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0)

목차

1.   표현력

2.   슬픔

3.   마조히즘

4-1. 꼬마

4-2. 어른

5-1. 비일상

5-2-1. 일상과 감정 I

5-2-2. 일상과 감정 II

 

 

 

 

 

 

 

 

 

 

 

 

1.표현력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특정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끝없는 존경을 표한다.

'광기'

그것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그를 표현하기에는 딱 맞는 표현이었다.

그 어떤 모자란 사람도 그 표현을 사용한다면 분명 그 인물이 완전히 뒤엎어질 것이다.

그 만큼, 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그 매력 역시 '광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서 여우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서는 여자들은 분명 그 매력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녹색.

녹색 역시 그에게 포함되었다.

산과 들의 생명력 넘치는 녹색이 아닌,카키색 같기도 한 죽어가는 쓸쓸한 느낌의 녹색.

그에게 포함되는 것은 녹색을 포함해,전부 묘한 느낌을 풍겼다.

N 하르모니아(N Harmonia),

혹은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ia Gropious).

이세계의 분위기를 풍기는 묘한 이름.

그에게서 유일하게 묘한 느낌이 나지 않았던 것은, 또 묘하게도 그의 회색 눈이었다.

회색 눈이란, 그것이 누구의 소유이든 항상 묘한 느낌이 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런 회색 눈은 유일하게 그의 소유일 때에는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의 눈은 모든 생각을 마비시켰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묘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이것은 조금 강압적이기도 했다.

그를 몇몇 단어와 문장부호의 조합으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특이한 사람이기에 조금 큰 무리가 있다.

물론, 본인에게 표현을 요구한다면 또 어떤 세상이 놀랄만한 표현이 나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이유를 표현한다는 것은 멍청한 것이지만,그럼에도 굳이 표현하자면,

'그가 싫어서. '

이 정도로 표현해 둘까 한다.

나는 근 3년 동안 그와는 특별한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가끔 사람이 북적거리는 히운 시티나 라이몬 시티 등에서 마주치고선 서로 외면하고 지나치면서 몇 번 만났을 뿐이다.

그와의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은, 꽤나 최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만남의 배경은 스카이에로우 브릿지가 되었으며, 때마침 브릿지에 있던 행인 A와 행인 B는 그저 운이 조금 안 좋았던 것일 뿐이다,즉 나의 책임은 조금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그 지나가던 행인 둘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다.

당연하다.

그것도 체렌의 성격 중 한 면이니까.

그 때의 만남은, 발단은 그저 '제 갈길 가다가,' 즉,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패턴.

맹세코 내겐 조금의 잘못도 없다.

정말로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제멋대로 갑자기 손목을 붙잡아 세웠을 뿐이다.

"네 이름이……, 체렌이였었지? "

"아-,그래,맞아. 네. 이. 름. 은. N.이.였.었.지?

그럼 N씨, 손목 좀 놓으시죠? "

하지만 그는 아무리 심한 욕을 먹더라도 눈빛이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그 초점 없이 서서히 생각을 마비시키는 회색 눈.

그릇이 크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광기' 일 뿐이다.

그에게 인간다운 면모가 존재 할 리 없다.

그 인간다운 면모의 자리에는 대신 광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에 대한 사실여부가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계속해서 욕을 퍼붓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슬슬 질릴 만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확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때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험한 말이 나온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비웃겠지만, 참 안타깝게도, 나와 '누군가'는 전혀 인연이 없었으니.

"아니-,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그래? 난 싫어. 너한테 해줄 말은 없는걸. "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로써, 뿌리치는 건 불가능. 

그는 생명학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남자였고,나는 소년일 뿐이었다.

"크윽……,그래서 뭘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걸까?"

"토우코의 행방."

분명히, 그는 토우코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그에게는 인간다운 면모가 없으니까, 라고.

"흥, 알려줄 수 없어, 라면?"

"알고는 있어?"

"글쎄-."

결코 그에게는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단 한마디라도.

그는 그 날, 유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몰아붙여졌다, 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몰아붙인 나는 듬성듬성한 브릿지의 난간을 잡아서 간신히 브릿지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ㄱ,가……! 떨어지잖아!"

그는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동작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때 그를 밀쳐내고 도주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회색 눈이 나를 저지했다.

