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8

카르마←나기사←카에데인데 카르마랑 나기사 중심임... 온갖 감성이 짬뽕되어있음 일단은 50년대 미국 AU


1.


    “카르마, 제발.”


    한숨 섞인 목소리에 울분이 담겨있다. 카르마는 웃었고, 나기사는 카르마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카르마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다시 씨익 웃었다.


    “걱정 마, 안 죽어.”


    카르마가 액셀을 밟자, 또 어딘가 잘못되어서 나는 것이 틀림없는 소음과 함께 차가 지나치게 빨리 달렸다. 자갈이나 갑각류, 버려진 병 위로 달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꼭 붙든 나기사도 같이 덜컹거렸다. 멀미가 날 것 같다. 나기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차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연한 에메랄드빛으로 고요하게 넘실거리는 모양은 그 순간에는 바다라기보다도 호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고가 날 법한 속도로 차를 몰고 있었지만 새벽의 해안에는 사람들을 지워낸 듯이 아무도 없었다.


    연한 에메랄드빛 바다의 색깔은 저와 그 아이의 중간 즈음 같다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생긋 웃는 얼굴이 예쁘던 그 아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는 슬럼에서 교사 일을 하고 있다던 그는 유독 예쁘장해서 어려서부터 연극배우를 했다. 넉넉하지는 않은 형편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하던 나기사는 극장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기껏해야 그가 원할 때 그에게 생수를 가져다주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비슷한 또래라는 이유로 그는 나기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나기사는 무대에 선 그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정도 연기라면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가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가……’


    ―끼이익,


    나기사가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에 카르마가 급정거했다. 물론 역효과였다.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힘겹게 어깨를 들썩이는 나기사를 카르마가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도 알잖아? 네 탓이 아니야.”


    나기사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멍청아.”


    카르마의 감정이 연민에서 무력감, 무력감에서 초조함, 이윽고 초조함에서 짜증으로 바뀌어갔다. 눈치가 지나치게 좋은 나기사는 그것을 온전히 느꼈다. 그래도 힘 빠진 목소리로 제 할 말을 했다.


    “그래도…… 만약 내가 계속 그 애 옆에 있어 줄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과연 네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응?”


    카르마가 경적을 내리쳤다.


    아무도 없는 바다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기사는 그 소리에도 덜컥 겁을 먹었지만, 주변에는 경찰도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었다고 그래?”


    카르마의 말대로였다. 카르마가 운전대를 잡고 제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거칠게나마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나기사는 결국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폐 끼쳐서 미안해, 카르마.”


    카르마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내려라.”


    “뭐?”


    “어디로든 가라고, 내려서. 다리도 멀쩡하잖아?”


    나기사가 카르마와 눈을 마주했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 대 때렸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카르마와 나름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나기사였기에 알았다―저런 눈빛의 카르마는 사람을 때린다.


    단념하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차 안으로 훅 들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카르마의 코끝을 찔렀을 때 카르마는 나기사를 내쫓은 것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나기사는 이미 카르마의 쉐보레 벨에어를 등진 채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2.


    해안을 계속 걷고 있었다. 걸음 수만큼 발자국이 찍혔다. 태양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점차 따뜻해지는 해안, 나기사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카르마에게 충동적으로 내쫓긴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지만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카르마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런 자세를 취했던 걸지도 모른다. 카르마는 나기사를 소중히 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충분조건처럼 여겼다. 오직 나기사가 시답잖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카르마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곳으로 나기사를 골랐다. 그러나 나기사는 카르마를 이해했다. 누구나 그런 곳이 필요한 법이다―나기사 자신도 그러했다. 그런 카르마가 저를 내버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총이라도 맞지 않는 한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기사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끼고 발밑을 내려보았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콜라병 같았다. 간밤의 누군가가 즐겼던 흔적일 것이다. 얼굴 모를 그들은 즐거웠을까. 즐거움의 대가로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일까. 나기사는 걸음마다 백사장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차례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혈흔이라 신경은 쓰지 않았다.


주변은 점점 밝아지고 사람도 하나둘 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앳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기사는 내륙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햇빛을 받아들인 바다는 연한 에메랄드빛 띠는 것을 그만두었기에.




도시에서는 영어와 비슷한 비율로 드문드문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많이 남쪽으로 왔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주머니를 뒤져 2달러 남짓 되는 돈을 발견했으므로 나기사는 근처의 다이너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이름은 리오였다. 눈썹 색을 보아 머리카락은 염색 금발이었지만, 투명한 파란 눈은 진짜였다. 한눈에 타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느니, 그렇지만 첫눈에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느니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으며 그는 나기사에게 꽤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기사가 적당히 고개를 끄떡여주자, 자기는 성적은 좋았는데 학교를 자퇴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기사는 문득 저도 학교에 되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뭐 하고 살아?”


허를 찔렸다.


“어, 글쎄……”


“너, 놀라는 게 꼭 토끼 같다. 머리 때문에 그런가?”


카에데가 그렇게 묶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카에데 없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괜찮아. 난 여기서 자주 보거든.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사람들.”


“……지금은,” 나기사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기다려? 뭘? 기회를? 사람을?”


“사람을 말이야.”


카르마가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주길 기다리고 있어.




3.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어 시동을 멈추고 핸들 위로 엎드렸다. 낡은 차가 당장 무너져내릴 것처럼 덜거덕거렸다.


    이대로 멕시코나 네바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다. 과거에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미래에도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에 문화적으로 눌어붙은 온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쪽이 중요하다. 오직 사랑만이 무언가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나기사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나기사가 카야노 카에데를 찾았듯이.


    


카에데의 시체를 말이다.


    


‘카야노 카에데’라는 가명으로만 나기사는 마지막까지 그를 알았다. 나는 그의 본명이 유키무라 아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름과 무관하게 그는 언니가 남자친구의 총에 맞은 날 자살했다. 그는 언니와 나기사가 보아주는 것을 유일한 보람으로 살아가던 연기자였고, 언니가 죽고 나기사가 떠난 상황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허무에는 취약한 법이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나기사가 동네에 없었던 이유는 2주 전에 특별한 이유 없이 라스베이거스로 향한 나를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사랑 고백을 유언으로 남긴 카에데의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나기사는 후회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나기사와는 무관하게 카야노 카에데가 텅 빈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카에데는 나기사를 돌보며 자기 자신을 나기사로 가득히 메웠고, 나기사는 자신을 돌보는 카에데로부터 평온을 얻었다.


    


    눈을 뜨자 하늘이 다시 어두웠다.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차를 몰고 그대로 멕시코로 사라질지, 나기사를 찾을지 고민했다.


있을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것에 기뻐하고 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기사로부터 중력을 받으면 이 세상에 속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찾아낸 나기사가 살아있지 않은 모습이라 하더라도 무엇 하나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헬륨 풍선 같은 마음이 나기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지만―그리고 그것이 두렵지도 않았지만―관성처럼 나기사를 찾기로 했다.




4.


    먹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톡톡 떨어지던 비는 눈 깜짝할 새에 소나기가 되었다.


    따라서 카야노 카에데를 덮은 흙 위로, 흙을 덮은 들꽃 위로 연한 비가 가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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