물하겠지-♪"

나의 볼에 투명한 액체가 흐른다. 계속 흘러 목을 건너고 셔츠를 적신다.

뱌쿠란의 보라색 눈에도 소량의 눈물이 흐른다.

"나도.. 이건 계산하지 못했으니까..- 쇼짱의 승리네.., 으윽...읏.."

뱌쿠란이 서서히 눈을 감는다. 보라색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크게 미소짓는다.

그리고 몇 초가 흐르자 그 미소는 흐트러지고 그의 손에서 체온이 사라진다.

'무서...워..'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나의 목소리와 합해져 작은 화음을 이룬다.

무섭다. 그저 무섭다. 무서울 뿐이다. 들고있던 칼이 손에서 미끄러져내려 발에 박힌다.

서서히 아네모네의 색이 퍼져간다.

나는 용기가 없다. 지금 슬픔에 겨워 죽을 용기도,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용기도.

모든 용기가 아네모네 색으로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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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17)

노래한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구속받지 않아.

 

나는 우타타네 피코(歌手 ピコ-가수 피코).

모든게 하얘져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당신은 어떤 목소리를 원해?

당신은 어떤 노래를 원해?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아.

 

당신은 나의 목소리를 원해?

당신은 나의 노래를 원해?

 

원한다면 노래하겠어,

모든게 하얘져 없어질 때까지 노래하겠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구속받지 않아.

 

영원히 노래하면서 살아갈 뿐이야.

 

운명을 따라 당신을 위해 영원히 노래할게.

 

구속받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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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 포케스페 와타루x실버


오랜만의 휴식시간을 실버는 그저 석양을 바라보며 보낸다 어차피 그에게 지금 심각한것같은건 아무것도 없다 마스크 오브 아이스를 쓰러뜨린 이상 아무 의미도 사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와타루는 보았다 그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간다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실버는 움직이지 않는다 적색의 머리칼만이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봄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은안에 초점은 없다 붉은색의 석양빛을 따라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일 뿐이다 와타루는 권총을 꺼내어 그의 머리에 거칠게 갖다댄다 실버는 여전히 움직이지않은 채로 짧게 내뱉듯 말한다 "날 죽일 생각이야." 묻는말이라긴보다 그냥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다 방아쇠가 당겨진다 모든게 하얗게 변한다 그저 극심한 부서져버릴듯한 고통이 느껴질 뿐 아 맞다 부서지는 중이였지 붉은색의 혈액은 이미 빨간색의 머리칼을 더욱 짙은 적색으로 물들인다 그리고 정적이 이어진다 영원하고 조용한 정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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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8)


 "아크로마!"

 "메이 양…?"

 와락, 메이가 달려들어 아크로마를 껴안았다. 둥글게 말아올린 밤색 머리카락이 깜찍하게 찰랑거렸다. 갑작스레 가해진 무게에 잠시 표정을 잃은 아크로마는 이내 잔잔한 미소를 되찾았다.

 "아크로마, 무척 기쁜 일이 있었어! 뭐~게?"

 메이의 분홍빛 뺨과 맑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아크로마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성적인 회색의 과학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뭘까요, 저로써는 알 수가 없네요. 너무 과학에 잠겨 산 까닭일까요,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놋색의 문장에도 메이는 실망하지 않고 고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크로마, 고지식해. 으음, 있지…,"

 "예, 말씀하세요."

 경미한 호기심이 아크로마를 내리쳤다.

 "휴우 쨩이 내 꽃, 받아줬어!"

 메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한 예상치 못한 말에, 아크로마는 굳이 놀라움의 기색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신(新) 플라즈마단과 게치스를 붕괴시키고 전설의 용을 포획한 잇슈 지방 챔피언, 서브웨이 마스터이자 뮤지컬 마스터, S급 포켓우드 스타도, 결국은 소녀군요. 아크로마가 속으로 중얼였다.

 "축하드립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메이 양은 손색없는 여성분이시고, 애초부터 당신은 휴우 씨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이시니까요. 그가 속마음을 숨겼다.

 "에헤헤-"

 벚꽃향 나는 웃음이 겨울의 한기를 죄다 날려버렸다. 동시에 아크로마의 얼어붙은 심장이나 뇟덩어리도 녹여갔다.

 

 "그런데, 여기로는 왜 오신겁니까?"

 "그냥, 가장 먼저 아크로마에게 와서 자랑하고 싶었는걸?"

 "저요?"

 아크로마는 스스로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값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했다.

 "응! 왜냐면, 아크로마는… 아빠 같아."

 "아버지? 메이 양의 아버지는,"

 무심코 말하자, 갑작스레 진지한 시선―그가 처음으로 메이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받았던 마음을 닫은 과묵한 눈빛―이 날아들어 아크로마는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반듯한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없어."

 메이가 단호하고 짧게 대답했다.

 "--,"

 아크로마는 입을 벌렸으나 소리는 없었다. 메이가 따뜻한 웃음으로, 내쫓은 아크로마를 봄의 정원에 다시 들여주었을때에야, 아크로마 역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크로마는 언제까지나 여기서 날 기다려줘, 꼭."

 "알았습니다, 메이 양."

 무심코 아크로마가 대답했다. 사실 그것이 가능할지는 아크로마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말해버린 것은 주워담을 수 없었기에 아크로마는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끝에 '양'자 빼버리면 안돼? 거리감 느껴진단 말야."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메이 양. 아니, 메이."

 "응, 그렇게!"

 환호하며, 메이가 아크로마의 다소 작은 몸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면, 메이, 즐거운 날이니, 작은 추억을 남겨보시지는 않겠습니까?"

 "?"