몸과 생각이 마비되어 나는 그렇게 그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손의 힘이 풀려 난간 사이로 떨어졌다.

그 순간, 주마등 비스무리 한 게 스쳐지나갔다.

만약 주마등이라면, 무척이나 불쾌한 주마등.

N이 조금 지나치게 많은 듯한 주마등.

싫었다. 무의식 속에는 N이 필요 이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싫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의 녹색과 녹차향, 알아듣기 힘든 빠른 말투가 계속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내며 스쳐지나갔다.

분명, 나조차도 그 광기에 감염된 것이다.

머릿속이 N으로 폭주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미쳐갔다.

유언으로 "아아……,내가 결국은 N이라는 작자 때문에 죽는구나……,"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찔끔 감은 순간 무언가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경험상으로 분명히 란쿠루스의 감촉.

그리고 란쿠루스라면 분명히 토우야, 틀림없이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토우코를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가시고기 같은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희생할 것이다.

그런 그녀를 절대로 N과 만나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속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실 세계 속에서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토우야 따위가 아니였다.

눈 앞에 있었던 것은 그 빌어쳐먹을 N.

그가 묻는 척 했다.

"다친 곳은 없어?"

"됐으니까 슬슬 꺼져."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 걱정된다는 투로 능숙하게 말해도, 결국 그 말에는 조금의 인간성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됐으니까 꺼지라고!"

나는 끝내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니까, 혼자서 얼굴을 붉혀봐야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도.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멈출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재빨리 켄호로우를 꺼내 도주했다.

더 이상 그와 공간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광기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더 좋은 표현이 있었다면 사용했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표현력은 거기서 그쳤다. 광기라는 표현을 만들어 낸 녀석은 그래서 더욱 존경스러운 것이다. 나의 표현력은 아주 바닥을 치는 수준이니까.

그가 언제나와 같은 회색 눈으로 나의 등을 응시했다.

뒤돌아 그 눈을 보게 된다면 또 그에게 흡수당할 것은 너무나도 뻔했기에 나는 앞만을 보고 브릿지에서 도망쳤다.

도망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는 것 따위가 아니고 언제나와 같이 제 갈 길로 떠나고 있을 뿐이라고 속였다.

하지만 그래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그를 죽여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좋을 텐데, 당장 죽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당장 죽어버려,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

그 날 이후로, 우리들의 만남 패턴은 조금 바뀌었다.

그는 나와 마주칠 때에는 언제나 토우코의 행방을 물어왔으며, 나는 그럴 때에면 언제나 무답으로 반응했다. 우리 둘의 '경계심' 이라는 이름의 줄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을 정도로 팽팽하게.

그리고 그 줄은 정말로 끊어져버렸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았어야 할 줄이였는데도.

 그는 묘한 사람이였다.

그는 광기에 찬 사람이였다.

그의 묘한 매력은 곧 나의 무의식을 헤집고 들어와 엉망진창으로 부수었다.

나는 그가 싫다.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가 싫다.

그것이 나의 표현력 내에서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의 표현.

 

 

 

 

 

 

 

 

 

 

 

 

 

 

 

 

 

 

2.슬픔

슬픔이란, 인간의 감정 중 억울함, 외로움, 불쾌함, 질투,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로 만든 표현이다.

또한, 슬픔이란 모든 생명체가 가진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와 나의 주변인들에게도 해당된다.

항상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체렌과 친하게 지내던 금발의 소녀.

그녀는 겉보기에는 항상 즐거워 보인다. 고민 따위 없는 만사에 행복한 것처럼 언제나 해맑게 웃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슬픔은 존재한다.

어쩌면, 그 슬픔이 다른 사람들보다 깊기에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체렌은 그렇게 많이 웃지 않는다. 타고난 것인지, 무언가를 빌미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그는 웃지 않고 오로지 그의 변하지 않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만 의존한다.

그런 그는 강하고도 고독하며, 서투르다.

토우코는 긍정으로 매우 부정적인 편인 현실과 맞서 싸운다.

그것을 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존재하는 슬픔을 줄인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은 존재한다. 그녀는 그것을 눈물로 표출함으로써 최대한 줄인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녀는 상냥하다.

토우야는 여러모로 그녀와 비슷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 다르게 살아간다.

그는 현실과 맞서 싸운다. 다만 그는 그 슬픔을 없애지 않고 열정으로 변환해 사용한다.

