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4)


 눈이 뜨였다.

 서서히 통감되기 시작하는 한기에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정신이 차려졌다. 아직 잠 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아직 무감각한 손을 어찌어찌 뻗어 더듬거리며 몬스터볼의 여닫이 버튼을 찌르듯 눌렀다. 튀어나온 날쌩마를 보고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블레이범이 아니였다니…, 내가 잠을 아직 못 깼나 보구나. 어쨌든 똑같은 불꽃 타입이니 상관은 없다.

 "좀 데워줘. 열풍."

 모기만도 못한 볼륨의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빠뜨린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게 뭔지 떠올라야 말이지. 좀처럼 시원스레 떠오르질 않아서 안 말하고 말았다.

 -히히히힝!

 쓸데없이 고개를 쳐들어서 품위를 자랑하며 날쌩마가 울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급속도로 후끈해지는 지대--아니, 순간적으로 빠뜨렸던 '중요한 키워드'가 떠올라버렸다.

 "멈춰! 당장 멈춰! 너 이자식, 날 죽이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돌던 차가운 기운은 어디가고, 어느새 필요 이상으로 후끈해진 지대였다. 재빨리 말렸기에 망정이지 몇 초만 늦었어도 치명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배틀의 용도로 존재하는 기술이니까.

 "앞으로 아침에 내가 잠긴 목소리로 열풍 명령하면 아주 약하게 쓰도록 해라. 추우니까 방 데피라는 뜻이야. 배틀할 때처럼 뜨거우면 곤란해. 그렇다고 또 배틀할 때까지 열풍을 미풍으로 쓰면 그날부로 너랑 나는 끝이다."

 미래의 안전을 위해 조금 따끔하게 말했을 뿐인데, 엄청 진지하게 말한 '이자식 날 죽이려고,'와 '그날부로 너랑 나는 끝이다,' 때문인지 날쌩마의 기가 팍 꺾인 게 보였다. 위로 차원으로 활활 타는 갈기를 부드럽게 쓰담아주자 날쌩마는 다시 명랑해졌다. 지나치게 에너제틱한 움직임에 그만 그 뿔에 찔릴 뻔했고, 아슬아슬하게 피하고서는 다시 따끔한 꾸지람을 놓았다. 결과적으로 날쌩마는 다시 우울해졌지만 방금까지의 사건으로 이 포켓몬은 기운이 없는 편이 낫다는 교훈을 얻은 나는 별달리 위로해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 이상 뜸 들일 시간이 없어, 재빨리 침낭을 접고 짐을 챙겼다. 내야 할 속도와 날쌩마에게 남은 체력 등을 고려하여 날쌩마를 볼에 되돌려놓고는 제브라이카를 꺼내었다. 배낭을 대충 매고서 포켓몬의 등 위에 올라탔다. 첫 번째 우편봉투의 뒷면을 살핌과 함께 목적지는 정해졌다.

  "제브라이카, 일단 북쪽이다."

 

 

*  *  *

 

 

 제브라이카는 초원 위를 초속도로 가로질렀다. 특성이 발동된 모양이다.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상체를 조금 더 기울이고 포켓몬의 목을 더 세게 감싸잡았다. 가장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무슨 풍경보다도 소음이 먼저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내는 소음은 생각보다 작지 않다. 그리고 서서히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마을 풍경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여기다' 싶을 정도로 가까워 졌을 때 제브라이카를 멈춰세웠다. 한바탕 움직여준 제브라이카에게 포상으로 귀와 귀 사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제브라이카가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누구와는 달리 정말 품위있는 모습이다.

 "어어…, 전에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나요?"

 거리를 걷던 중 앳된 소녀가 물었다. 직업상, 만나게 되는 사람이 한둘이여야 말이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쥐어짜보자 대충이지만 소녀가 누군지 기억났다.

 "분명히, 너 저번에 인형을 샀었지?"

 "네! 깜지곰 인형! 생각났다! 언니, 우체부 언니지?"

 "정답!"

 기억해 주니 기뻐서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마음 같아선 더 얘기하고 싶지만, 언니 바쁘거든. 오늘도 편지하고 택배를 잔뜩 가져와서, 빨리 배달해주지 않으면 안되. 그럼, 다음번에 보자! 언니 직업이 직업이잖니, 언젠가 꼭 다시 이 거리를 걸을 날이 올거야."

 "언니, 약속이야?"

 "그래, 약속."

 무릎을 꿇어서 키높이를 맞추고, 꼬마 소녀가 내민 앙증맞은 새끼 손가락에 비교적 각져 보이는 내 새끼를 걸고 힘차게 두 번 흔들어줬다. 그러자 '후후후,' 소녀가 웃었다.

 "참, 다음번에 만나면 꼭 이름을 불러줘야 되?"

 "어…?"

 "하루! 여기저기서 보이는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이(李 말고 this) 하루는 특별해진거야, 잊으면 안되! 앞으로는 매일 오늘처럼 양갈래로 묶을 테니까!"

 "알았어. 그럼 또 보자."

 "응, 언니!"

 

 

*  *  *

 

 

 집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보니 좋지 않은 타이밍에 온 것 같았다. 그래도 별 수 있나.

 "편지 두 장이랑 소포 하나 왔어요!"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어쩔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였다. 불평하며 거칠게 문을 열어제낀 사람은 의외로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미청년이였다.

 "여기요. 착불이네요. 300 포켓이요."

 "더럽게 비싸네. 자."

 당신 입버릇이 더 더럽습니다요. 어쨌든 확실히 수입 300포켓은 거두어들였다.

 편지 뒷면을 확인한 청년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반가운 발신자? 어차피 내 알 바는 아니기에 등을 돌리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속편 : http://cafe.naver.com/since20071003/27512 by. 잉어킹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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