 의아해하는 메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큰 숨을 들이마쉬고, 용기를 내어 아크로마가 제안했다.

 "1시간 정도, 짧게 배 여행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놀란 메이는 소리쳐 물었다.

 "이 배, 아직 움직일 수 있어?! 랄까, 그냥 물 위에 떠다니는것도 가능한 거였어?! 배를 둔갑한 비행선이 아니였던거야?!"

 "예. 그럼, 어떠신지?"

 "좋고말고!"

 즐거워하는 메이를 보며 아크로마 역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감정의 연쇄는 아크로마에게 있어 일종의 특이한 과학이었다.

 

"메이, 여기서 계시는 것보다 갑판에 잠시 나가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마는?"

 조종석에 앉은 아크로마가 곁의 메이에게 제안했다. 메이가 물었다.

 "좋은 것?"

 "나가시면 보이실겁니다. 과학과 자연이 낳은 작은 선물입니다."

 여전히 짐작가는 곳이 없는지, 메이가 갸우뚱거리면서도 대답했다.

 "응! 그럼!"

 그렇게 메이가 조종실을 뛰쳐나갔다. "달도 무척 아름답고요," 속삭인 아크로마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채로.

 

갑판은 마치 달콤한 아이싱으로 꾸며놓은 초콜릿 케이크 같았다. 메이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새하얀 융단에는 고운 발자국이 새겨졌다. 은가루는 바람의 지휘에 따라 화려한 무용을 선보였고, 관중 역할의 메이는 환호해주었다.

 "눈이다!!"

 환호성을 지르며 빙그르르, 메이는 관중석을 뛰쳐나와 눈송이와 함께 어우러져 춤추었다. 그녀의 환희는 조종실에까지도 전해져, 아크로마는 긴장을 풀고 다만 조용히 미소지었다. 기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중얼인 단어들은 매서운 겨울바람에 부서져 갑판 위의 메이에게는 닿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고 아크로마는 전자 핸들을 돌렸다. 낮은 목소리로 흥얼인 캐롤은 그 스스로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끔찍한 음색이었다.

 

 

메이 설정 : 마음을 열지 않은 상대(=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과묵한 아이로 비춰집니다. 눈이 빛나는건 여전하지만 그 빛깔이 다르달까, 적대적이진 않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게 딱 보이는 눈빛. 과묵하고, 고독해 보이는 아이. 그러면서도 당돌한 아이. 그쯤으로 비춰지고요, 사실 마음을 열면 "Yo★(윙크)" <-이런 스타일입니다. 외모대로.

 

*배경은 아크로마 관련이벤트가 전부 끝나면 아크로마의 고정 대기스팟인 플라즈마 프리깃(여기라고 알고있는데 혹시 아니면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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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0)

목차

1.   표현력

2.   슬픔

3.   마조히즘

4-1. 꼬마

4-2. 어른

5-1. 비일상

5-2-1. 일상과 감정 I

5-2-2. 일상과 감정 II

 

 

 

 

 

 

 

 

 

 

 

 

1.표현력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특정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끝없는 존경을 표한다.

'광기'

그것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그를 표현하기에는 딱 맞는 표현이었다.

그 어떤 모자란 사람도 그 표현을 사용한다면 분명 그 인물이 완전히 뒤엎어질 것이다.

그 만큼, 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그 매력 역시 '광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서 여우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서는 여자들은 분명 그 매력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녹색.

녹색 역시 그에게 포함되었다.

산과 들의 생명력 넘치는 녹색이 아닌,카키색 같기도 한 죽어가는 쓸쓸한 느낌의 녹색.

그에게 포함되는 것은 녹색을 포함해,전부 묘한 느낌을 풍겼다.

N 하르모니아(N Harmonia),

혹은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ia Gropious).

이세계의 분위기를 풍기는 묘한 이름.

그에게서 유일하게 묘한 느낌이 나지 않았던 것은, 또 묘하게도 그의 회색 눈이었다.

회색 눈이란, 그것이 누구의 소유이든 항상 묘한 느낌이 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런 회색 눈은 유일하게 그의 소유일 때에는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의 눈은 모든 생각을 마비시켰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묘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이것은 조금 강압적이기도 했다.

그를 몇몇 단어와 문장부호의 조합으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특이한 사람이기에 조금 큰 무리가 있다.

물론, 본인에게 표현을 요구한다면 또 어떤 세상이 놀랄만한 표현이 나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이유를 표현한다는 것은 멍청한 것이지만,그럼에도 굳이 표현하자면,

'그가 싫어서. '

이 정도로 표현해 둘까 한다.

나는 근 3년 동안 그와는 특별한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가끔 사람이 북적거리는 히운 시티나 라이몬 시티 등에서 마주치고선 서로 외면하고 지나치면서 몇 번 만났을 뿐이다.

그와의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은, 꽤나 최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만남의 배경은 스카이에로우 브릿지가 되었으며, 때마침 브릿지에 있던 행인 A와 행인 B는 그저 운이 조금 안 좋았던 것일 뿐이다,즉 나의 책임은 조금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그 지나가던 행인 둘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다.

당연하다.

그것도 체렌의 성격 중 한 면이니까.

그 때의 만남은, 발단은 그저 '제 갈길 가다가,' 즉,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패턴.

맹세코 내겐 조금의 잘못도 없다.

정말로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제멋대로 갑자기 손목을 붙잡아 세웠을 뿐이다.

"네 이름이……, 체렌이였었지? "

"아-,그래,맞아. 네. 이. 름. 은. N.이.였.었.지?

그럼 N씨, 손목 좀 놓으시죠? "

하지만 그는 아무리 심한 욕을 먹더라도 눈빛이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그 초점 없이 서서히 생각을 마비시키는 회색 눈.