그렇게 열혈은 그는 거칠지만 그 속에는 따뜻함이 구석구석에 녹아들어 있다.

게치스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나의 슬픔과 직결된다.

그렇게는 말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게치스와 플라즈마단에 쉽게 이용당했었던 것이고, 그 무렵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질리도록 낯을 보던 두 여신의 감정은 어땠을까 하고도 고민하면,

여신이라면 감정이 없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하게 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였던 체렌의 슬픔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꽤나 최근인 편이다. 

스카이에로우에서 일을 벌인 얼마 뒤, 그는 번번히 토우코의 행방을 물어오는 나에게 무답으로 반응하는 것에도 실증이 났는지 화를 냈다.

"토우코의 행방이라면 다른 녀석들도 알 거 아냐! 왜 나한테만 난린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봤-,"

"애초부터 토우코에게는 무슨 볼일인데!"

"조언ㅇ-,"

"그럼 나는 좀 그만 괴롭히라고!"

"사과할게."

정적이 흘렀다. 그가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였다. 

항상 그냥 말해도 될 것도 화를 내며 얘기하는 건 일종의 화풀이였을까나.

물론, 그게 훨씬 더 좋았다. 누군가의 화풀이감이라도 된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니까.

"화풀이야?"

정적을 깬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였다.

"하아……,너한테 이것저것 말해봐야 알아먹을 리 없지. 좋은 말로 할 때 가."

"모르니까 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슬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들려온 흐느낌 소리.

뒤돌아보니, 입술을 물고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울고 있던 체렌이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은 경직되었다.

나는 얼마나 그에게 가혹했던 것인지는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다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혼자만의 오산이였던 걸까.

드디어 말이 나왔다.

"아……,"

그리고 그게 끝.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그를 끌어안아 주는 것 뿐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상처를 입히는 것이였을까.

나를 뿌리치려고 하는 그를,나는 꼭 껴안고 있었다.

그것조차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넌……, 네 나름의 슬픔이 존재하겠지."

내가 할 수 있었던 위로 아닌 위로. 그것은 그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온 말이였을까?

하지만 그의 떨림이 멈춘 것만은 확실했다.

그 상태로 우리는 얼마동안 얼어있었다.

세상과 우리는 별개라는 듯이.

따뜻하고 어지러웠던 그 꿈같이 몽롱했던 순간을 깨버린 것은 그의 말이였다.

"너는 미친거야."

그리고 한순간에, 그가 간단하게 사라져갔다.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린 느낌은 무척이나 허무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 시점 이후로는 꿈과 현실의 지독한 교차 뿐이였다. 아직 꿔야 할 꿈은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아직 인정해야 할 현실도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그렇게 처음과 입장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건 내 쪽.

그는 뒤돌아 주지 않았다.

그는 곧게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가 남기고 간 '미쳤다' 는 말. 그것은 슬픔으로부터 나온 형용사이다. 또한 국어적인 의미로도 나에게 알맞은 표현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어째서인지 거부감이 든다.

그것은 그 단어만의 매력.

매력 있는 것은 싫지 않다.

매력 있는 것은 자신만의 색이 있다.

그 색이 어떤 색이든, 나는 두 가지 색만을 제외하고는 인정한다.

첫 번째 색은 녹색, 두 번째는 검은색.

녹색은 나와 게치스의 죽어가는 녹차색만 포함.

검은색은 색깔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저 흑(黑)일 뿐이다. 제크롬(이상)의 색이기도 했다.나 이외에는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변질된 이상.

나는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나를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나는 그것에 동의하고 싶어한다.

그것에 동의하는 것으로부터, 양심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결코 나는 새하얗게 순수한 사람은 아니니까.

체렌은 언제나 화를 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속이 더 훤히 보이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그가 결국에 하고 싶었던 말을 그 날 처럼 끝까지 모른 채 끝나는 경우도 있다.

떨림을 멈추고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던 그 때의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남의 슬픔까지 함께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가볍지 않으니까, 라는 변명과 함께.

그것은 오만한 녹색의 변명.

곧게 뻗은 검은색, 비뚤어진 이상이 아닌 올곧은 검은색과는 상반되는 색의 변명.

올곧은 검은색은 토우야의 색이였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토우야의 색이자 체렌의 색.