그릇이 크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광기' 일 뿐이다.

그에게 인간다운 면모가 존재 할 리 없다.

그 인간다운 면모의 자리에는 대신 광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에 대한 사실여부가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계속해서 욕을 퍼붓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슬슬 질릴 만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확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때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험한 말이 나온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비웃겠지만, 참 안타깝게도, 나와 '누군가'는 전혀 인연이 없었으니.

"아니-,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그래? 난 싫어. 너한테 해줄 말은 없는걸. "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로써, 뿌리치는 건 불가능. 

그는 생명학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남자였고,나는 소년일 뿐이었다.

"크윽……,그래서 뭘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걸까?"

"토우코의 행방."

분명히, 그는 토우코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그에게는 인간다운 면모가 없으니까, 라고.

"흥, 알려줄 수 없어, 라면?"

"알고는 있어?"

"글쎄-."

결코 그에게는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단 한마디라도.

그는 그 날, 유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몰아붙여졌다, 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몰아붙인 나는 듬성듬성한 브릿지의 난간을 잡아서 간신히 브릿지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ㄱ,가……! 떨어지잖아!"

그는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동작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때 그를 밀쳐내고 도주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회색 눈이 나를 저지했다.

몸과 생각이 마비되어 나는 그렇게 그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손의 힘이 풀려 난간 사이로 떨어졌다.

그 순간, 주마등 비스무리 한 게 스쳐지나갔다.

만약 주마등이라면, 무척이나 불쾌한 주마등.

N이 조금 지나치게 많은 듯한 주마등.

싫었다. 무의식 속에는 N이 필요 이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싫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의 녹색과 녹차향, 알아듣기 힘든 빠른 말투가 계속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내며 스쳐지나갔다.

분명, 나조차도 그 광기에 감염된 것이다.

머릿속이 N으로 폭주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미쳐갔다.

유언으로 "아아……,내가 결국은 N이라는 작자 때문에 죽는구나……,"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찔끔 감은 순간 무언가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경험상으로 분명히 란쿠루스의 감촉.

그리고 란쿠루스라면 분명히 토우야, 틀림없이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토우코를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가시고기 같은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희생할 것이다.

그런 그녀를 절대로 N과 만나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속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실 세계 속에서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토우야 따위가 아니였다.

눈 앞에 있었던 것은 그 빌어쳐먹을 N.

그가 묻는 척 했다.

"다친 곳은 없어?"

"됐으니까 슬슬 꺼져."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 걱정된다는 투로 능숙하게 말해도, 결국 그 말에는 조금의 인간성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됐으니까 꺼지라고!"

나는 끝내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니까, 혼자서 얼굴을 붉혀봐야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도.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멈출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재빨리 켄호로우를 꺼내 도주했다.

더 이상 그와 공간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광기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더 좋은 표현이 있었다면 사용했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표현력은 거기서 그쳤다. 광기라는 표현을 만들어 낸 녀석은 그래서 더욱 존경스러운 것이다. 나의 표현력은 아주 바닥을 치는 수준이니까.

그가 언제나와 같은 회색 눈으로 나의 등을 응시했다.

뒤돌아 그 눈을 보게 된다면 또 그에게 흡수당할 것은 너무나도 뻔했기에 나는 앞만을 보고 브릿지에서 도망쳤다.

도망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는 것 따위가 아니고 언제나와 같이 제 갈 길로 떠나고 있을 뿐이라고 속였다.

하지만 그래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그를 죽여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좋을 텐데, 당장 죽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당장 죽어버려,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

그 날 이후로, 우리들의 만남 패턴은 조금 바뀌었다.

그는 나와 마주칠 때에는 언제나 토우코의 행방을 물어왔으며, 나는 그럴 때에면 언제나 무답으로 반응했다. 우리 둘의 '경계심' 이라는 이름의 줄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을 정도로 팽팽하게.

그리고 그 줄은 정말로 끊어져버렸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았어야 할 줄이였는데도.

 그는 묘한 사람이였다.

그는 광기에 찬 사람이였다.

그의 묘한 매력은 곧 나의 무의식을 헤집고 들어와 엉망진창으로 부수었다.

나는 그가 싫다.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가 싫다.

그것이 나의 표현력 내에서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의 표현.

 

 

 

 

 

 

 

 

 

 

 

 

 

 

 

 

 

 

2.슬픔

슬픔이란, 인간의 감정 중 억울함, 외로움, 불쾌함, 질투,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로 만든 표현이다.

또한, 슬픔이란 모든 생명체가 가진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와 나의 주변인들에게도 해당된다.

항상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체렌과 친하게 지내던 금발의 소녀.

그녀는 겉보기에는 항상 즐거워 보인다. 고민 따위 없는 만사에 행복한 것처럼 언제나 해맑게 웃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슬픔은 존재한다.

어쩌면, 그 슬픔이 다른 사람들보다 깊기에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체렌은 그렇게 많이 웃지 않는다. 타고난 것인지, 무언가를 빌미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그는 웃지 않고 오로지 그의 변하지 않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만 의존한다.

그런 그는 강하고도 고독하며, 서투르다.

토우코는 긍정으로 매우 부정적인 편인 현실과 맞서 싸운다.

그것을 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존재하는 슬픔을 줄인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은 존재한다. 그녀는 그것을 눈물로 표출함으로써 최대한 줄인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녀는 상냥하다.

토우야는 여러모로 그녀와 비슷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 다르게 살아간다.

그는 현실과 맞서 싸운다. 다만 그는 그 슬픔을 없애지 않고 열정으로 변환해 사용한다.

그렇게 열혈은 그는 거칠지만 그 속에는 따뜻함이 구석구석에 녹아들어 있다.

게치스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나의 슬픔과 직결된다.

그렇게는 말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게치스와 플라즈마단에 쉽게 이용당했었던 것이고, 그 무렵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질리도록 낯을 보던 두 여신의 감정은 어땠을까 하고도 고민하면,

여신이라면 감정이 없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하게 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였던 체렌의 슬픔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꽤나 최근인 편이다. 

스카이에로우에서 일을 벌인 얼마 뒤, 그는 번번히 토우코의 행방을 물어오는 나에게 무답으로 반응하는 것에도 실증이 났는지 화를 냈다.

"토우코의 행방이라면 다른 녀석들도 알 거 아냐! 왜 나한테만 난린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봤-,"

"애초부터 토우코에게는 무슨 볼일인데!"

"조언ㅇ-,"

"그럼 나는 좀 그만 괴롭히라고!"

"사과할게."

정적이 흘렀다. 그가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였다. 

항상 그냥 말해도 될 것도 화를 내며 얘기하는 건 일종의 화풀이였을까나.

물론, 그게 훨씬 더 좋았다. 누군가의 화풀이감이라도 된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니까.

"화풀이야?"

정적을 깬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였다.

"하아……,너한테 이것저것 말해봐야 알아먹을 리 없지. 좋은 말로 할 때 가."

"모르니까 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슬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들려온 흐느낌 소리.

뒤돌아보니, 입술을 물고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울고 있던 체렌이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은 경직되었다.

나는 얼마나 그에게 가혹했던 것인지는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다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혼자만의 오산이였던 걸까.

드디어 말이 나왔다.

"아……,"

그리고 그게 끝.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그를 끌어안아 주는 것 뿐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상처를 입히는 것이였을까.

나를 뿌리치려고 하는 그를,나는 꼭 껴안고 있었다.

그것조차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넌……, 네 나름의 슬픔이 존재하겠지."

내가 할 수 있었던 위로 아닌 위로. 그것은 그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온 말이였을까?

하지만 그의 떨림이 멈춘 것만은 확실했다.

그 상태로 우리는 얼마동안 얼어있었다.

세상과 우리는 별개라는 듯이.

따뜻하고 어지러웠던 그 꿈같이 몽롱했던 순간을 깨버린 것은 그의 말이였다.

"너는 미친거야."

그리고 한순간에, 그가 간단하게 사라져갔다.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린 느낌은 무척이나 허무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 시점 이후로는 꿈과 현실의 지독한 교차 뿐이였다. 아직 꿔야 할 꿈은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아직 인정해야 할 현실도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그렇게 처음과 입장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건 내 쪽.

그는 뒤돌아 주지 않았다.

그는 곧게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가 남기고 간 '미쳤다' 는 말. 그것은 슬픔으로부터 나온 형용사이다. 또한 국어적인 의미로도 나에게 알맞은 표현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어째서인지 거부감이 든다.

그것은 그 단어만의 매력.

매력 있는 것은 싫지 않다.

매력 있는 것은 자신만의 색이 있다.

그 색이 어떤 색이든, 나는 두 가지 색만을 제외하고는 인정한다.

첫 번째 색은 녹색, 두 번째는 검은색.

녹색은 나와 게치스의 죽어가는 녹차색만 포함.

검은색은 색깔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저 흑(黑)일 뿐이다. 제크롬(이상)의 색이기도 했다.나 이외에는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변질된 이상.

나는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나를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나는 그것에 동의하고 싶어한다.

그것에 동의하는 것으로부터, 양심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결코 나는 새하얗게 순수한 사람은 아니니까.

체렌은 언제나 화를 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속이 더 훤히 보이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그가 결국에 하고 싶었던 말을 그 날 처럼 끝까지 모른 채 끝나는 경우도 있다.

떨림을 멈추고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던 그 때의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남의 슬픔까지 함께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가볍지 않으니까, 라는 변명과 함께.

그것은 오만한 녹색의 변명.

곧게 뻗은 검은색, 비뚤어진 이상이 아닌 올곧은 검은색과는 상반되는 색의 변명.

올곧은 검은색은 토우야의 색이였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토우야의 색이자 체렌의 색.

체렌 쪽은 블루블랙이긴 하지만.

토우야의 색과 나의 색은 섞을 수 있다. 섞으면 산림과 숲의 짙은 녹색이 된다.

하지만 체렌의 색과 나의 색은 섞을 수 없다.

섞어서 나오는 색은 색이라고 할 수 없는 빛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을 법한 색의 조합이다.

우리들이 영원히 섞일 수 없듯이.

그러니까, 영원히 섞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3.마조히즘

"마조히즘(masochism)-, 변태 성욕의 하나((이성한테서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이상 성욕)), 피학대 성욕 도착증←→사디즘."

탁-,

"그러나 현재에는 그 의미가 변질되어서 고통을 즐기는 것은 전부 마조히즘이라고 칭한다."

뭐하러 이런 단어에까지 의미 변질을 시도하는 걸까, 하고 씁쓸하게 뒷말을 삼키는 체렌. 

N의 존재를 사진의 얼굴을 유성펜으로 끄적여 지울 수 있듯이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시도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지금 국어사전을 잡고 앉아있는 것이며.

"그 자식은 마조히스트일까나,아니,의외로 나일지도……."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그는 사전을 들여다보던 중 '마조히즘'이라는 추억이 회상되는 단어에 조금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도,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는 그냥 알고 있었을 뿐인 랜덤한 단어였다.

알게 된 계기 역시, 토우코가 그를 'M'이라고 놀려대길래 찾아보았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에서부터였다.