체렌 쪽은 블루블랙이긴 하지만.

토우야의 색과 나의 색은 섞을 수 있다. 섞으면 산림과 숲의 짙은 녹색이 된다.

하지만 체렌의 색과 나의 색은 섞을 수 없다.

섞어서 나오는 색은 색이라고 할 수 없는 빛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을 법한 색의 조합이다.

우리들이 영원히 섞일 수 없듯이.

그러니까, 영원히 섞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3.마조히즘

"마조히즘(masochism)-, 변태 성욕의 하나((이성한테서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이상 성욕)), 피학대 성욕 도착증←→사디즘."

탁-,

"그러나 현재에는 그 의미가 변질되어서 고통을 즐기는 것은 전부 마조히즘이라고 칭한다."

뭐하러 이런 단어에까지 의미 변질을 시도하는 걸까, 하고 씁쓸하게 뒷말을 삼키는 체렌. 

N의 존재를 사진의 얼굴을 유성펜으로 끄적여 지울 수 있듯이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시도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지금 국어사전을 잡고 앉아있는 것이며.

"그 자식은 마조히스트일까나,아니,의외로 나일지도……."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그는 사전을 들여다보던 중 '마조히즘'이라는 추억이 회상되는 단어에 조금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도,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는 그냥 알고 있었을 뿐인 랜덤한 단어였다.

알게 된 계기 역시, 토우코가 그를 'M'이라고 놀려대길래 찾아보았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에서부터였다.

이 단어가 더 신경 쓰이게 된 것도 역시 N, 혹은 네츄럴 때문일 것이다.

체렌에게 그를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네츄럴 쪽보다는 N 쪽이 부르기 쉽다는 이유로 계속 그렇게 불러왔다.

어차피, 네츄럴보다는 N이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쪽이야 얼마든지 있었기에 체렌은 마음 편하게 그쪽 호칭을 사용했으며, 그를 '엔쨩' 이라고 친근하게 불러대는 토우코에게도 권장했으나, 당연히 신나게 씹혔다.

그는 이내 생각을 접고 사전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마조히즘'과 같은 장에 적혀있던 단어는 모조리 건너뛰고서.

그가 다시 그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평범했을 뿐인 어느 수요일이였다.

신문에 실린 작은 기사문, 그리고 흔해 빠진 어떤 랜덤한 인간의 사망소식.

그런데 그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탁한 녹색의 머리카락과 회색 눈.

누군가가 본다면 조금 당연하게 N임을 알 수 있는 사진이였다. 

체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체렌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를 전부 읽은 후에는,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N은 죽었다. 그것도 지독한 인연의 스카이에로우 브릿지에서.

체렌은 그의 본능에 또 한번 떨었다.

그의 본능은 지나친 붉은색을 맛보고 싶다고 속삭였다.

그 잔혹한 본능을 이성이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성이 본능을 이길 수 있는 경우는 적다는 사실에, 체렌의 몸은 조금 더 강하게 떨렸다.

그의 몸은 조금 심하게 떨렸고,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러더니 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몸의 떨림도, 눈동자의 흔들림도, 마구 날뛰던 본능도, 전부 전부 멈추었다.

순간 국어사전의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내가 사디스트였더라……,"

그가 안경을 고쳐썼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거슬렸던 사람이 한 명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그는 사실 N 하르모니아(N Harmonia), 혹은 네츄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Natural Harmonia Gropious)를 너무나도 중요시하고 있었지만.

애증이 생겨날 정도로 중요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속였을 뿐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죽었어야 할 터인 N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체렌?"

체렌은 그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묘하게 광기를 띈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온 세상을 뒤져보아도 N 뿐이라는 것을, 체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체렌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는 이성 전에 본능이 튀어나온 듯이 테이블을 탁 치고 거칠게 일어나 N의 멱살을 잡았다.

"너……, 어디에 있었던거야, 이 새끼야!"

……."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보았다.

어이없게도, 마주친 두 색은 너무나 잘 맞았다.

제 주제도 알지 못한 채, 지나치게 마르고 지나치게 촉촉한 눈동자가.

"화이트 포리스트."

"이걸 해명하라고!"

체렌이 신문을 집어들어 N, 혹은 그를 닮은 누군가의 사진과 그 아래의 기사문을 가리켰다.

……."