이 단어가 더 신경 쓰이게 된 것도 역시 N, 혹은 네츄럴 때문일 것이다.

체렌에게 그를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네츄럴 쪽보다는 N 쪽이 부르기 쉽다는 이유로 계속 그렇게 불러왔다.

어차피, 네츄럴보다는 N이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쪽이야 얼마든지 있었기에 체렌은 마음 편하게 그쪽 호칭을 사용했으며, 그를 '엔쨩' 이라고 친근하게 불러대는 토우코에게도 권장했으나, 당연히 신나게 씹혔다.

그는 이내 생각을 접고 사전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마조히즘'과 같은 장에 적혀있던 단어는 모조리 건너뛰고서.

그가 다시 그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평범했을 뿐인 어느 수요일이였다.

신문에 실린 작은 기사문, 그리고 흔해 빠진 어떤 랜덤한 인간의 사망소식.

그런데 그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탁한 녹색의 머리카락과 회색 눈.

누군가가 본다면 조금 당연하게 N임을 알 수 있는 사진이였다. 

체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체렌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를 전부 읽은 후에는,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N은 죽었다. 그것도 지독한 인연의 스카이에로우 브릿지에서.

체렌은 그의 본능에 또 한번 떨었다.

그의 본능은 지나친 붉은색을 맛보고 싶다고 속삭였다.

그 잔혹한 본능을 이성이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성이 본능을 이길 수 있는 경우는 적다는 사실에, 체렌의 몸은 조금 더 강하게 떨렸다.

그의 몸은 조금 심하게 떨렸고,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러더니 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몸의 떨림도, 눈동자의 흔들림도, 마구 날뛰던 본능도, 전부 전부 멈추었다.

순간 국어사전의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내가 사디스트였더라……,"

그가 안경을 고쳐썼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거슬렸던 사람이 한 명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그는 사실 N 하르모니아(N Harmonia), 혹은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를 너무나도 중요시하고 있었지만.

애증이 생겨날 정도로 중요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속였을 뿐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죽었어야 할 터인 N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체렌?"

체렌은 그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묘하게 광기를 띈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온 세상을 뒤져보아도 N 뿐이라는 것을, 체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체렌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는 이성 전에 본능이 튀어나온 듯이 테이블을 탁 치고 거칠게 일어나 N의 멱살을 잡았다.

"너……, 어디에 있었던거야, 이 새끼야!"

……."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보았다.

어이없게도, 마주친 두 색은 너무나 잘 맞았다.

제 주제도 알지 못한 채, 지나치게 마르고 지나치게 촉촉한 눈동자가.

"화이트 포리스트."

"이걸 해명하라고!"

체렌이 신문을 집어들어 N, 혹은 그를 닮은 누군가의 사진과 그 아래의 기사문을 가리켰다.

……."

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N이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게치스의 친아들이라거나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의문문이지만 말끝의 발음이 올라가지 않은 문장.

N역시 문제의 기사를 보고 상당히 난해했다.

자신은 아닌데 자신을 조금 많이 닮은 사람.

"그럼 가."

체렌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저기-,"

"가라고!"

결국은 또 소리를 지르게 되는 체렌이다.

이 패턴만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체렌은 또 한 번 '마조히즘' 이라는 단어를 잠깐 연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살짝 스쳐지나간 단어를 완전히 무시하기 위해서 한 마디를 덛붙였다.

"토우코는 못 봤어."

"토우코는,"

"못 봤다고"

"벌써 만났어."

"뭐? 그럼 뭘 더 말하고 싶은 건데!"

아아-, 또 폭발했어, 하고 N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토우코가 네게 조금 더 솔찍해 지라고 내게 말했어."

체렌이 심호흡했다. 설마 토우코까지 날 배신할 줄이야.

"뭐래는거야! 너, 미쳤어? 이 정도로 충분하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체렌이 N을 힐끗 쳐다보았다.

솔직한 질문이였다, N에게는 처음으로 해보는.

N이 대답했다.

"글쎄. 너는 그러길 원하는거야?"

"아……,"

무언가 시원하게 나왔어야 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닥쳐봐. 하아,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래도 말인데,"

체렌이 뒤돌아섰다.

"너하고 친해지고 싶다던가 그런 마음은 일절 없어."

그 말만을 남기고 체렌이 넓은 라이몬 시티의 한 구석으로 섞여들어갔다.

'마조히즘' 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그의 마조히즘 속에 섞여 잊혀졌다.

N은 회색 눈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공허한 눈으로.

바람에 휱날리는 녹색 머리에 공허한 회색 눈이 겹쳐져서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4-1. 꼬마

 풀숲 속에서 어머니와 손을 잡고 헤실헤실 웃으며 즐겁게 걷는 한 꼬마의 모습이 N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들이 생각하듯이, 정말로 저런 꼬마처럼 순수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그는 그런 생각과는 달리, 어엿한 어른을 만나러 가는 중이였다.

그에 맞춰, 성인 여성의 소프라노 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N-! 이쪽이야-!”

N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라라기 박사가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N은 맞인사를 건넸다.

 아라라기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따라와!”

아라라기가 그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앉을 데라고는 없는 연구실 내부를 보며 조금 당혹한 N에게 아라라기가 말했다..

 아하하……, 원래 앉을 데가 없는 데라서.”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라고 묻는 표정의 N에게, 마코모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아아-! 이분이 바로 박사님한테서 들은 N? 아아-, 상상 이상으로 미남이시네! , 그냥 바닥에 앉을 수 밖에 없어요, 평소에는. 아라라기 박사님은 그다지 상관을 안 쓰시는 편이라 뭘 안 갖다 놓으셔서.”

마코모!”

아하핫-, 죄송해요! 죄송해요!”

, 그럼 N군의 얘기를 들어봐야지.

마코모 씨는 가 있어.”

, -.”

한동안 마코모와 놀던 아라라기가 정신을 차리고 N에게 고개를 돌려 살짝 끄덕였다.

“N군의 고민이 뭔데?”

이상이 무너져서 그에 대한 결론적인 대범인, 토우코에게 도움받으러 갔더니 체렌과 토우야, 벨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던지고 자신이 나아갈 길은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 밖에 안 해주고, 그래서 어쩌다 만난 체렌이랑 대화를 하다 보니 더더욱 꼬여버렸다. N은 머릿속을 먼저 정리하고서 그대로 아라라기에게 털어놓았다.

그걸 잠자코 듣던 아라라기가 말했다.

 그래? 토우코의 말이 맞아.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은 스스로 정해야지. 하지만, N군이 선택해서 걷던 길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으니까,  당신에게도 새로운 길을 선택할 시간이 필요한거야.”

……,”

그녀의 말은 N의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뿐, 그의 답답한 심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걸 알겠다는 듯, 아라라기가 말했다.

 흐음……, 갈 길이야 뭐 그렇다 치고. 지금의 N군으로써는 체렌이나 토우코가 더 신경쓰이는거지?”

……,”

토우코에 대해서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토우코라면 다 해결해 줄 것 같았는데 그 아이도 그럴만한 능력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배신감이 뒤따라온 거고.

흔한 경험이니까 말야.

그런데, 체렌에 대해서도 조금 자세히 얘기해 줄래?”

흔한 경험이라는 말이 N의 마음을 강타했다.

개나 소나 한번씩은 해본 경험에 혼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N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N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스카이에로우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에, 저는 토우코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경계하면서 결국 브릿지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때는 제가 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느 날 물어보려 하는데  체렌이…, 울었습니다.”

?”

아니…, 알 수 없는 신문 기사 때문에 체렌이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 수 없는 신문 기사? 그건 됐고, 있지, N. 당신이 말했었지? 체렌은 무른 이상을 쫓는 자라고.

그건 분명히 지혜로운 건 아닐거야.

체렌은 언제까지나 아직 그런 꼬마아이야.”

N은 잊고 있었다. 지나치게 기대고 있던 사람들이였기에, 그들이 아직 어린 소년소녀들이라는 것은 잊고 있었다.

그들은 기댈 수 있는 동료들이기 이전에 어른이 되어가는 N이 도와줄 의무가 있는 꼬마들이였다.

특히 체렌은 어른의 길을 서서히 접어들려 하는 중이였다.

그런 체렌에게 N은 평생 지울 수 없을 지도 모를 상처를 남겼다.

아라라기가 충격받은 N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N군은 단지 양 측면을 모두 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야. 그 누구나가 한번씩은 하게 되는 실수야. 그리고, 언제나 널 도와줄 어른들도 널려 있다는 걸 꼭 기억해줘.”

N은 아직 꼬마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몇몇 사람들에게 쉽사리 풀리지 않는 오해를 샀다.

하지만 그는 피요 이상으로 타락한 사람이였다.

꼬마아이들은 아름다웠다.

옛날에면 사랑했었던 그 시절의 본인에게 느끼는 연정과도 같은 것.

그 아름다운 순수함-, 꼬마다움은 가끔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판다.

그리고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때에야 그 사람은 성인-, 어른이 되는 것이다.

N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4-2. 어른

 ! 토우야! 토우코! 오랜만이야!”

체렌이 꽃처럼 활짝 웃으며 외쳤다.

체렌으로써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였다.

-! 체렌! 오랜만이다!”

렌 군! 정말로, 오랜만이야!”

체렌쨩, 벨이야! , 기억 못 할 리 없나?”

네 사람의 웃음에 하얀 입김이 라이몬 시티를 뒤덮었다.

관람차 타자!”

토우코가 수업 시간에 발표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겨울의 차가움에 그녀의 볼은 평소보다도 붉었다.

? 관람차? 그치만 그거 2인승 아냐?”

그야 뭐, 두 사람씩 타면 되지! 난 체렌이랑 탈게!”

에에? 뭐야? 치사하게! 체렌쨩이랑은 내가 타고 싶었는데!

이잉……, 오랜만에 봤는데에…….”

벨은 나랑 타자!”

잠깐만. 정리해보자면, 나는 토우야랑, 벨은 토우코랑. 이렇게 타자는 거지?”

아유, 답답하게. 그러면 그런 줄 알아야지.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가지고는.”

그리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네 사람이다.

어른스럽다는 건 뭘까, 하고 체렌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접었다.

즐거울 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방해일 뿐이였기에,

체렌은 생각을 접는 쪽이 훨씬 어른스러운 선택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왔다! 체렌, 타자! 우리가 먼저다앗-!”

토우야가 체렌의 팔을 잡아끌었다.

뒤이어 벨과 토우코가 다음 차량에 탑승했다.

 저기말야, 체렌, ,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구? 그 중에 특히 나츠미라는 등산가는 별난 사람이야!”

, 나츠미…? 요즈음은 등산가도 여자아이들이 많구나…?”

? 나츠미 씨는 어엿한 남잔데?”

?”

, 체렌은 어떻게 지냈어?”

난 나름 괜찮았어, .”

체렌이 억지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N과의 트러블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토우야에게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이 소년은 열혈에 천연, 바보이기는 했지만 직감에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거짓말. 체렌, 말했잖아? 힘든 일 있으면 솔직하게 털어놓아달라고. 난 체렌의 소꿉친구, 열혈소년 토우야니까!”