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N이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게치스의 친아들이라거나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의문문이지만 말끝의 발음이 올라가지 않은 문장.

N역시 문제의 기사를 보고 상당히 난해했다.

자신은 아닌데 자신을 조금 많이 닮은 사람.

"그럼 가."

체렌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저기-,"

"가라고!"

결국은 또 소리를 지르게 되는 체렌이다.

이 패턴만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체렌은 또 한 번 '마조히즘' 이라는 단어를 잠깐 연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살짝 스쳐지나간 단어를 완전히 무시하기 위해서 한 마디를 덛붙였다.

"토우코는 못 봤어."

"토우코는,"

"못 봤다고"

"벌써 만났어."

"뭐? 그럼 뭘 더 말하고 싶은 건데!"

아아-, 또 폭발했어, 하고 N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토우코가 네게 조금 더 솔찍해 지라고 내게 말했어."

체렌이 심호흡했다. 설마 토우코까지 날 배신할 줄이야.

"뭐래는거야! 너, 미쳤어? 이 정도로 충분하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체렌이 N을 힐끗 쳐다보았다.

솔직한 질문이였다, N에게는 처음으로 해보는.

N이 대답했다.

"글쎄. 너는 그러길 원하는거야?"

"아……,"

무언가 시원하게 나왔어야 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닥쳐봐. 하아,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래도 말인데,"

체렌이 뒤돌아섰다.

"너하고 친해지고 싶다던가 그런 마음은 일절 없어."

그 말만을 남기고 체렌이 넓은 라이몬 시티의 한 구석으로 섞여들어갔다.

'마조히즘' 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그의 마조히즘 속에 섞여 잊혀졌다.

N은 회색 눈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공허한 눈으로.

바람에 휱날리는 녹색 머리에 공허한 회색 눈이 겹쳐져서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4-1. 꼬마

 풀숲 속에서 어머니와 손을 잡고 헤실헤실 웃으며 즐겁게 걷는 한 꼬마의 모습이 N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들이 생각하듯이, 정말로 저런 꼬마처럼 순수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그는 그런 생각과는 달리, 어엿한 어른을 만나러 가는 중이였다.

그에 맞춰, 성인 여성의 소프라노 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N-! 이쪽이야-!”

N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라라기 박사가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N은 맞인사를 건넸다.

 아라라기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따라와!”

아라라기가 그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앉을 데라고는 없는 연구실 내부를 보며 조금 당혹한 N에게 아라라기가 말했다..

 아하하……, 원래 앉을 데가 없는 데라서.”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라고 묻는 표정의 N에게, 마코모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아아-! 이분이 바로 박사님한테서 들은 N? 아아-, 상상 이상으로 미남이시네! , 그냥 바닥에 앉을 수 밖에 없어요, 평소에는. 아라라기 박사님은 그다지 상관을 안 쓰시는 편이라 뭘 안 갖다 놓으셔서.”

마코모!”

아하핫-, 죄송해요! 죄송해요!”

, 그럼 N군의 얘기를 들어봐야지.

마코모 씨는 가 있어.”

, -.”

한동안 마코모와 놀던 아라라기가 정신을 차리고 N에게 고개를 돌려 살짝 끄덕였다.

“N군의 고민이 뭔데?”

이상이 무너져서 그에 대한 결론적인 대범인, 토우코에게 도움받으러 갔더니 체렌과 토우야, 벨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던지고 자신이 나아갈 길은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 밖에 안 해주고, 그래서 어쩌다 만난 체렌이랑 대화를 하다 보니 더더욱 꼬여버렸다. N은 머릿속을 먼저 정리하고서 그대로 아라라기에게 털어놓았다.

그걸 잠자코 듣던 아라라기가 말했다.

 그래? 토우코의 말이 맞아.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은 스스로 정해야지. 하지만, N군이 선택해서 걷던 길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으니까,  당신에게도 새로운 길을 선택할 시간이 필요한거야.”

……,”

그녀의 말은 N의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뿐, 그의 답답한 심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걸 알겠다는 듯, 아라라기가 말했다.

 흐음……, 갈 길이야 뭐 그렇다 치고. 지금의 N군으로써는 체렌이나 토우코가 더 신경쓰이는거지?”

……,”

토우코에 대해서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토우코라면 다 해결해 줄 것 같았는데 그 아이도 그럴만한 능력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배신감이 뒤따라온 거고.