하핫……, 역시 토우야는 못 이긴다니까. 사실은 N이랑 조금 문제가 있긴 했어.”

“N? 좀 더 말해줘!”

“N이 토우코를 찾고 있었어.”

, 물론이지. 나한테도 물어봤는걸.”

체렌은 ?’하고 되물어보려 하던 것을 다시 삼켜버리고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래? 난 그 녀석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스카이에로우에서 떨어질 뻔했거든, 아니 진짜 떨어졌었지.”

“N이 몰아붙인 게 아니라 혼자서 그랬었겠지. 그리고 나서 N이 구해준거고. 맞지?”

, 맞아. 그 이후로도 계속…, …, 관계가 안 좋아.”

체렌 소년!”

?”

체렌 소-오 녀-!”

아니 그러니까,”

체렌 소-오 녀-어어어어어언!”

저기 토우야-,”

, 소년 치고는 생각이 너무 복잡한 거 아냐? 그런고로 생각을 좀 접도록!”

체렌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에 대해 토우야가 코멘트를 날렸다.

체렌 소년, 너 되-게 바보 같은 얼굴 하고 있어.”

, , , 에엣…, 그러니까,”

관람차 안이 두 사람의 경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어린 아이는, 누구나가 다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꼬마라는 호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꼬마들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이미 청소년으로 진화한 뒤인 것이다.

체렌의 블루블랙의 머리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한 쪽은 아직 꼬마의 색을 띈 갈색 눈.

한 쪽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색의 인디고 블루의 눈.

체렌은 알게 모르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인간의 완전체가.

토우야가 그런 체렌을 감싸주듯이 웃었다.

햇살이 겨울날 치고는 유난히 따뜻하게 비추었다.

체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 어른이 될 소년의 순수한 미소가.

저기, 토우야. 기분 좋지 않아?”

! 무척이나 좋아!”

 

 

 

 

 

 

5-1비일상

 체렌.”

, 좀 닥쳐봐. 지금 얇게 썰어야 된다고.”

앞치마도 입지 않은 채 당근을 얇게 썰던 체렌은 잠시 N에게 차갑게 쏘아붙이고서 다시 요리를 재개했다.

고마워.”

…. 난 또 뭐라고.”

체렌이 화를 갈아앉혔다.

계속해서 물 끓는 소리, 후라이팬의 기름이 튀는 소리 등이 나더니 땀을 훔치며 체렌이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잔말 말고 빨리 쳐먹어.”

불량배들이나 사용할 다소 거친 말투가 무표정한 얼굴과는 상반되었다.

N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받아, 뒤이어 안전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날아오는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잡았다.

이내, 체렌 역시 자기 자신의 식사거리와 단 한잔 뿐의 물을 들고 N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앉았다.

침묵의 식사였다.

물도 없이 건조한 편의 요리를 먹는 것이 조금은 괴로운지, N은 이따금씩 보일 듯 말 듯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많지 않은 사람 들 중 한명인 체렌은 그것을 알아채고서도 무시했다.

그의 갈증 따윈 어찌되든 상관 없었기에.

갈증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던 N이 마지막 한 숟갈을 먹어치움으로써 그릇을 완전히 비웠고, 이윽고 체렌 역시 그릇을 비웠다.

식사는 끝났음에도, 두 남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누군가와는 달리, N의 눈동자는 지독히도 체렌의 눈동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도 얼마 안 되어, 체렌이 천천히 자신이 사용한 식기만을 들고서 싱크대로 향했다.

의미심장하게, 혹은 아무 의미 없이, 물이 아주 조금 남은 그의 입술 자국이 남은 채의 유리잔만을 가만히 두고서.

그러나 N은 유리잔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체렌의 뒷모습에만 고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경쾌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체렌이 설거지를 하던 중 나이프만을 씻지 않은 채, 갑자기 수도꼭지를 닫았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씻지 않은 나이프를 들고 다시 식탁에 향했다.

그가 칼끝으로 N  목을 위협하였다.

아무 말도 없이.

N은 움직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칼끝은 목선을 거쳐 올라와 N의 오른턱에 닿았따.

그 상태로, 체렌은 조금 힘을 주어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은 상처를 남겼다.

선홍색의 아름다운 액체가 그의 턱을 타고 내려와 목에, 목선을 따라 그의 옷에 빨간 선을 그었다.

체렌이 말했다.

꼴볼견이네. 지식도 힘도 있는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꼴.

하지만 뭐, 다 네 선택이였지. 그렇게 목 마르면 네 피라도 핥아보지 그래?”

의문문이 아닌 의문문이, 마치 명령문 같은 어조로 울렸다.

그에 대해 N이 의견을 말했다.

지금의 넌 아마 나 못지 않게 미쳤을 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N은 고개를 들어 체렌과 눈높이를 맞추고선, 보란듯이 조심스러운 척 하며 붉은 턱을 핥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약간 섬뜩했지만, 또 체렌에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기도 했다. 체렌은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부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조금 싫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체렌은 말했다.

 어때? 공평하지? 당연히 공평해. 단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네가 영구적으로 파괴한 나의 동심, 정상적이고 이상 없었던 심리상태와 사고방식. 그러니까, 내 쪽에서도 영원히 남을 흉터를 하나쯤 새겨두겠다고. 나랑 정 반대쪽에. 너는 내 왼쪽 가슴에 흉터를 남겼듯이, 난 네 오른쪽 턱에 흉터를 남긴 거야. 어떻게 생각해?”

물론, 정당해.”

체렌의 조금 광기를 띈 질문에, N은 조금 더 광기를 띄고 긍정을 표했다.