흔한 경험이니까 말야.

그런데, 체렌에 대해서도 조금 자세히 얘기해 줄래?”

흔한 경험이라는 말이 N의 마음을 강타했다.

개나 소나 한번씩은 해본 경험에 혼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N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N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스카이에로우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에, 저는 토우코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경계하면서 결국 브릿지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때는 제가 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느 날 물어보려 하는데  체렌이…, 울었습니다.”

?”

아니…, 알 수 없는 신문 기사 때문에 체렌이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 수 없는 신문 기사? 그건 됐고, 있지, N. 당신이 말했었지? 체렌은 무른 이상을 쫓는 자라고.

그건 분명히 지혜로운 건 아닐거야.

체렌은 언제까지나 아직 그런 꼬마아이야.”

N은 잊고 있었다. 지나치게 기대고 있던 사람들이였기에, 그들이 아직 어린 소년소녀들이라는 것은 잊고 있었다.

그들은 기댈 수 있는 동료들이기 이전에 어른이 되어가는 N이 도와줄 의무가 있는 꼬마들이였다.

특히 체렌은 어른의 길을 서서히 접어들려 하는 중이였다.

그런 체렌에게 N은 평생 지울 수 없을 지도 모를 상처를 남겼다.

아라라기가 충격받은 N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N군은 단지 양 측면을 모두 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야. 그 누구나가 한번씩은 하게 되는 실수야. 그리고, 언제나 널 도와줄 어른들도 널려 있다는 걸 꼭 기억해줘.”

N은 아직 꼬마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몇몇 사람들에게 쉽사리 풀리지 않는 오해를 샀다.

하지만 그는 피요 이상으로 타락한 사람이였다.

꼬마아이들은 아름다웠다.

옛날에면 사랑했었던 그 시절의 본인에게 느끼는 연정과도 같은 것.

그 아름다운 순수함-, 꼬마다움은 가끔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판다.

그리고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때에야 그 사람은 성인-, 어른이 되는 것이다.

N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4-2. 어른

 ! 토우야! 토우코! 오랜만이야!”

체렌이 꽃처럼 활짝 웃으며 외쳤다.

체렌으로써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였다.

-! 체렌! 오랜만이다!”

렌 군! 정말로, 오랜만이야!”

체렌쨩, 벨이야! , 기억 못 할 리 없나?”

네 사람의 웃음에 하얀 입김이 라이몬 시티를 뒤덮었다.

관람차 타자!”

토우코가 수업 시간에 발표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겨울의 차가움에 그녀의 볼은 평소보다도 붉었다.

? 관람차? 그치만 그거 2인승 아냐?”

그야 뭐, 두 사람씩 타면 되지! 난 체렌이랑 탈게!”

에에? 뭐야? 치사하게! 체렌쨩이랑은 내가 타고 싶었는데!

이잉……, 오랜만에 봤는데에…….”

벨은 나랑 타자!”

잠깐만. 정리해보자면, 나는 토우야랑, 벨은 토우코랑. 이렇게 타자는 거지?”

아유, 답답하게. 그러면 그런 줄 알아야지.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가지고는.”

그리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네 사람이다.

어른스럽다는 건 뭘까, 하고 체렌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접었다.

즐거울 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방해일 뿐이였기에,

체렌은 생각을 접는 쪽이 훨씬 어른스러운 선택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왔다! 체렌, 타자! 우리가 먼저다앗-!”

토우야가 체렌의 팔을 잡아끌었다.

뒤이어 벨과 토우코가 다음 차량에 탑승했다.

 저기말야, 체렌, ,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구? 그 중에 특히 나츠미라는 등산가는 별난 사람이야!”

, 나츠미…? 요즈음은 등산가도 여자아이들이 많구나…?”

? 나츠미 씨는 어엿한 남잔데?”

?”

, 체렌은 어떻게 지냈어?”

난 나름 괜찮았어, .”

체렌이 억지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N과의 트러블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토우야에게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이 소년은 열혈에 천연, 바보이기는 했지만 직감에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거짓말. 체렌, 말했잖아? 힘든 일 있으면 솔직하게 털어놓아달라고. 난 체렌의 소꿉친구, 열혈소년 토우야니까!”