마치 서로의 광기, 특히 전혀 정상에서 시작해 N과 맞먹을 정도로 깊어져버린 체렌의 광기를 겨루어보기라도 하는 듯한 풍경이였다.

N이 말했다.

나는 너를 결코 너를 소년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 기회는 이미 놓쳤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인간으로 생각할 뿐이지.”

그래? 만약 우리가 닮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정말 기분 더러울 것 같네. 나 역시 너를 어린 시절에 불행했던 남자로 생각하는 건 아냐.

조금 지나친 광기를 띈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 날 밤의 달은, 어쩐지 붉어서 마치 광기를  띄는 듯 했다.

 

 

 

 

 

 

 

 

 

 

 

 

 

 

 

5-2-1. 일상과 감정 I

 그가 그 때 남겼었던 오른쪽 턱의 흉터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언제까지나 내게 패널티가 될 것이고,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체렌과 나의 관계는 서로 멀면서도 서로 꿰뚫고 있는 묘한 관계가 되었다.

체렌도 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 의견도 없다.

어쨌든간 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다시 또다른 이상과 꿈을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고,

내 뒤에서는 평소처럼 토우코와 토우야, , 그리고 아라라기 박사 등의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

당연한 일상의 모순이라면, 역시 체렌을 꼽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리고 남아있을 상처자국을 확인하려 들 듯, 은빛깔의 나이프는 언제나 일상 속에 위화감을 자아냈다.

그런 위화감이 느껴질 때면 언제나 장난삼아 나이프를 들고 손목을 살살 긁어보기도 했다.

칼끝에 대한 두려움은 그 날부터 사라졌다.

블루블랙과 낯선 녹색은 여전히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옛날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맞지 않을 두 색.

여러 색의 감정이 일상속에서 제각각의 색으로 빛난다.

 

 

5-2-2. 일상과 감정 II

 아직까지도 나는 나의 순수했을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지했던 한 어른이 망가뜨려 놓았던 순수함을.

나는 이에 대한 일종의 복수도 시도하였으나, N 본인이 합리하다고 동의한 관계로 사실상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다.

N과 나의 관계는 여전히 뒤틀려있다. 서로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알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관계.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불만은 품지 않지만.

나는 여차저차 해서 일상 아닌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상 아닌 일상이라고 해도, 일단은 일상이고.

나는 다시 챔피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훈련을 재개했고, 내 뒤에서 토우야와 토우코 벨이 응원해주고 있다.

이런 일상에 모순된 것이 있다면, 역시 그건 N 뿐이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상처자국을 들추기라도 하듯이, 초록색이 조금씩 파릇파릇하게 피어났다.

아름다운 흰색의 겨울이 막을 내리는 것이다.

봄의 막이 완전히 올라가고 나서는 그 녹색이 벨처럼 노랑 섞인 밝은 연두가 되기를 바라며,

죽은 녹색과 블루 블랙은 너무나도 잘 맞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어울리지 않을 두 색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어울리지 않을 두 색이다.

가지각색의 감정이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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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10

포케스페 와타루 x 실버

BW N x FRLG 나츠메


[version 와타실버] 

옥상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잘도 서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양이같아서, 와타루는 자기도 모르게 '푸훗' 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나 되돌아온것은 맞웃음이 아닌 정곡을 찌르는 차가운, 무감정한 말. 

"웃지 마세요. 그다지, 웃고 싶은 날도 아닌데." 

"실버, 그런식이면 아마 너무 아플거야. 마음을 가볍게 하는거야, 

숨을 쉴수 있도록." 

"굳이, 숨을 꼭 쉬어야 할 이유도 지금은,"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세상을 유쾌하게 보는 쪽이," 

"훨씬 불쾌해. 잡소리는 이쯤 하고," 

"춤을 춰야지." 

와타루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까지 누나가 준 선물은 간직하겠다는 듯, 실버는 그 손을 

장갑을 낀 채 그다지 부드럽지는 않게, 그러니 또 거칠지는 않게 잡았다. 

와타루는 대담하게 그 손을 이끌었다. 

화려하지는 않은 모션으로 아슬아슬하게 좁은 난관을 

스테이지 삼아 춤추는 둘. 

"hop, step, 홈 스텝이야" 

"... ... " 

난간을 밟은 발은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질 듯하다. 

그래도 실버는 무감정한 은색 눈으로 벽돌색 머리칼을 휱날리며 춤춘다. 

그런데 댄스를 이끌어나가던 와타루가 갑자기 스텝을 멈춘다. 

"조금, 어지럽지 않아?" 

"상관 없잖아요? 당신이 말했잖아, 종말감을 즐기라고." 

이번에는 소년이 리드한다. 

마음속으로 'hop, step,' 박자를 세며. 

드디어, 미끄러지는 발. 떨어져가는 몸. 

여전히 처음의 얼굴을 간직한 채,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에 

점점 가까워져가는 둘. 


[version N나츠] 

N이 조심스레 그녀의 기다람 흑발을 묶어올렸다. 

"고마워요." 

"응, 별로." 

기본적인 예의만을 간직한 의미없이 차갑기만 한 말. 

아까전의 친절한 행동과는 상반되게, N은 펜싱검을 뽑아들었고, 

나츠메 역시 검을 뽑았다. 

사람이 바뀐것같이, 그 둘은 봐주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이것이 바로 진.검.승.부.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사망-, 인 것이다. 

어차피, 그런 종말감은 즐길 생각으로 온 둘이였지만. 

두 사람의 칼싸움은 마치 춤추는 두마리의 용 같았다. 

휘리릭-, 칭-, 챙-, 그 소리는 멈출 줕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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