하핫……, 역시 토우야는 못 이긴다니까. 사실은 N이랑 조금 문제가 있긴 했어.”

“N? 좀 더 말해줘!”

“N이 토우코를 찾고 있었어.”

, 물론이지. 나한테도 물어봤는걸.”

체렌은 ?’하고 되물어보려 하던 것을 다시 삼켜버리고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래? 난 그 녀석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스카이에로우에서 떨어질 뻔했거든, 아니 진짜 떨어졌었지.”

“N이 몰아붙인 게 아니라 혼자서 그랬었겠지. 그리고 나서 N이 구해준거고. 맞지?”

, 맞아. 그 이후로도 계속…, …, 관계가 안 좋아.”

체렌 소년!”

?”

체렌 소-오 녀-!”

아니 그러니까,”

체렌 소-오 녀-어어어어어언!”

저기 토우야-,”

, 소년 치고는 생각이 너무 복잡한 거 아냐? 그런고로 생각을 좀 접도록!”

체렌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에 대해 토우야가 코멘트를 날렸다.

체렌 소년, 너 되-게 바보 같은 얼굴 하고 있어.”

, , , 에엣…, 그러니까,”

관람차 안이 두 사람의 경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어린 아이는, 누구나가 다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꼬마라는 호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꼬마들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이미 청소년으로 진화한 뒤인 것이다.

체렌의 블루블랙의 머리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한 쪽은 아직 꼬마의 색을 띈 갈색 눈.

한 쪽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색의 인디고 블루의 눈.

체렌은 알게 모르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인간의 완전체가.

토우야가 그런 체렌을 감싸주듯이 웃었다.

햇살이 겨울날 치고는 유난히 따뜻하게 비추었다.

체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 어른이 될 소년의 순수한 미소가.

저기, 토우야. 기분 좋지 않아?”

! 무척이나 좋아!”

 

 

 

 

 

 

5-1비일상

 체렌.”

, 좀 닥쳐봐. 지금 얇게 썰어야 된다고.”

앞치마도 입지 않은 채 당근을 얇게 썰던 체렌은 잠시 N에게 차갑게 쏘아붙이고서 다시 요리를 재개했다.

고마워.”

…. 난 또 뭐라고.”

체렌이 화를 갈아앉혔다.

계속해서 물 끓는 소리, 후라이팬의 기름이 튀는 소리 등이 나더니 땀을 훔치며 체렌이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잔말 말고 빨리 쳐먹어.”

불량배들이나 사용할 다소 거친 말투가 무표정한 얼굴과는 상반되었다.

N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받아, 뒤이어 안전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날아오는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잡았다.

이내, 체렌 역시 자기 자신의 식사거리와 단 한잔 뿐의 물을 들고 N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앉았다.

침묵의 식사였다.

물도 없이 건조한 편의 요리를 먹는 것이 조금은 괴로운지, N은 이따금씩 보일 듯 말 듯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많지 않은 사람 들 중 한명인 체렌은 그것을 알아채고서도 무시했다.

그의 갈증 따윈 어찌되든 상관 없었기에.

갈증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던 N이 마지막 한 숟갈을 먹어치움으로써 그릇을 완전히 비웠고, 이윽고 체렌 역시 그릇을 비웠다.

식사는 끝났음에도, 두 남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누군가와는 달리, N의 눈동자는 지독히도 체렌의 눈동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도 얼마 안 되어, 체렌이 천천히 자신이 사용한 식기만을 들고서 싱크대로 향했다.

의미심장하게, 혹은 아무 의미 없이, 물이 아주 조금 남은 그의 입술 자국이 남은 채의 유리잔만을 가만히 두고서.

그러나 N은 유리잔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체렌의 뒷모습에만 고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경쾌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체렌이 설거지를 하던 중 나이프만을 씻지 않은 채, 갑자기 수도꼭지를 닫았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씻지 않은 나이프를 들고 다시 식탁에 향했다.

그가 칼끝으로 N  목을 위협하였다.

아무 말도 없이.

N은 움직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칼끝은 목선을 거쳐 올라와 N의 오른턱에 닿았따.

그 상태로, 체렌은 조금 힘을 주어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은 상처를 남겼다.

선홍색의 아름다운 액체가 그의 턱을 타고 내려와 목에, 목선을 따라 그의 옷에 빨간 선을 그었다.

체렌이 말했다.

꼴볼견이네. 지식도 힘도 있는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꼴.

하지만 뭐, 다 네 선택이였지. 그렇게 목 마르면 네 피라도 핥아보지 그래?”

의문문이 아닌 의문문이, 마치 명령문 같은 어조로 울렸다.

그에 대해 N이 의견을 말했다.

지금의 넌 아마 나 못지 않게 미쳤을 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N은 고개를 들어 체렌과 눈높이를 맞추고선, 보란듯이 조심스러운 척 하며 붉은 턱을 핥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약간 섬뜩했지만, 또 체렌에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기도 했다. 체렌은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부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조금 싫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체렌은 말했다.

 어때? 공평하지? 당연히 공평해. 단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네가 영구적으로 파괴한 나의 동심, 정상적이고 이상 없었던 심리상태와 사고방식. 그러니까, 내 쪽에서도 영원히 남을 흉터를 하나쯤 새겨두겠다고. 나랑 정 반대쪽에. 너는 내 왼쪽 가슴에 흉터를 남겼듯이, 난 네 오른쪽 턱에 흉터를 남긴 거야. 어떻게 생각해?”

물론, 정당해.”

체렌의 조금 광기를 띈 질문에, N은 조금 더 광기를 띄고 긍정을 표했다.

마치 서로의 광기, 특히 전혀 정상에서 시작해 N과 맞먹을 정도로 깊어져버린 체렌의 광기를 겨루어보기라도 하는 듯한 풍경이였다.

N이 말했다.

나는 너를 결코 너를 소년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 기회는 이미 놓쳤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인간으로 생각할 뿐이지.”

그래? 만약 우리가 닮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정말 기분 더러울 것 같네. 나 역시 너를 어린 시절에 불행했던 남자로 생각하는 건 아냐.

조금 지나친 광기를 띈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 날 밤의 달은, 어쩐지 붉어서 마치 광기를  띄는 듯 했다.

 

 

 

 

 

 

 

 

 

 

 

 

 

 

 

5-2-1. 일상과 감정 I

 그가 그 때 남겼었던 오른쪽 턱의 흉터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언제까지나 내게 패널티가 될 것이고,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체렌과 나의 관계는 서로 멀면서도 서로 꿰뚫고 있는 묘한 관계가 되었다.

체렌도 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 의견도 없다.

어쨌든간 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다시 또다른 이상과 꿈을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고,

내 뒤에서는 평소처럼 토우코와 토우야, , 그리고 아라라기 박사 등의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

당연한 일상의 모순이라면, 역시 체렌을 꼽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리고 남아있을 상처자국을 확인하려 들 듯, 은빛깔의 나이프는 언제나 일상 속에 위화감을 자아냈다.

그런 위화감이 느껴질 때면 언제나 장난삼아 나이프를 들고 손목을 살살 긁어보기도 했다.

칼끝에 대한 두려움은 그 날부터 사라졌다.

블루블랙과 낯선 녹색은 여전히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옛날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맞지 않을 두 색.

여러 색의 감정이 일상속에서 제각각의 색으로 빛난다.

 

 

5-2-2. 일상과 감정 II

 아직까지도 나는 나의 순수했을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지했던 한 어른이 망가뜨려 놓았던 순수함을.

나는 이에 대한 일종의 복수도 시도하였으나, N 본인이 합리하다고 동의한 관계로 사실상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다.

N과 나의 관계는 여전히 뒤틀려있다. 서로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알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관계.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불만은 품지 않지만.

나는 여차저차 해서 일상 아닌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상 아닌 일상이라고 해도, 일단은 일상이고.

나는 다시 챔피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훈련을 재개했고, 내 뒤에서 토우야와 토우코 벨이 응원해주고 있다.

이런 일상에 모순된 것이 있다면, 역시 그건 N 뿐이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상처자국을 들추기라도 하듯이, 초록색이 조금씩 파릇파릇하게 피어났다.

아름다운 흰색의 겨울이 막을 내리는 것이다.

봄의 막이 완전히 올라가고 나서는 그 녹색이 벨처럼 노랑 섞인 밝은 연두가 되기를 바라며,

죽은 녹색과 블루 블랙은 너무나도 잘 맞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어울리지 않을 두 색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어울리지 않을 두 색이다.

가지각색의 감정이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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